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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무교’는 항상 우리 곁에 있었다

사진: Unsplash의 Anubhav Saxena

지난 십 년간 종교계에서는 새로운 인구통계 항목인 “무교(Nones)”가 꾸준히 비율을 높이며 두각을 나타냈다.

“무교”는 종교 정체성 조사에서 “(종교) 없음”이라고 응답하는 사람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로서 기존의 종교 전통과 일치하는 부분이 없음을 나타낸다. 퓨(Pew)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무교라고 답한 사람들 가운데 17퍼센트가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또 20퍼센트는 불가지론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다수(63%)는 단지 “특별히 관심 가는 종교 없음”을 선택했다.

무교 가운데 69퍼센트는 50세 미만이고 31퍼센트는 50세 이상이다. (상대적으로 종교를 가진 미국 성인의 45퍼센트는 50세 미만이고, 55퍼센트는 50세 이상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무교는 남성(51%)과 여성(47%)이 거의 비슷한 비율로 나타난다.

지난 50년간 무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증가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1950년대에 특정 종교와 관련이 없다고 말한 사람은 거의 0명에 가까웠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인 네 명 중 한 명(28%)이 무교라고 말한다.

이러한 추세는 현대 세계가 처한 영적 상태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종교계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 담론 분야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무교의 부상을 신앙 포기와 무종교(irreligiosity)의 증가라고 생각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럼에도 한 가지 기억할 점은 무교가 우리 주변에서 없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교회 역사를 통틀어 언제나 “문화적 그리스도인”이 존재했다. 나디아 윌리엄스는 Cultural Christians in the Early Church(초기 교회의 문화 그리스도인)에서 이 용어가 지칭하는 이들을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히지만, 외적 행동,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내적 생각과 동기는 기독교 신앙과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주변 문화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

윌리엄스의 책이 짚어주는 포인트는 명확하다. 문화적 기독교를 현대적인 개념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상 그것은 교회가 생긴 이래로 항상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무종교인의 증가가 이와 관련된 현상이며 오늘날 자신을 무교라고 규정하는 많은 미국인은 단지 수십 년 전의 문화적 그리스도인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유행하는 신앙으로서의 기독교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종교의 신념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종교 정체성을 채택한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니케아 신경의 고백을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기독교 신앙을 거부한다는 건, 그 종교가 주장하는 명제를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간주한다.

물론 이것도 사람들이 종교 정체성을 형성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종교를 가지지 않는 이유로 무교인 사람이 가장 자주 제기하는 게 다름 아니라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의문이다. 무교의 무려 60퍼센트가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의심이 무종교를 지향하는 아주 중요한 이유라고 말한다.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믿음이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의문에 기반을 둔다고 말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각각 83%와 78%), “특별히 관심 가는 종교가 없음”이라는 응답자 중에서는 단지 절반 미만(48%)이 같은 대답을 했다. 무교 중 상당수(47%)가 종교 단체에 대한 혐오가 비종교적인 이유 중 하나라고 답했다. 약 3분의 1(30%)은 종교인으로부터 겪은 나쁜 경험을 언급한다. 전체적으로, 무교의 55퍼센트가 종교 단체나 종교인(또는 둘 다)을 자신들이 비종교적인 주요 이유로 언급했다.

믿음의 형성이라는 과정이 단지 추론에만 기반하지 않고 매우 복잡하기에 이런 결과는 놀랍지 않다. 팀 켈러는 인간의 지식에는 (1) 합리적/지적, (2) 경험적/직관적, (3) 사회적/실용적이라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더불어서 (1) “그것에 타당한 이유가 있고” (2) “그것이 우리의 내적 경험과 일치하며” (3) “그것을 기반으로 한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를 찾을 때” 우리는 무언가를 진짜로 ‘안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켈러는 “적어도 교회에 대한 환멸 때문에 ‘확고하고 활동적인 신자’에서 ‘완전한 불신자’로 변하는 일부 사람들은 세 번째의 사회적 측면에서 보아야 하며, 그들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만큼은 거의 확고하게 가졌던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특히 종교나 정치처럼 사회 현상에 대한 믿음 중 상당수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사회적/실용적 측면에 의해 형성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유형의 믿음을 경제학자 아놀드 클링(Arnold Kling)은 “유행을 타는 믿음”이라고 불렀다. 즉, 내용의 타당성과 관계없이 동료들 사이에서 나의 지위를 높이거나 최소한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믿음을 말한다. 클링의 설명이다. “예를 들어, 젊고 부유한 십대들이 점점 더 LGBTQ+라고 선언하는 건, 그게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유행이기 때문이에요.”

나를 포함한 많은 보수 그리스도인은 여기에 동의할 것이다. 양성애, 섭식 장애, 성전환과 같은 부정적인 행동이 급증하고 있다. 그 원인은 그런 행동의 기본이 되는 신념이 점점 더 대중화되고 동료들에 의해 확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현상을 보면서도 우리가 종종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인기를 얻고 널리 채택되기를 원하는 믿음, 즉 기독교의 믿음에도 얼마든지 동일한 과정이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 믿음은 참되고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정통 복음주의 신앙이 유행하는 믿음이 되기를 원한다.

