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70주년 특별기획]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4)
이 상사는 연대 직속 의무중대로 3중대장의 지휘권 밖에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시간이 많은 편이었다. 밤이 늦도록 옥례 양 식구들을 미량 고개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와서 급히 나를 밖으로 불러낸 이 상사는 싱글벙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조 하사, 이 양이 자네에게 주고 간 편지야.” 그러면서 메모지 같은 편지를 건네주었다.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있었다.
“조 하사님, 아무쪼록 건강하시고 부디 성공하세요. 사랑합니다.”
나는 뜻밖에 받은 편지에 너무 감격했다. 이 도령이 과거에 급제하고 춘향이를 그리며 이토록 눈물을 흘렸을까 싶을 정도로 내 마음이 울컥했다. 기약 없이 떠나버린 이 양과 부모님들이 부디 평안한 피난길이 되기를 두 손 모아 하나님께 기도했다. 인명은 재천이라 했지만 이 양 가족의 안전을 위해 기도했다.
“나는 악착같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지켜주옵소서.”
이 상사는 말을 이었다. 옥례 양 식구와 이 양의 식구들에게 절대 헤어지지 말고 항상 간선도로로 피난하고 피난 중 숙소를 이용할 때도 큰 도로변에서 머물지 말라고 했단다. 또한 의무중대는 큰길 옆에 5202부대 의무중대 깃발을 높이 게양하고 있으니 피난 중 발견하면 꼭 자기를 찾으라고 당부했다며 입이 마르도록 이야기를 전했다.
그 다음 날 의무중대는 우리 부대보다 4시간 빠르게 군용차편으로 남쪽으로 후송했다. 우리 부대는 오후에 전방 주력부대와 합류해 후퇴했다. 도보행군으로 적의 긴박한 추격을 받지 않고 강릉을 경유해 삼척까지 여유 있게 후퇴했다. 전쟁에 익숙하여 옛날과 같이 긴박하게 움직이지도 않았고 기실 작전상 후퇴였다. 1연대 의무중대는 그때 호산까지 후퇴했다.
나중에 확인했지만, 옥례 양의 식구와 이 양의 식구들은 우리의 기대와 달리 피난 길에 헤어졌다고 했다. 사연인즉 옥례 양 아버지가 우마차를 이용해 피난을 했는데 우마차가 사람과 같이 갈 수 없어 부득이 이 양네 가족과 강릉에서 헤어져야 했다는 것이다. 이 양은 부모님을 모시고 호산으로 내려가다가 간선도로 옆에서 5202부대 의무중대 깃발을 드디어 발견했다.
깃발이 있는 곳으로 찾아간 이 양은 그곳에서 기적적으로 이 상사를 만날 수 있었다. 이 상사는 호산 부락의 민가를 이 양 가족에게 마련해 주었다. 그날부터 며칠 동안 이 상사가 먹거리를 준비해 찾아 갔다고 한다. 이 양은 이 상사의 애인 가족과 함께 오지 못해 미안해 했다.
“오빠, 옥례 언니와 함께 못 와서 미안해요.”라고 이 양이 말했다. 이 상사는 옥례 양에 대해서는 이미 포기했으니 잊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훗날 알게 된 일이지만 옥례 양은 피난 도중 강릉에서 모 특무부대 간부에게 연행된 후, 자의반 타의반 그와 정을 통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아마도 이 상사가 이미 알고 있었나보다. 휴전 이후 알게 된 것은 옥례는 실제로 그와 결합하여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동거생활을 하게 됐단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어느 날 우리가 중곡동에 살고 있을 때 옥례 양의 소식을 듣고 우리 집에 초대하여 밤을 지새우며 그 이후 옥례 양의 인생스토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옥례 양은 피난 도중 강릉에서 실제로 특무부대 간부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자연스럽게 정을 갖게 됐다고 했다. 휴전 후 서울에서 결혼하지 않고 아들을 낳고 별 고생 없이 살았는데 갑자기 본처가 나타나 아들과 함께 쫓겨나 당시 청량리에서 빌딩 청소 일을 하며 고생스럽게 산다고 얘기했다. 그는 우리가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는 것을 매우 부러워했다.
1951년 2월초 호산에 있던 이 상사가 삼척에 있는 우리 중대 정 상사를 급히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이 상사가 조만간 의무교육을 받기 위해 후방으로 떠나게 됐다며 이 양의 가족을 잘 돌봐 달라는 부탁이었다. 정 상사는 즉시 이 상사의 전화 내용을 중대장에게 전했다. 중대장은 바로 정 상사에게 지시했다. 당시 일등중사였던 김 중사와 함께 가서 이 양에게 군복을 입혀 중대본부로 데려오라는 지시였다. 정 상사는 삼척에서 30km 떨어진 호산으로 가서 이 양 부모님의 양해를 구하고 이 양을 군복으로 갈아입혀 군속으로 위장해 그날 밤 삼척 중대본부로 무사히 데려왔다.
중대장님은 이 양에게 조 중사는 내 동생처럼, 아들처럼 아끼는 유망한 청년이니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오면 부디 결혼하여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기 바란다고 격려하며 부모님을 모시고 피난길에 쓰라며 금일봉을 마련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훗날 전해 들었다.
그때 나는 업무 연락 차 정라진에 다녀오다가 정 상사 일행이 부대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갔다. 중대장실에 들어가니 모두들 이 양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중대장은 이 양에게 내가 중사로 진급됐다는 얘기와 함께 중대장 숙소에서 하룻밤을 지내면 다음날 호산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이 양은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당시 중대장 숙소는 양양 월리에 있던 상춘 양의 집이었는데 상춘 양은 이 양의 여고 1년 후배였다. 그래서 편한 마음으로 그 숙소에서 하루를 지낸 것 같았다.
그날 밤은 유난히 달이 밝았다. 이 양과 나는 밤이 새도록 얘기하며 장래를 약속했다. 새벽에 상춘 양의 어머니의 배려로 따로 마련해준 방에서 오붓한 시간도 보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날 밤 금단의 선은 넘어가지 않았다. 이튿날 정 상사는 일찍 이 양을 지프에 태우고 호산으로 떠났다. 내가 그동안 모아 두었던 돈과 정 상사의 비자금도 이 양 손에 전해줬다.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지프차는 금방 시야에서 멀어졌다. 부디 안전한 피난길이 되기를 하나님께 빌었다. [복음기도신문]
조용학 | 1934~2013. 충남 단양 생(生). 학도병으로 6.25전쟁 참전. 삼미그룹 총무과장 정년퇴직. 서울 노원구 국가유공자수훈회 사무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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