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기 목사는 ‘교회와 선교는 하나’라는 주장을 이론만이 아닌, 선교적 교회 개척 실행의 순종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그동안 그같은 생각과 순종의 여정을 저서 <끝까지 가라> 등 10권의 책에 담아냈다. 이 칼럼은 그의 저서 발췌와 집필을 통해 선교적 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소개한다. <편집자>
경험 너머의 지혜
우리는 자주 우물 안 개구리처럼 생각한다. 자신의 경험이 세계의 전부라고 여긴다. 그러나 하늘은 한 뼘이 아니다. 진실은 우물 너머에 있다. 인생은 길어야 100년쯤이다. 그 안에서 50년이라도 내다보며 살면 굉장한 사람이 될 것이다. 하물며 영원을 내다보며 산다면 어떻겠는가?
멀리 내다보는 사람들 중 하나는 농부다. 그들은 당장 눈앞의 서리나 긴 밤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늘 추수를 바라본다. 그들은 때와 절기에 맞춰 끝까지 땀 흘린다.
교회를 하는 사람, 즉 제자화를 진행하는 이는 영적 농부와 같다(고전 3:6). 기도로 사람들의 마음 밭을 일구며, 말씀 씨앗을 뿌리고, 심방으로 물을 준다. 하나님 은혜의 햇볕이 쪼이기를 바라며 추수의 날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아이를 가진 어머니도 농부의 지혜로 행한다. 몸과 마음을 스스로 지키며 해산의 날까지 모든 수고를 완수한다. 생명의 잉태자라면 그래야 한다. 영적 아비와 어미들도 마찬가지다. 한 사
람을 마음에 품고, 또 다른 제자를 낳는 제자가 탄생될 때까지 수고한다.
복음의 4세대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이다”(E.M.바운즈 E.M.Bounds). 한 사람, 아담이 모든 것을 타락시켰고, 한 사람, 그리스도의 부활이 만물을 회복했다(고전 15:22, 엡 1:22).
오늘날의 어떤 거대기업, 문명, 혹은 문화조류라도 반드시 그것을 시작한 한 사람이 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는 과정이 지속되면서 작은 것이 점차 거대해진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일은 제자에게서 제자에게로 2천 년 넘게 진행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주님께서 그 과정을 진행하셨다. 예수님이 제자들 사이의 연결고리셨다. 예수님의 사람들이 그분의 능력과 방법으로 또 다른 사람들에게 교회를 실행해왔다.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부탁하신 복음을 디모데에게 부탁했다. 디모데는 바울로부터 부탁받은 것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그들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쳤다(딤후 2:2). 각 관계의 중심에는 늘 예수님이 계셨고, 사람으로부터 사람에게로 제자화가 이어지는 동안 교회는 세상을 덮었다.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교회가 되는 제자화는 4세대 원리를 보여준다. 바울은 1세대, 디모데는 2세대, “충성된 사람들”은 3세대,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4세대이다(딤후 2:2). 이 원리가 기독교 역사를 관통해왔다.
닐 콜은 제자화를 “배가하는 사역”이라고 불렀다(《교회 3.0》, 스텝스톤, 2010, 125-129쪽). 배가하는 사역을 앨런 허쉬 박사는 앞의 그림과 같이 설명했다(《The Forgotten Ways》, Baker, 2007). 복음 전하는 자가 매일 한 사람씩 전도하면 1년에 365명이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 반면 제자화 사역을 하는 사람이 매년 두 사람을 키우면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 훨씬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 한편, 제자를 낳는 제자를 키우며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제자화한다면 장기적으로는 가장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 닐 콜은 이것을 “교회 배가 운동”이라고 했다(《교회 3.0》, 스텝스톤, 2010, 135쪽).
집중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것을 버려야 한다. 바울은 제자화에 집중하느라 이상 행동을 많이 보였다. 예수님을 만난 뒤에 수년 동안 유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그 뒤에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고작 2주간 머물렀다. 이는 유대인 리더십을 무시하는 행동이었다(게리 윌스 Garry Wills, 《What Paul Meant》, Penguin, 2006, 5-34쪽). 심지어 다른 사도들과도 반목하는 듯했다. 그는 14년 동안이나 예루살렘을 떠나있었고(갈 2:1), 이 때문에 교회의 리더들은 바울의 얼굴조차 거의 몰랐던 듯하다(갈 1:22). 그뿐 아니다. 심지어 바울은 다른 사도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특히 갈라디아서 2장에서는 바울이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까지도 비판하는 장면이 나온다(갈 2:11-13). 이런 그의 이상 행적은 신약 도처에 등장한다. 선교여행 중에는 교회의 핵심 지도자와 싸우고 갈라섰다(행 15:36-41). 유럽에 가서는 한 여자 성도를 집중 제자 양육했다(행 16:14,15). 심지어 유대인들이 우러러보는 이력들을 저질 취급하며 ‘똥배설물’이라고 막말을 했다(빌 3:8).