기독교는 미국에서 아주 오랫동안 유행하는 믿음이었다.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기독교는 가장 유행하는 믿음 중 하나로서 그 지위를 유지했다. 1960년대가 되어서야 하나의 문화 브랜드로서 누리던 지배력을 잃기 시작했다. 따라서 상당수의 미국인들에게 자신들의 종교 꼬리표를 별 부담 없이 “그리스도인”에서 “특별히 관심 가는 종교가 없음”으로 바꾸는 데에는 족히 또 한 번의 50년이 더 걸릴 것이다.

과거를 되돌아보며 기독교가 유행하는 믿음이었던 이유가 사람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향수에 젖기 쉽다. 그러나 유행이 된 다른 믿음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또한 동료들 사이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거나 유지하는 데 필요했기 때문에 받아들인 사람들의 비율은 언제나 높았다.

나의 논제가 정확하다면 그러니까 과거에 상당수의 미국인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이유가 단지 유행하는 믿음이었기 때문이라면, 오늘날 무교의 급부상도 철저한 무종교성의 증가 때문이라기보다는 항상 존재했던 무언가가 드러난 결과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니까 일부 미국인들의 경우에 이전에 유행했던 특정 믿음을 더 유행하는 새로운 믿음으로 바꿨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 힘든 도전과 함께 상당한 기회를 함께 제공한다.

더 많은 위선을 통한 더 나은 도덕성

먼저 도전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미국에서 기독교가 유행했을 때 기독교 도덕은 매우 높은 지위를 차지했다. 그건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물론, 기독교 도덕의 상당 부분, 즉, 인종 평등의 경우에 미국의 역사 전반에 걸쳐 철저하게 무시받았다. 그러나 미국 역사의 초기에 기독교의 도덕 원칙(특히 성과 관련된 원칙)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매우 높게 가치를 인정받았고, 그 결과 도덕 나침반뿐 아니라 죄악된 충동을 억제하는 데에까지 많은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십계명, 예언서, 산상수훈, 바울서신은 기독교 신앙에 완전히 헌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도 널리 인정되는 윤리적 행동에 대한 명확한 틀을 제공했다. 기독교 도덕에 대한 일반적인 사회적 존경심은 특정 행동을 억제하고 성경적 원칙에 기초해서 옳고 그름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을 장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반대로, 공적 영역에서 기독교 도덕의 지위가 쇠퇴함에 따라 죄악된 행동에 대한 외부 제한도 그에 상응하여 침식되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부패한 마음으로 하지 말아야 할 일”(28절)을 허용한 사회에 생길 비극이 무엇일지를 경고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 경고가 현실이 된 사회를 목격하고 있다. 기독교 윤리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적 지지가 사라지는 순간, 개인은 한때 통제되었던 충동에 호기심을 느끼고 거기에 따라서 행동할 가능성이 높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 시스템이 유지되었던 것은 많은 문화적 그리스도인이 위선자였기 때문이다. 위선은 자신이 실천하지 않는 도덕 표준이나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행위로 정의된다.

예를 들어, 1973년에는 미국인의 절반 미만(43%)이 혼전 성관계를 지지했다. 이처럼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가르침 때문에 결혼 외의 성관계를 반대했지만, 그중 상당수는 여전히 불법적인 성적 행위에 가담하고 있었다. 스스로 공언한 믿음과 실제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이들은 용어의 정의상 위선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행동이 (최소한 사회의 기준에서 볼 때)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고 그 점을 기꺼이 인정했다.

그렇다면 이런 식의 위선이 대안보다 더 나을까?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라메쉬 포누루가 주장한 것처럼 위선이 수행하는 사회적 기능은 매우 중요하다. “도덕적 행위에 대한 공공 표준이 영향력을 가지려면, 필연적으로 그 표준을 믿는 일부 사람들이 그것을 충족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품위 있고 관대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건강한 수준에서 어느 정도의 위선은 필수적이다.” 다른 말로 해서, 최선의 선택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서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차선책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마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믿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위선을 선호해야 하는지 여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문화적 기독교에서 무교 상태로 전환되면서 상당한 손실이 발생한 건 사실이다. 기독교가 유행하던 시절에는 참된 믿음으로 가는 길에 오늘날처럼 외부의 장애물이 많지는 않았다. 더불어서 당시에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믿음 때문에 생계를 잃을 염려 없이 “평안하고 조용한 생활”(딤전 2:2)을 하기가 더 쉬웠다.

그러므로 미국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왜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에 기독교가 다시 유행할 가능성은 없으며 무교를 표방하는 이들에게 과거 문화적 기독교 시대의 위선으로 돌아가라는 호소는 전혀 먹히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기독교 이전이나 명목상 그리스도인으로 넘치는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지금 아예 무교인 사람들이 기독교의 도덕을 사용해서 충분히 도덕적이지 않은 그리스도인을 비난하는 전례없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우리가 직면한 도전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염소 판별기

다행히도 심각한 도전과 함께 기회도 찾아온다. 이전에 문화적 그리스도인이었던 사람들이 이제 무교가 됨으로써 누가 “염소”인지를 확실하게 가릴 수 있게 되었다.

