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 잠 4:8

[특별기획] 인민군 포로를 먹이다

사진: Unsplash의 Michael Robillard

[정전협정 70주년 특별기획]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1)

며칠 후 인제 시내가 가까운 곳에 드디어 도착했다. 실개울 숲을 따라 인제 시내로 들어가는데 저만큼 보이는 골짜기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다가갔다. 연기 나는 골짜기에 접근했다. 외딴 초가집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권총을 빼어들고 접근해 동태를 살폈다. 그런데 인민군 하나가 심하게 다리를 절뚝거리며 밖에 있는 밀짚 한 단을 질질 끌고 부엌으로 가는데 언뜻 보아도 부상이 심해보였다. 나도 역시 계급장 없는 인민군 군복 차림이라 여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무 뭘하고 있습니까?” 물었더니 주저 앉으면서 말했다.
“아이고 동무 어서 오시라요.” 나를 반겼다.

사연을 들어보니 집안에 있는 인민군은 모두 11명인데 전투 중 부상을 당해 제33사 의무처에 후송되어 치료를 받던 중 국방군의 기습을 받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부상자들은 군용차로 후방(북쪽)으로 후송되고 일부 환자들이 남아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들이 떠나면서 여기 있는 환자들을 바로 후송하겠다고 약속을 받았는데 벌써 7일이 지났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다는 것이다.

부상병 11명중 3명은 이미 죽었고 나머지 8명은 대부분 거동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자신만 간신히 움직이는데 자기도 대퇴부에 총상을 입어 절뚝거리며 동료환자들을 돌봐주고 있다는 것이다. 너무 힘이 들어 죽겠다고 하소연하며 나를 구세주 만난 듯 반기면서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일단 확인해 보려고 거적떼기(가마니로 문을 가리고 있다)를 열었더니 환자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파리 떼가 득실거렸다. 어떤 환자가 죽었느냐고 물었더니 부엌에서 쓰는 부지깽이로 세 명의 사자(死者)를 가리켰다.

“당신 계급은?” 물었다. 그는 소송소대의 분대장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내가 뭘 도와줬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부엌 가마솥에 있는 콩과 강냉이를 볶아서 먹게 해달라고 했다. 그와 대화하면서 나는 계속 생각했다. 전황을 볼 때 인민군은 후퇴를 거듭하고 있고 국군의 진격부대는 가까이 와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부근에 인민군의 잔병은 없을 것으로 보였다.

비록 적군의 부상병들이지만 내가 수고하여 그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한다면 그들도 배를 채울 것이고 나도 먹거리를 챙겨 남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밖에 쌓여 있는 밀짚을 날라다가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펴 콩과 강냉이를 볶았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인민군 분대장은 “동무, 고맙소.”를 연발했다.

인민군은 국군과 달리 미대(米帶) 사용을 통일하고 있다. 이는 쌀주머니를 말한다. 쌀과 콩류를 볶아서 미대에 넣어 양 어깨에 메고 가다가 식사 대용으로 먹는 것이다. 나도 미대 사용에 대해 무척 편리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미대에 들어있는 볶은 쌀, 콩, 강냉이를 먹고 수통의 물을 마시면 전투 중에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부지런히 콩과 강냉이를 볶은 다음 분대장에게 인계하고 그들이 갖고 있던 미대에 내가 먹을 것을 집어넣고 떠나오는데 분대장은 자기들이 후송되면 꼭 은혜를 갚겠다며 부탁하듯 말했다. 이곳 외딴 집에 있는 부상병들을 하루 속히 후송되도록 꼭 연락해 달라고 애원했다.

나는 그날 밤이 새도록 강 길을 따라 원통을 지나 숲속에서 하룻밤을 지냈는데 멀리 홍천 방향에 번개 같은 불이 번쩍이는 것을 보고 아군의 포라고 생각하며 밤을 지새웠다.
‘사랑하는 이야, 우리는 기약 없이 눈물로 헤어졌지만 나는 당신에게 너무나 잔인한 상처를 준 것 같소.’ 그런 고백이 나왔다.

이튿날 저녁 무렵 인제 외곽을 따라 홍천으로 가는 며느리고개를 향해 올라가는데 갑자기 무장을 하고 뛰어내려오는 4~5명의 인민군을 만났다. 순간 나는 안심하고 걷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피할 시간도 없었다.

“동무 소속이 어디오. 여기가 어딘데 무장도 하지 않았소.”라고 말했다.
다급한 나는 “33사 의무처요.”라고 순간적으로 말했다.
바로 어제 만나 헤어졌던 인민군 부상자의 소속부대다. 보아하니 이들도 다급하게 북쪽으로 도망치는 최전방 수색대 같이 보였다.
“동무, 지금 어디로 가는 거요?”
나는 그들보다 먼저 며느리고개를 넘어 북쪽으로 가다가 만난 것처럼 말했다.
“인제에 있는 부상자 동무들에게 가야하오.”
그러자 그들은 내게 다그쳤다.
“동무, 정신없는 소리 말고 우리를 따라 가기요.”
그때 겨드랑이에 차는 삼각대에 권총이 있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러나 더 이상 변명을 하기도 어려워 이렇게 말했다.
“저기 외딴 집에 부상당한 동무들이 있소.”
그들에게 가봐야 한다고 넌지시 던졌다.
“그렇게 할 시간이 없소. 잔소리 말고 빨리 가자요.”

