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재는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베트남에 입국한 찰리, 에그롱 선교사 부부가 전쟁의 참화 가운데에서 복음의 통로가 된 과정과 베트남 주민들의 상황을 담고 있다. 대하드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는 베트남의 현대 선교사(史)를 이들의 회고록 ‘베트남에 사랑을 담아’(To vietnam with Love)의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편집자>
늘 죽음이 눈 앞에 있는 삶
베트콩이 장악한 도로 건너편의 부온메투옷은 많은 나병 환자들과 기독선교사연맹 CMA(Christian Missionary Alliance) 선교부에도 최적의 사역 장소였다. 주위에는 치료소에 관계된 스탭들의 가정집이 흩어져 있었고 미국 나병선교협회(American Leprosy Mission)와 메노나이트 중앙위원회(Mennonite Central Committee)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7~8명 정도의 북미 선교사들이 사역하고 있었지만 정치적인 색채를 드러내지 않고 인도적인 봉사만 하고 있을 때여서 비상 연락망 같은 것도 없었다. 현지인 사역자 가하오의 순교, 도로 폐쇄, 베트콩들의 지뢰로 인해 우리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 나타날 수도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다음날 아침 월남군 해병대가 치료소 방향으로 진격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길을 뚫는 동안 나와 게일은 간절히 기도했다. 다행히도 그들은 지뢰를 밟지 않았고, 치료소의 모든 자원들이 안전하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길은 곧 지역 정규군을 통해 회복되었다. 우리는 곧바로 자전거를 타고 치료소로 올라갔다. 어제 밤의 모든 불안과 걱정은 오늘 낮의 해처럼 모두 사라졌다.
치료소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CMA 선교사 후보생들과 우리 가족을 모두 인솔하여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는 안도감과 평안이 있었다. 하지만 간염 때문에 오래 걸을 수 없었다. 숲을 통해 돌아오는 길은 내 인생에서 최악이었다. 17개월 된 둘째 아들 에디도 다음날 아침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역시 아델 박사가 와서 아들을 돌봐주었다. 나는 다시 길 뚫는 작업을 도우러 나갔다. 동료 선교사 댄이 자른 나무를 환자들이 길가로 굴려 옮겼다. 아치와 그의 아들 글렌은 베트콩들이 땅 속에 박아놓은 날카로운 죽창을 제거했다.
수요일 아침, 우리 가족은 비행기를 타고 쁠레이꾸로 갔다. 그날밤, 베트콩이 치료소에 들어와 아델 박사와 아치, 그리고 댄을 납치해 갔다. 나의 낡은 트럭도 징발해 갔는데, 그들을 차에 태워 정글로 들어간 후 소식을 알 길이 없다. 1995년까지도 하노이 정부는 세 사람에 대한 소식을 말해주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사라져갔고, 뒤에는 고아와 과부만 남았다. 우리는 늘 죽음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살았다. 나의 낡은 트럭은 정글 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다.
사이공에서 또 유산한 아내
쁠레이꾸에 돌아갔을 때 아내는 많이 아팠다. 부온메투옷에서 덜컹거리는 군 트럭을 타고 돌아온 것이 안좋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일단 아내를 사이공으로 보냈다. 같이 가고 싶었지만 아직 철부지인 나단과 에디가 있었다. 사이공의 선교사 누군가가 아내를 도울 것이었다. 두 아이들은 쁠레이꾸의 붉은 먼지와 진흙 구덩이에서 잘 뛰어 놀았고 기쁨으로 동생이 태어나기를 기다렸다.
유산(流産)은 내가 두려워하는 단어였다. 아내는 두번이나 유산한 경험이 있었는데 두번째 유산은 베트남에서였다. 의사는 마취도 하지 않고 수술을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강했고 한결같았으며, 이해심과 동정심이 많았다. 그러나 사이공에서 날아온 소식은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아내의 편지에는 검사결과 뱃속의 아이가 죽었다고 쓰여 있었다. 아내가 있는 곳에 가야 했다. 두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쁠레이꾸의 공군 기지를 찾아가 우리를 사이공에 데려다 줄 수 있는지 부탁했다. 마침 수송기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칸막이가 없는 비행기의 엄청난 소음에 아이들이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열린 입과 뺨으로 흘러내리는 큰 눈물방울을 보았다.
전쟁이 심상찮았다. 우리는 베트남에서 4년을 보냈고, 1년만 더 버티면 안식년을 지키기 위해 귀국할 수 있었다. 그 시기가 선교사에게는 가장 힘든 때이다. 아내의 건강상태와 전쟁으로 인해 일찍 귀국하고 싶었다. 나는 CMA선교부의 아시아와 극동지역의 대표인 로버트 S. 크리스맨을 찾아갔다. 그는 태국을 섬기고 있었는데, 유머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굉장히 냉정하고 심사숙고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소파에 기대어 앉아 창밖의 깊어가는 밤을 응시하고 있었다. “의료 진료를 위하여 안식년 귀국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그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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