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70주년 특별기획]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8)
6.25사변이 터지다
내 인생에 일대 전환기가 왔다. 6.25사변이 터진 것이다. 어디 그 사건이 내게만 끔찍한 일이었겠는가. 이 땅에 살았던 모든 백성들이 겪었을 끔찍한 일이었다. 그날 오후 급하게 걸려온 친구 ‘지선구’의 전화를 받고 전쟁이 발발한 것을 알았다.
이미 적군이 원주까지 점령했고 남하 중이라는 뉴스를 접하고 부모님께 달려가 피난 준비를 알리고 공장에 올라오니 사장님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장님은 내게 자기 집에서 사용하던 앉은 재봉틀의 몸체를 주면서 말했다.
“조 기사 이것을 맡아주게, 그리고 우리 식구들과 함께 피난하세.” 나는 재봉틀을 메고 집으로 돌아와 부모형제들을 데리고 사장님네 식구들과 합류하여 피난길에 오르며 고향산천을 떠났다.
권 사장 가족과 우리 가족은 오후에 단양을 출발해 그날 밤 늦게까지 가산리를 경유하여 월악산 기슭을 따라 조령(문경새재)에 도착했다. 풍문에 의하면 북한 인민군 선발대가 이미 단양까지 들어왔다고 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는 늙어 걸음이 더디니 밤을 새워 문경새재를 넘어갈 수 없다면서 너희들은 빨리 이곳을 피해 남쪽으로 가라고 재촉하셨다. 나는 등에 메고 가던 재봉틀을 권 사장의 아들이자 나보다 2년 선배인 ‘권오환’에게 인계했다. 그리고 10여 명의 학우들과 함께 재를 넘어 6월 27일 경북 문경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수많은 피난민 행렬을 헤치며 앞질러 나갔다. 가다가 배가 고프면 감자 밭에서 감자를 캐어 삶아 먹기도 하고 옥수수 밭을 만나면 옥수수를 서리해 먹었다. 그러다 밤이 되면 이미 피난 나간 빈집을 찾아 이슬을 피하며 쪽잠을 자기도하고 때로는 주인 없는 과수원에 며칠씩 머물면서 배고픔을 해결하고 점촌을 지나 7월 11일경 경북 함창에 도착해 일단 거기서 여장을 풀었다.
며칠 후, 다시 남쪽을 향해 가다가 7월 13일 경북 김천에 도착해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에 인민군이 바로 코 앞 함창까지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우리는 부랴부랴 행군을 강행하여 쉬지않고 하루 150리 길을 걷기도 했다. 아직은 패기 왕성한 젊은 때라 가능했던 일이다.
김천을 출발해 대구로 가는 피난길엔 생전 처음 보는 기상천외한 피난행렬이 이어졌다. 달구지에 하늘 높이 쌓아 올린 짐짝, 리어카에 짐을 잔뜩 싣고 그 위에 어린 아이를 아슬아슬하게 태운 모습, 자전거에 까마득하게 짐짝을 싣고 달리는 위험한 모습, 힘에 겨운 짐짝을 짊어지고 양손에 어린아이 손을 잡고 달리는 사람, 가끔 후퇴하는 군용차의 경적소리, 퇴로를 가득 메운 거대한 피난 행렬은 일찍이 본 적 없는 놀라운 모습이었다.
우리 일행은 물결같이 흐르는 피난 행렬을 헤치고 7월 14일 밤 대구에 도착했다. 이 같은 일정은 대부분 나의 제안대로 진행됐다. 대구 시내는 북쪽에서 내려온 피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아무리 대문을 두드려봐야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고 아무데도 잠 잘 곳이 없었다.
그러다 요행히 정원이 조금 들여다보이는 큼지막한 대문 앞에 이르렀다.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등나무가 보였다. 나는 무조건 대문을 두드렸다. 집주인 같아 보이는 분이 왜 그러냐며 소리쳤다. 나는 등나무 아래서 이슬을 피하고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간청했다.
“모두 몇 명이냐?”고 물었다. “저희는 모두 고등학생입니다. 모두 10명입니다.”라고 답했다. 집주인은 그제서야 대문을 열어줬다. 덕분에 우리는 이슬을 피하고 하룻밤 새우잠이라도 잘 수 있었다.
학도병으로 지원하다
새벽 먼동이 트기 전인데 누군가 구둣발로 툭툭 차는 느낌이 들어 깨어보니 경찰관 두 명이 무장을 하고 우리를 깨웠다. 총을 겨누면서 친구들을 전원 연행하는데 내게는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
나는 친구들과 떨어져 살 수 없다며 무작정 따라갔다. 경찰은 우리를 대구 칠성동 파출소로 데려갔다. 대구 시내에는 이미 적의 박격포탄이 떨어지고 있었다. 파출소장이 우리를 세워놓고 말했다.