다급해진 그들을 보며 국군이 목전에 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잔인한 놈들에게 더 이상 변명할 수 없어 따라가야 했다. 그날 밤 밤이 새도록 따라간 곳이 강원도 화천 부근인 것을 이정표를 보고 알았다. 고갯마루에 이르러 그들이 내가 메고 있는 미대를 가리키며 물었다.
“미대에 들어 있는 것이 뭐야.”
볶은 콩이라고 하니 같이 먹자고 했다. 그들도 쫓기는 신세라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한 놈이 배가 찼는지 나를 보고 물었다.
“동무, 고향이 어디오.”
순간 하나님은 내게 빠른 신호를 보내주셨다.
“황해도 봉산입니다.” 대답했다.
“몇 살이오.”
“열 아홉살입니다.”
“학생 동무구만, 수고가 많소.”

분위기가 약간 부드러워졌다. 그중의 선임자로 보이는 친구가 수통을 걷어 주면서 말했다.
“저 아래 내려가서 물 좀 받아 오기요.”
나는 수통을 받아 가지고 골짜기로 내려가면서 생각했다.
“기회가 또 왔구나.”
기뻤다. 조금 내려오니 흐르는 물이 있고 양쪽에는 버드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 40:1)

주님께서 내게 특별한 지혜를 주신 것이다. 나는 권총을 빼어들고 허공을 향해 2발의 공포를 쏘면서 골짜기의 버드나무 숲을 헤치며 무작정 남쪽으로 달음박질 쳤다. 내가 쏘아올린 공포는 인민군이 나를 기다리지 못하고 북으로 도망치게 하려는 작전이었다.

그 이튿날 밤 강원도 인제 20km의 이정표를 발견하고 강변길을 따라 남진할 계획을 세웠다. 하루에 십리를 가더라도 더 이상은 인민군에게 재발견되지 않고 남하하기 위해 다짐을 하고 숲속에서 잠깐 잠을 청했다. 초저녁 무렵 인제에 진입해 시내의 동태를 살폈다.

너무 조용하여 길모퉁이를 돌아가려는데 비가 내린 길에 사람이 건너간 발자국을 발견하고 권총을 빼어들고 잠복했다. 잠시 뒤 10세 가량 된 계집아이가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접시에 무엇을 받쳐 들고 도로를 건너 큰 대문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계집아이의 뒤를 따라 지하방에 들어가니 70세 가량 된 할머니가 촛불을 밝혀놓고 밥을 먹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할머니는 깜짝 놀라면서 내가 입은 계급장 없는 인민군 군복을 확인하고 황급하게 물었다.
“동무, 어째 이제까지 후퇴하지 못하고 낙오가 됐는가?” 그리곤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우리 아들이 인민군 대위인데 엊그제 북으로 후퇴하면서 이 에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났는데….” 말끝을 흐렸다. 나는 옆에서 떨고 있는 계집아이를 가리키면서 “저 아이는 누구냐?”고 물었다.

인민군 중대장의 딸이고 자기 손녀라고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나는 할머니에게 배가 고파 죽겠으니 밥을 좀 달라고 했다. 할머니는 어서 먹으라고 상을 내게 밀었다. 냄비 뚜껑을 열어보니 1인분 정도의 하얀 쌀밥이다. 순식간에 밥을 먹어치우고 나니 살 것 같았다.

할머니는 어제 저녁부터 며느리고개를 넘어 홍천 쪽에서 대포소리가 나고 번개같이 밤하늘이 붉게 물들었다며 또 국방군이 쳐들어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늙었고 손녀는 어린아이니 국방군이 오더라도 죽이지는 않겠지만 젊은 동무는 몸을 피하는 게 좋겠소.” 오히려 염려를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내 자신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잠이 쏟아졌다. 할머니에게 잠깐만 자고 싶으니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했다. 여기서 자면 위험하니 위에 있는 골방에서 쉬라고 방문을 열어줬다. 골방에 나가 떨어져 잠을 자고 있는데 1시간쯤 지났을 때 할머니가 나를 다급하게 흔들며 깨웠다. 지금 며느리고개 부근에서 총소리와 자동차 소리가 요란하니 국방군이 쳐들어온 것 같다고 빨리 피하라는 것이었다. [복음기도신문]

조용학 | 1934~2013. 충남 단양 생(生). 학도병으로 6.25전쟁 참전. 삼미그룹 총무과장 정년퇴직. 서울 노원구 국가유공자수훈회 사무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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