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잃은 한 북한 청년이 탈북해서 하나님을 만나, 이제는 북한의 복음화를 꿈꾸고 있다. 그 내용을 담은 ‘연어의 꿈’(강디모데, 예영B&P刊, 2013)을 요약, 연재한다. <편집자>
출소증을 받아 고향 가는 기차에 올랐다. 아무것도 못 먹고 서서 가는데 한 꽃제비가 사탕 20알을 주머니에 넣어주고 내렸다. 북받쳐 오르는 감동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것은 엘리야의 까마귀였다.
얼마 후 영문도 모른채 보위부에 다시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 그들은 쪽지를 내밀었다. 아버지의 필체였다. 하나님을 믿었다는 이유로 함흥15호 요덕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사망했다고 했다.
그들이 나에게 “하나님이 있다고 믿느냐?”고 질문했다. 그러나 나는 부인했다. 베드로가 생각났다. 그 후 풀려나면서 나를 용서하시고 나와 함께하는 주의 영이 떠나지 않기를 빌었다. 하나님은 나를 떠나지 않겠다고 즉각적인 응답을 주셨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가 그리웠다. 생각 끝에 어머니와 찍은 사진을 가지러 또 중국행을 택했다. 함흥, 김책, 회령까지 가는 도중 여러 번 잡혔다가 도망쳤다. 2005년 4월 두만강을 건넜다.
전도사님 댁으로 가려고 했을 때 중국 경찰을 만났다. 익숙한 중국어로 대답하고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전도사님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탈북을 고백하고 스스로 감옥에 수감되었다.
하나님은 그 분의 뜻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라는 마음을 주셨다. 회령으로 북송되어 다시 북한 감옥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중국에서 3년간 함께 생활했던 바울 형이 있었다. 형은 죽음이 예고된 정치범수용소 행이었다.
‘하나님, 왜 우리에게 감당치 못할 고난을 주십니까? 형을 살려주십시오.’ 주일 아침, 생명을 걸고 예배를 드렸다. 기쁨의 샘물이 솟아났다. 하나님은 핍박 받는 자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라고 하시며, 나의 예배를 받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수용소의 문이 열릴 때 그들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바울 형은 “네가 살아 나간다면 여기 일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라.”고 말했다.
며칠 후 청진 집결소로 옮겨졌다. 도망칠 기회를 달라고 수없이 기도했다. 이송되던 기차가 정전으로 멈춘 때를 틈타 중국 감옥에서 배운 기술로 수갑을 풀고 도망쳤다.
도망칠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다
그 분의 계획 안에서 인도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쉘터는 경찰들 손에 넘어가고 아무도 없었다. 보호자 같던 선교사님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경찰들의 눈을 피해 찜질방 등을 돌며 살았다.
두통과 고문의 악몽, 두려움이 떠나지 않았다. 금식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의 영이 강력하게 붙들어 주셨다.
“나의 안에 거하라. 나는 너를 지명하여 불렀고,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긴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공포와 질병으로 어려웠지만, 하나님은 함께 하셨다. 2006년 10월 15일, 함께 생활했던 선교사님을 만나 아이들과 다시 예배를 드렸다. 요한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시 자유를 찾아 길을 떠나기로 했다. 2007년 6월, 중보기도를 받으며 미국으로 가는 긴 여행길에 올랐다. 쿤밍까지 하나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검열을 피하게 하셨다. 브로커를 따라 캄캄한 밤길을 정신없이 뛰어 라오스와 중국의 국경에 도착했다.
16개의 검열초소를 통과할 때마다 기도하며 메콩강을 건넜다. 다시 북송되지 않는 안전지대 태국이었다. 한국대사관에 들어가면 태국감옥에 2개월 정도 수감 후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행은 기약이 없었다. 어느덧 태국에서 21살 생일을 맞았다. 귀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아까워 한국으로 방향을 돌렸다. 2007년 12월 5일 한국대사관에 들어가 태국 이민국 감옥에 수감되었다. 감옥 안에는 100명 정도가 있었다.
절반이라도 하나님을 믿고 한국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복음을 전했다. 수없이 논쟁하며 고집했던 사람이 예배에 나올 때는 너무나 기뻤다. 2008년 2월 22일. 드디어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마침내 자유의 땅, 기회의 땅, 생명의 땅에 도착한 것이다. [GNPNEWS]
강디모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