“너희들은 명예롭게 학병으로 군에 입대해야 한다.” 그리고 한 사람씩 명단을 작성했다. 나는 파출소장에게 말했다.
“저도 입대하고 싶습니다.” 간청했다. 그러나 파출소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너는 키도 작고 너무 어려서 안 돼.” 나는 재차 간곡하게 요청했다.
“저는 나이가 친구들과 같이 18살이며 군인생활도 아무런 문제없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출소장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내게도 너 만한 아들이 있는데 한 번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잠시 후 파출소 앞에 일제 도요타 트럭이 도착했다. 나는 무조건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말했다.
“저도 군에 갈 수 있어요.” 친구들과 함께 손을 흔들었다. 파출소장은 “그래 모르겠다. 가서 신체검사라도 해봐라.”고 말하며 같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차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달성국민학교 교정으로 들어갔다. 기간병이 트럭에 다가와서 신체검사 절차도 없이 미군복과 워커 군화 한 켤레씩 주면서 빨리 갈아입으라고 했다.
군복은 허리가 내 가슴까지 올라오고 군화는 너무 커서 도저히 신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바지와 신발이 너무 크니 작은 치수로 교환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랬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가 작은 거지, 옷이 큰 게 아니야.” 한 대 쥐어박을 듯한 기세였다. 문득 예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군대는 이유가 없다’는 소리가 생각나서 기다란 미군 양말 두 켤레만 얻어가지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더운 여름이라 옷소매를 걷어 올린 군복차림에 묵직한 철모를 눌러쓴 내 모습을 보고 친구들이 킥킥거리며 웃는다. 그러나 내 친구들은 나의 왕년 축구 선수의 강인함을 알고 있을 터였다.
기간병은 우리를 일렬로 세우고 M1소총에 실탄 8발씩을 나눠 주면서 외쳤다. “어깨~총!” 그는 구령과 함께 우리를 사격 연습장으로 데리고 가더니 8발씩 후딱 사격을 끝내고 원위치로 돌아왔다. 잠시 후 운동장에 200여 명의 신병을 세우고 장교가 단상에 올라와 일장 연설을 했다.
“제군들은 지금부터 전선에 투입된다. 적군은 목전에 와 있다. 조국을 위해 용감한 싸움을 기대하며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빈다. 이상!” 그날 밤 우리는 20여 명씩 군용차를 타고 경주 불국사 전방에 위치한 ‘안강전선’으로 향했다.
어디선가 총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갑자기 야산에 숨어있던 인민군이 집중사격을 해온 것이다. 우리가 탄 군용차는 논두렁에 전복되고 병사들은 모두 얼굴에 진흙을 뒤집어써서 누가 누군지 식별할 수도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사상자가 발생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논두렁을 방패삼아 후방으로 빠져나와 미리 빠져나온 동료들과 합류해 소대별로 다시 모였다. 장교는 없고 무조건 계급이 높은 하사관이 소대장이 되어 다시 안강전선으로 진격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친구 중 한 명은 행방불명되고 다행히 나머지는 모두 무사했다.
우리는 안강에서 진격하여 기개 지역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후퇴하게 됐다. 그런데 불국사 부근에서 헌병들이 후퇴하는 병사를 총살시킨다는 소문을 듣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사과밭에 들어가 2, 3일 동안 숨어 사과를 따 먹으며 지내기도 했다.
드디어 전방부대원과 합류하여 소대를 재편성하게 됐다. 나는 안강전투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참상을 봤다. 후방에서 보국대 아저씨들이 우리가 있는 전방고지에 주먹밥을 메고 오면 병사들이 이것을 받아들고 소나무 밑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식사를 하곤 했는데 하필 그때 인민군이 발사한 곡사포 포탄이 바로 옆에 있는 전우에게 명중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소나무 가지에 사람 팔이 매달려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던 참상을 지금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재빨리 옆으로 굴러 떨어져 툭툭 털며 내 몸을 만져봤다. 다행히 내 몸은 멀쩡했다. 상처하나 없었는데 며칠 동안 귀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전투중이라 가볍게 여기며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제대 후 직장 생활을 할 때도 크게 지장은 없었다. 그러나 뒤늦게 60세를 지나면서 청각에 이상이 생겨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훗날 육군본부 의무감실에 전상카드여부를 조회했으나 기록카드가 없다는 공문을 받았을 뿐이다. [복음기도신문]
조용학 | 1934~2013. 충남 단양 생(生). 학도병으로 6.25전쟁 참전. 삼미그룹 총무과장 정년퇴직. 서울 노원구 국가유공자수훈회 사무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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