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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봄 칼럼] 껍질까서 먹어 목메 조심해

사진 : Ben-White on Unsplash

그녀를 처음 본 건, 멜빈의 미혼 엄마 에스다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오는 길이었다.

12년 전, 18살 나이에 혼자 멜빈을 낳고 온갖 행상을 해서 멜빈을 키운 에스다는 지금은 몸이 불편한 엄마까지 부양하고 있다.

태생적으로 몸이 약한 탓에 자주 쓰러지기도 하고, 사는 게 힘들다며 가끔 울기도 하지만, 늘 그렇듯 에스다는 아버지 없는 아들의 엄마, 병약한 노모의 딸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

예배 때마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춤을 추고 큰소리로 찬양하면서 예배드리는 그녀는 교회 일에도 언제나 열심이다.

내가 팀니어를 잘할 수 있었다면 에스다에게 내가 만난 하나님을 더 깊고 풍성하게 전할 수 있을 텐데라는 아쉬운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나의 간증보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에 간증하고 싶을 때마다 예배를 드린다.

우리의 지난 아픈 시간을 예배의 제물로 드리고 돌아온 날, 숙소 입구 사거리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갈색이었다. 흑인인 그녀를 갈색으로 만든 건 흙먼지였다.

온몸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그녀의 뼈만 남은 앙상한 몸을 가리고 있는 셔츠 속으로 그녀의 가슴이 다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은 남자의 것처럼 너무 빈약했다. 무심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을 보고 난 첫눈에 알아봤다.

‘머리에 꽃 꽂은 언니’라는 것을.

그런 언니들은 어느 나라에나 다 있구나. 어느 나라의 식당에 요리사가 있고, 물컵이 있고, 냅킨이 있는 것처럼 어느 도시에나 정신을 놓아버린 사람들이 시위하듯 거리에 있다는 사실에 나는 가슴이 먹먹했다.

허공에서 시선을 거둔 그녀는 나를 보자 성큼성큼 다가왔다. 마치 나와 약속이라도 한 듯 나에게 다가오는 그녀의 발걸음이 하도 당당해서 나도 당당하게 그녀를 아는 체해야 할 그것 같았다.

성큼 내 앞에 다가온 그녀가 뜻밖의 질문을 했다.

Who are you?

시에라리온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유창한 본토 발음이었다. 하지만 나를 더 당황하게 만든 것은 그녀가 던진 질문이었다. 내가 누구냐니.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얼른 대답해야 한다.

‘당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국에서 온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그런데 뛰기 시작한 심장 때문에 혀가 굳어버린 것처럼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 단어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했다. 그때, 허겁지겁 다가온 폴이 그녀를 제지하면서 쫓았다. ‘괜찮아 내버려 둬’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왜 나의 심장은 그렇게 뛰었을까? 정신이 온전하지 않다고 이미 결론을 내려버린 그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나샤. 믿거나 말거나 통신에 의하면 그녀는 미국 유학 중 마약중독으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시에라리온에서 미국 유학까지 간 것으로 보아 그녀는 대단한 집안의 자녀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에 사는지도 모른다. 가끔 사거리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먹을 것을 뺏어 먹고 다닌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쫓아내도 다시 찾아와서 소란을 피운다고 하니, 이미 마을에서도 그녀의 존재는 총체적 난국이 되었다.

그날 이후 사거리에 갈 때마다 그녀를 찾는다. 하지만 막상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흠칫해서 외면한다. 나에게는 아직 정신 나간 마약중독자를 직면할 용기가 없었다. 그 용기 없음이 들킬까 봐 애써 나의 비겁함을 숨기면서 못 본 척하는 중이었다. 돌멩이를 사람들에게 던지는 것을 목격한 뒤로는 두려움은 가중되었고, 나뭇가지 치는 칼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본 뒤로는 절대 가까이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사거리에 가는 것을 주저했다.

그녀는 유독 나에게 관심이 많았다. 먼발치에서 내가 보이면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를 나는 한 번도 두 팔 벌려 반기지 않았다. 다른 곳에 볼일이 있는 것처럼 교묘하게 피하거나 돌아섰다. 물론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만큼은 그녀를 반겨줘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녀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어느새 그녀는 나에게 손댈 수 없는, 하지만 버릴 수 없는 뜨거운 감자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를 안을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예전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사실 동네 미친년, 많은 이들에게 뜨거운 감자 같은 존재였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전도했던 어린 딸이 있었다. 누군가는 해장국을 사주었고, 누군가는 술병에 걸려 응급실에 누워있는 나의 병원비를 대신 내주기도 했다. 상처투성이 성격 고약한 나를 인내해 준 절친 전도사님이 있었고, 공황장애로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는 내 집 문 앞에 먹거리를 가져다준 지체가 있었다.

동네 미친년처럼 헤집고 다녔던 뜨거운 감자를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준 사랑들이 있었다.

그날도 에스다를 만나러 오는 길, 사거리 시장에서 달걀을 팔고 있는 어거스타와 마이야추를 만났다. 한 알에 2000 레온, 빵 2개 가격인 달걀은 이곳에서는 특별한 식재료다. 한국의 재래시장에서 삭스핀을 팔고 있는 것 같은 경우다. 차를 타고 사거리를 지나가는 부유한 이들이 대량 구매하거나 말라리아나 열병을 앓은 후 몸보신이 필요한 이들이 찾는 경우가 있어서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달걀을 파는 경우가 있다.

마침 수중에 돈이 있어서 5개를 사서 에스다와 아이들과 나눠 먹었다. 그때, 어디에 있었는지 보이지 않았던 아나샤가 갑자기 우리 앞으로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깜짝 놀란 우리가 미처 피하기도 전에 그녀는 우리 손에 있는 달걀을 강탈하더니 껍질째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아냐. 그렇게 먹는 게 아니야’라며 까주려고 말렸더니 한입에 먹고는 도망을 간다. “야!!! 껍질 까서 먹어. 목메. 조심해!!!”

급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한국말로 소리 질렀다. 삶은 달걀조차 제대로 까먹지 못하는 그녀를 어쩌자고 피했을까? 어쩌자고 그녀를 뜨거운 감자 취급했을까? <계속>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작지만 피어있는 꽃들>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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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봄 | 기록하는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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