하지만 바울은 언제 어디서나 제자를 삼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에 집중했다. 수만 명을 모아놓고 전도집회를 연 것도 아니었고, 그를 통해 하루에 수천 명씩 회심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제자 삼는 제자를 만들고 키우는 일에 집중하며 늘 몇 사람과 수년씩 동행했다. 끝까지 그랬다.
교회의 슈퍼밈
세상에는 대다수가 일반적으로 믿는 거짓 상식이나 주장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식후 한 시간이 지나야 수영을 할 수 있다든지, 한 리더를 바꾸면 조직 전체가 획기적으로 달라질 것이라든지, 지방을 뺀 우유는 마셔도 살이 안 찐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한마디로 일반화된 거짓 생각, 느낌 혹은 문화이다.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생각이지만 과학적 상관관계는 없다. 레베카 코스타(Rebecca Costa) 박사는 잘못된 상관관계를 쉽게 믿는 것을 ‘슈퍼밈(Super meme)’이라고 지칭했다(《The Watchman’s Rattle(지금, 경계선에서)》, VP, 2010, 44-59쪽). 교회에도 슈퍼밈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는 교실 기반의 어떤 프로그램을 통해 제자들을 대량 생산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전도팀이 영접자들을 새가족부에 넘겼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은 몇 주간 새가족 교육을 받은 후에 성장반에 들어간다. 또 몇 주가 지나면 제자반에, 그 후에는 사역자반으로 간다. 시간이 지나면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진급하듯, 새신자들도 교회의 제자화 프로그램을 거치면 성장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교회는 제자들이 많아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신자들은 여러 장의 수료증을 받았으면서도 4세대 제자화는 거의 하지 못한다. 이런 제자반 시스템을 갖게 된 데는 두 토대가 있다.
첫째는 공장형 사고방식이다. 1차 산업혁명 이후, 우리는 지난 수백 년간 공장장처럼 생각해왔다. 최소의 투입으로 최다의 획일적인 결과물들을 최단 시간에 만들어내는 것이다.
공장형 시스템은 개인에게나 집단에게나 삶의 철학이자 성장의 기본 원리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 토대 위에 획일적인 공장형 교육 시스템에 사람들을 집어넣고, 컨베이어 벨트(Conveyor belt)를 돌리듯 진급시키고 있다.
둘째는 윌로우크릭 모델이다. 1990년대의 한국교회는 대부분 미국 메가처치 현상을 추종해왔다. 그들의 교육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카피했다. 그 중 대표적인 모델 교회가 미국의 새들백교회와 윌로우크릭교회였다. 그들은 메가처치 현상의 중심에 있었다. 이것은 주일예배에 2천 명 이상 모이는 것을 교회 성공의 척도로 여기는 이상 사회 현상이다(신광은, 《메가처치를 넘어서》, 포이에마, 2016, 15-41쪽).
공장형 모델이나 메가처치 현상은 제자화를 지지하지 않는다. 제자화는 복음의 4세대를 탄생시키기 위해 한 사람이(1세대), 또 다른 한 사람(2세대)을 붙들고 오랜 시간 삶으로 동행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수백 명 이상을 전도하며 혹시 합당한 자를 하나라도 얻게 되면, 그에게 집중하는 수년을 보내야 한다. 예수님조차 3년이나 걸리셨다. 느려서 인내가 필요한 일이다.
“최소, 최단, 최다”를 추구하는 공장형 사고방식으로 보면 제자화는 비효율적인 일이다. 메가처치 현상의 추종자들은 ‘당장’, 2천 명이, 주일 대예배 시간에, 한자리에 모이는 것을 원한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을 본다. 사도행전에서 하루에 3천 명이 회심하는 장면만 보고(행 2:41), 그들이 곧 세상 각지로 흩어지는 것은 보지 못한다(행 8:1).
많은 사람을 모이게 하려면 도제교육은 효과가 떨어진다. 공장형 시스템이 효과적이다. 교실 기반의 제자화 교육은 메가처치 현상의 배경에 힘입어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깊이 들어와 있다.
제자화를 교실 기반 수업에 담겠다는 생각은 슈퍼밈이다. 물론 하나님은 메가처치 현상의 추종자들에게도 은혜를 주신다.
그러나 그분은 우상숭배자들에게도 일반은혜를 허락하셔서(행 14:16,17),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도록” 기다리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딤전 2:4). 흥미롭게도 윌로우크릭교회는 자신들이 제자화에 실패한 모델이라고 스스로 발표했다(<크리스천투데이>, 2007, October).