성경은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이 참된 신자가 아님을 분명하게 한다(마 7:21-23).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그는 모든 민족을 그의 앞에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다”(마 25:31-33).

미래에 염소들은 예수님에 의해 가려질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염소 판별기”가 1776년에 발명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누가 진정한 예수의 제자이고, 누가 “염소”인지 단박에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가 자신의 지위를 높이는 데에 유리한 유행이라고 생각했던 사람, 심지어 도덕적인 삶도 살았지만, 그들은 사실상 “거듭나지” 않은 염소였던 것이다(요 3:3).

만약에 그런 염소 판별기가 있었다면, 기독교는 한참 전에 유행과는 거리가 먼 종교가 되었을 것이고, 미국에서 도덕성의 쇠퇴는 수십 년 더 일찍 시작되었을 것이다. 만약에 역사의 매 단계에서 유행에 이끌려 그리스도인 행세를 한 염소를 식별하고 그들을 진짜 믿는 양과 분리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교회는 다니지만 진짜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제대로 구분할 수 없다는 건 사실상 시종일관 그리스도인을 괴롭히던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밥 존슨은 그 문제를 이렇게 지적한다. “가장 확실한 전도 대상자는 언제나 교회 안에 있습니다.”

무교 현상을 일종의 자체 식별이 가능한 염소 판별기라고 생각하자. 과거에는 그리스도인 양들 사이에 숨어서 거듭나지 않은 염소로 남아 있던 이들이 자신을 드러낸 것이다. 더 이상 숨지 않고 진짜 양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들이 거듭나지 않은 불신자임을 당당하게 선포한 것이다. 그들이 누구인지 이제는 모를 수가 없다. 따라서 전도가 훨씬 더 쉽게 되었다. (아무 목사나 붙잡고 물어보라. 또는 단편 소설 계시의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에게 물어보라.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불신자를 전도하는 게 쉬운지 아니면 독선적이고 기독교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 거듭나지 않은 문화적 그리스도인을 전도하는 게 쉬운지 말이다.)

무교의 약 44퍼센트(무신론자의 73퍼센트 포함)는 삶에서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거나 종교를 가질 시간이 없어서 비종교를 택한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보지 못하는 그들의 필요를 본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들이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 예수님이 있다.

예수님 같은 분이 없다

종교 정체성의 새로운 변화는 전도를 위한 독특한 기회를 제공한다. 어렵게 보일 수도 있지만, 문화적 기독교에서 훨씬 더 정직한 자기 정체성이라는 무교로의 전환은 복음을 나누기 위한 것보다 명확한 환경을 제공한다. 이는 종교에 대한 불신이나 무관심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이며, 그들이 잠재적으로 문화적 가식의 장벽 없이 복음의 진리를 듣는 데 더 쉽게 마음을 열도록 하는 기회이다.

이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 13:3-9)에 나오는 상황과 비슷하다. 씨 뿌리는 사람은 다양한 땅에 씨앗을 뿌리는데, 그 결과는 복음에 대한 다양한 반응이다. 어떤 씨앗은 길에 떨어지고, 더러는 돌밭과 또 가시덤불 위에 떨어진다. 그리고 일부는 좋은 땅에 심겨진다. 이 비유에서 무교는 문화적 기독교라는 가시가 제거된 땅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 행세를 하지 않는다. 그들의 땅은 이제 복음이 역사할 준비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임무는 복음의 씨앗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뿌리고, 그중 일부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 맺기를 믿는 것이다.

동시에 무교의 부상은 교회 내 성찰과 개혁을 요구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우리가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을 제시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문화적 형태의 기독교를 장려하는가? 우리 교회가 삶에서 역사하는 복음의 변혁적인 힘을 드러내는 공동체인가, 아니면 이 세상의 패턴을 따르라는 압력에 굴복하고 있는가? 무교의 증가는 교회가 제자를 삼는 핵심 사명(마 28:19-20)을 다시 다짐하고, 기독교의 믿음이 단지 유행하는 부속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삶을 변화시키는 관계임을 확신하도록 하는 기회이다.

무교의 증가를 보며 실망해서도 또 현재에 안주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우리의 복음 전도 노력에 활력을 불어넣는 도전이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내가 믿는 신앙을 삶에서 제대로 실천하겠다는 자극을 받아야 한다. 더 신실하게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더 큰 열매를 주실 주님의 주권을 신뢰하며(고전 3:6), 삶을 변화시키는 은혜와 진리의 능력을 삶으로 보여주며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무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내뱉는 “특별히 관심 가는 종교가 없음”이라는 대답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빌 2:9)을 믿음”으로 바뀌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복음기도신문]

조 카터(Joe Carter) | 조 카터는 미국 TGC의 에디터이다. 미국 McLean Bible Church의 행정 목사로 섬기고 있으며, The Life and Faith Field Guide for Parents의 저자이며, NIV Lifehacks Bible의 편집자이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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