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70주년 특별기획]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9)
드디어 군복을 벗다
나는 포천에서의 군 생활을 끝으로 1954년 8월 14일, 만 4년 1개월의 군복무를 마치고 휴전 후 제1차로 만기 제대식에 참석했다. 연병장에 도열한 제대 장병들에게 사단장이 직접 제대 증서를 수여했다.
사단장 백남권 소장은 내게 물었다.
“귀관은 몇 살인가?”
“만 20세입니다.”
“집에 가서 푹 쉬고 다시 군에 입대해야 되겠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제대식을 마치고 곧바로 양양 처가로 달려갔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장모님을 모시고 아들 노릇을 잘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아무런 묘안이 없었다.
우선 제대할 때 가져온 군복 바지를 곤색으로 염색한 후에 사복 차림을 하고 양양 시내 하나밖에 없다는 ‘불로정’ 다방에서 세월을 보냈다. 장모님은 가끔 행여나 사위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셨는지 장날이면 시장에서 쌀을 팔아 내 용돈을 마련해 주시며 밖에 나가 바람 좀 쐬고 오라고 위로하곤 하셨다.
하루는 집사람에게 고향의 부모님께 인사도 하고 손자도 보여드릴 겸 단양에 다녀오자고 했다. 그해 늦은 가을 아들을 데리고 고향을 찾아갔다. 부모님은 낯선 타향에서 장가들어 달덩이 같은 며느리와 손자를 데리고 나타난 아들을 보시자 놀라기도 하고 대견해 하기도 하셨다. 어머님은 동네 친구들에게 침이 마르도록 며느리 자랑을 하셨다. 며칠 후, 부모님께 말씀드린 대로 양양에 가서 장모님을 모시고 살겠다고 했다.
“제대하고 단양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효도하며 살아야 하지만 여의치 못한 숙명을 이해해 주십시오.”
부모님께 양해를 구하고 단양을 떠났다. 어머님은 섭섭했는지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눈물을 훔쳤다. 지금도 그 어머님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가장의 사명을 고민하다
나는 양양으로 돌아온 후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데릴사위의 역할인지 곰곰히 생각했다. 당시 장모님은 장인어른이 해오시던 농사일을 계속 하셨는데 나도 장모님을 도와 밭일 뿐 아니라 논농사도 지어야했다. 농사 일이 익숙해질 무렵, 마당에 닭 계사를 신축하고 양계업도 시작했다. 아무리 고된 일인들 어린시절 고생에 비하랴 싶은 맘을 먹었다. 먹고 싶은 만큼 배불리 먹을 수만 있으면 감사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찾아와서 수복지구 양양에 처음 신설되는 유치원 보모직을 집사람에게 권유했다. 아기는 장모님이 맡아 기르고 집사람은 본격적인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내가 유치원으로 출근하면 자연히 장모님과 둘이 남게 되어 때로는 농사일을 거들기도 하고 때로는 아기를 돌보는 당번 신세가 되기도 했다.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원하는 삶은 이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본격적으로 진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각자 하던 일을 끝내고 저녁 밥상에 둘러앉으면 괜히 남자로서의 자존심에 맘이 편치 않았다. 부모님의 재산을 상속받은 것도 아니고 교육을 많이 받지도 못했는데 이것이 데릴사위의 길인가 고민이 됐다. 드디어 나는 결단했다.
어느 날 저녁상을 물리고 장모님과 아내에게 단호한 소신을 밝혔다.
“내일부터 식구들을 부양하는 가장으로 변신하여 우리 가족들의 생계를 내가 책임지겠으니 당신은 유치원 보모직을 사임하시오.”
아내는 월급도 만족스럽고 적성에도 맞는데 왜 그만두라고 하느냐며 내 말에 반기를 들었다.
“처가살이를 하려면 확실하게 하겠소.”
거듭 보모직 사퇴를 요구했으나 아내의 출근은 계속됐다. 당시 양양에는 수복지구 복구에 폐허가 된 관공서 건축이 시작돼 노동 인력 모집이 많았다. 나는 노동 품을 팔더라도 식구들은 내 힘으로 부양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복음기도신문]
조용학 | 1934~2013. 충남 단양 생(生). 학도병으로 6.25전쟁 참전. 삼미그룹 총무과장 정년퇴직. 서울 노원구 국가유공자수훈회 사무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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