“이제 다시 존재론적 교회로서의 목사,
세상 속의 교회로서의 목사로 나는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금 돌아보며 점검할 때이다. 마라나타!
내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때문에!”
나는 선지자 두 명과 살고 있다. 첫째 선지자는 12살 된 우리 집 큰 아들로 아빠인 나를 십자가 복음 앞에 몰아 세웠다. 대표적인 기억 한 가지. ‘정말 아빠가 예수님 믿는 사람 같니?’ 라는 격려 받고 싶어 물은 질문에 답했다. ‘글쎄’ 처절하게 내 실체를 보게 만든 우리 집 소선지자이다.
둘째 선지자는 아내로 우리 집 대 선지자이시다. 글 쓰는 사람답게 신랄한 비유로 충고하는 내조자로 ‘복음학교’ 이후 그의 권면은 더욱 양날 선 칼처럼 변해버렸다. 때론 벤 곳 또 베기에 너무 아파 ‘그만!’ 을 소리 지를 때도 있다. 하지만 12년 결혼 생활 동안 배운 교훈. ‘아파도 아내의 말은 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녀의 권면과 평가를 지금도 듣고 싶어 한다. 최근 우리 집 대선지자의 한 마디와 당시 그 말이 나왔던 상황이다.
예년에 비해 유달리 무덥고 습했던 올 여름. 하지만 많이들 참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것 같기에 별 뜻 없이 혼자 말로 중얼거렸다. ‘뭐가 그리 덥다고 난리야. 그렇게 덥지는 않은데!’ 마침 거실에서 이를 듣던 아내가 바람처럼 스치듯 하지만 비수를 꽂듯 짧고 굵게 내게 말했다. ‘당신은 교회에만 있잖아요!’ 그녀의 말 한마디가 다시금 ‘지금의 나’ 를 점검케 만든다. 내가 말하는 복음은 입에서만 놀고 있는지? 아니면 내 삶을 좌지우지 하고 있는지 묻고 있다.
섬기고 있는 교회는 에너지 절약차원에서 ‘노타이, 반소매’ 를 권장하며 주일예배 때에도 양복을 입지 않고 사역할 정도로 ‘건강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주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오가기에 은행이나 대형 쇼핑몰과 같지는 않지만 항상 시원함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예배를 인도할 때면 우스개소리로 이렇게 인사를 하라고 했다. ‘그래도 교회는 시원합니다.’ 그렇다! 교회는 무더운 여름 항상 시원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사역’ 이란 이유로 교회 사무실, 내 책상, 내 의자에 앉아 그 시원함을 누리고 있다.
가정의 복잡, 단순한 일상적인 삶도 빠져나와서 말이다. 그러나 아내와 아이들은 다르다. 무더운 여름 에어컨 트는 방법을 몰라서 더위와 싸웠던 것이 아니라 사용 시 지불해야 할 전기료가 부담되고 무섭기에 무더위 속에서 그들은 지냈던 것이다. 무엇보다 교회당, 카페, 사람 만나는 것 등을 아내가 싫어해서가 아니라 홈 스쿨 하는 큰 아들에 대한 부담감, 10년 만에 낳은 늦둥이 둘째 아들의 육아를 책임져야 하기에 집 안에만 갇혀 지냈던 것이다. 어슬렁 어슬렁 교회 복도를 돌아다녀도 ‘수고가 많으시다’ 며 성도님들의 격려를 받는 나와 달리 아내는 아이들 외에 그 누구와 깊은 이야기 한마디 나누지 못하는 날들이 많다.
그러니 ‘뭐가 그리 덥다고 난리야!’ 라는 무심코 내 뱉은 나의 말! 그것을 통해 내 안의 <복음의 진정성, 복음의 실제성>을 어찌 점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취중진담이라는 말이 있듯이 무의식이 실제 내 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시간이 지나 갈수록 가족들을 향한 미안함이 성도들을 향한 죄송함이 되어간다. 마치 성도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목사님은 교회에만 계시잖아요!’
몇 주 전 중고자동차를 알아보기 위해 교회 성도님의 일터인 중고자동차 매매단지를 다녀왔다. 희뿌연 먼지, 뙤약볕 가운데 먼저 손님을 맞이하려는 사람들, 주변 카센터에서 들려오는 굉음들, 한 마디로 만만치 않은 삶의 현장이다.
그런데 내가 서 있는 삶의 현장은 어떠한가? 교회란 곳에서 나는 얼마나 보호받고 있으며 대접받고 있는가? 고가의 기자재들을 가지고 수많은 회중들 앞에서 ‘주님이면 충분합니다.’ 라고 외치며 예배하는 나의 모습에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말하는 복음, 문자적으로 교리적으로 틀리지 않다 할지라도 정말 진짜인가? 아니면 조각 복음, 교회당 안에서만 외치는 복음은 아닌가?’ 목사란 위치는 편안하려고 하면 편할 수 있는 위치, 특권을 부여받고 면제도 받을 수 있는 위치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자신을 <섬김의 종>으로 굴복시키지 않는 한 그럴싸하게, 그런 척, 위장과 변장을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는 자리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쳐서 십자가에 못 박지 않는 한 그 가운데 나오는 설교, 목회가 아무리 완벽한 기승전결, 청산유수라 한들 어찌 세상을 울릴 수 있겠는가? 왼쪽으로 가던 자를 어찌 감동시켜 오른 쪽으로 그 발길을 돌려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목사가 마냥 편한 것일까? 아니다! 성도와 성도 사이에 끼어 고달프고 단순 반복적이고 다양한 행정 처리 등 많은 업무에 시달려 대부분 목회자들은 ‘간’ 과 관련된 병이나 당뇨, 심각한 만성 과로를 가진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진리 대신 내 환경, 상황을 먼저 우선시 할 수는 없다. ‘나를 움직일 수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나를 변화시킬 수 없는 복음은 복음도 아니다.’ 라는 내게 진리가 되어버린 명제! 이제 다시 존재론적 교회로서의 목사, 세상 속의 교회로서의 목사로 나는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금 돌아보며 점검할 때이다. 마라나타! 내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때문에!
아내의 말이 하늘 아버지의 말씀이 되어 내 가슴을 계속 울린다.
‘교회에만 있는 네가 세상 속에서 나의 자녀로 살아가려는 네 형제자매들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느냐! 편안함 속에서는 쉬이 지내기에 이런 저런 바른 말 함부로 할 수는 있겠지! 마치 후방전선에서 지휘봉 들고 최전방에 있는 병사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령관처럼 말이다. 그런 모습은 내가 세운 목사의 모습이 아니다. 그건 내가 바라던 너의 원형도 아니다. 교회에서 사역해도 세상 속의 교회로 살아가라! 그 속에서 네게 나를 보이고 너는 더욱 나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김영표 목사(지구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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