중세 교회론
돌아보면 초대교회는 선교를 따로 진행한 적이 없다. 제자들이 교회였고, 교회 존재 자체가 선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4세기 이후에 교회 건물을 교회와 동일시하면서 변질된 교회론이 빠르게 세계로 번졌다. 제자들이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염 되어갔던 선교는 건물 본부에서 파송하는 특별한 선교사로 대체되었다. 교회와 선교의 분리가 교회 건물에서 시작된 셈이다. ‘삶의 현장’이라는 본연의 선교지는 비공식적이고 비전문적인 것으로 전락했고, 제자들에 의한 일상의 복음 설교는 비신학적이고 비교회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중세적 교회론에는 5가지 요소가 있었다. 건물 중심(아름다운 성당), 특별한 날(주일), 전문 리더(국가 공인 성직자), 자기 유지 방법(십일조와 헌금), 그리고 특별한 의식(시스템 유지를 위한 동기 부여 의식)이 그것이다(볼프강 짐존 Wolfgang Simson, 《가정교회》, 국제제자훈련원, 2004, 76-79쪽). 문제는 이것들이 비성경적이며,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데 있다.
주일예배의 목적
메가처치 현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제자화의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나눈다. 그들은 개별 전도가 이뤄지더라도 제자화를 특별한 사람에게 의탁한다. 심지어 주일예배를 통해 전도나 제자화를 하려고 한다.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건물 안에 있는, 특별한 사람 앞에 앉혀놓으면 전도도 되고 제자화도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종종 불신자 친구를 교회에 앉혀놓고, 그와 제자화 관계가 없는 전문 설교자에게 복음을 듣도록 한다.
메가처치 현상의 추종자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주일 오전 11시에 2천 명 이상을 1시간가량 앉혀둔다. 결과보다 과정이, 과정보다 동기가 중요하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왜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누군가를 교회로 인도하는 이유가 머릿수 하나 더 채우려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된 행동이 아니다.
주일예배의 목적은 무엇인가? 언젠가 생일파티를 비유로 예배의 목적을 설명하는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에디 변(Eddie Byun)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하러 모인 사람들이 주인공은 제쳐두고 자기들끼리 파티 일정에만 정신이 팔려있다면 그것은 주객이 뒤바뀐 행동이 될 것이다”.
주일예배의 주 목적은 ‘예배’이다.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며, 방법은 예수님의 이름이다. 예배를 다른 의도로 진행하는 것은 주객이 뒤바뀐 행동이다. 더 많은 사람이 오게 하려는 목적으로 진행되는 예배는 하나님의 자리에 사람 수를 올려놓는 것이다.
우상숭배다.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을 “합당한 자”(마 10:11)들의 모임에 넣음으로써 숫자를 늘려보려는 의도는 예배와 맞지 않다. 많은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려는 동기는 예배와 상관없다.
옳다면 지속하라
“태산불양토양”(泰山不讓土壤), 즉 ‘태산은 흙 한 줌도 사양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사마천, 《사기 이사열전》). 이 말을 좀 바꾸면 “한 줌의 흙을 소중히 여길 때 태산을 이룰 수 있다”라고 하겠다. 한 명을 제자화하는 일은 메가처치 현상에 빠지는 것보다 훨씬 겸손한 일이다. 신학공부를 몇 년을 했든, 어떤 사역을 얼마나 오래 했든, 얼마나 많은 재화(財貨)를 투자했든, 그 모든 것을 한 사람에게 쏟아 붓는 것이 겸손이다.
제자 삼는 제자를 기르는 것은 그 가치와 효과만큼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일이다. 눈에 크게 띄지도 않고, 쉽지도 않다. 겸손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교회를 실행하는 자는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의 사람이어야 한다(빌 2:3).
제자화에 큰 가치를 두는 것은 정상의 범주에서 많이 벗어난다.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자주 미친 놈 취급을 당한다. 제자화는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한다. 믿음, 희생, 기도, 그리고 겸손을 요구한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도, 그분을 따랐던 선배들도 진짜 미친 사람들이었다. 복음의 4세대를 키우려면 슈퍼밈을 벗고 예수님을 입어야 한다(롬 13:14). 정상으로 보이는 넓은 길에서 나와 좁고 협착한 길로 들어가야 한다(마 7:14). 돈과 명예와 스펙 쌓기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슈퍼밈이 아니라 성경을 추종하는 사람들, 내일이 아니라 천국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노후가 아니라 영생을 목표로 달리는 사람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히 11:38).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끝까지 가라(도서출판 규장)>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송준기 | 총신신대원 졸. 웨이처치 담임 목사. ‘교회와 선교는 하나’라는 주장을 이론만이 아닌, 선교적 교회 개척 실행을 통해 순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저서 <끝까지 가라> 등 10권의 책에 그동안의 생각과 순종의 여정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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