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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 하나님을 믿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지?”

115_7_2 연어의꿈
‘연어의 꿈’(4)

994년 김일성 사후 고난의 행군이 선포되고, 북한은 배급이 끊어졌다. 가정해체와 거리를 떠도는 꽃제비 청소년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렇게 가족을 잃은 한 북한 청소년이 탈북해서 하나님을 만나, 이제는 북한의 복음화를 꿈꾸고 있다. 그 내용을 담은 ‘연어의 꿈’(강디모데, 예영B&P刊, 2013)을 요약, 연재한다. <편집자>

청도에 있는 한 건물의 꼭대기 옥탑방. 창문도 없고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한국 선교사님께 성경과 영어를 배웠다.

부자와 나사로 말씀을 통해 북한 동포들을 보게 되었다. 굶어 죽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모르고 죽는 것이 더 불쌍했다.

북한을 위해 기도할 때면 하나님은 사랑의 마음을 주셨다. 그때 ‘북한에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잔잔한 기쁨과 감동이 흘렀다.

만류하시던 선교사님은 마침내 북한행을 허락하셨고, 친구 요한이와 3년 만에 고향땅에 가게 되었다. “강하고 담대하라…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 1:9)” 하나님은 말씀으로 격려하셨다.

두만강을 건너자마자 북한 군인에게 잡혔다. ‘하나님,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세요.’ 우리를 위해 중보하는 공동체 식구들이 보였다. 벌을 서다 맞고, 군인들 침대 밑에 기어들어가 자고, 개가 먹던 그릇에 주는 밥을 먹었다.

춥고 온 몸이 떨렸다. 기도했다. ‘하나님, 구름을 열어 한번이라도 빛을 보게 해 주세요’ 신기하게도 내가 서 있는 하늘만큼만 구름이 열리더니 해가 비추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다.

심문을 받은 후 날이 밝자 집결소가 있는 무산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도착하자마자 보안원이 우리의 문서를 없애더니 풀어주었다. “내 자식들 같아서 그냥 보내준다.” 하나님이 마음을 움직이신 것이 분명했다.

맨발에, 개머리판으로 맞아 피범벅이 된 머리로 시장에 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한 아주머니가 친척이라며 보호해 주었다.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간 정탐꾼처럼 아주머니의 집에 며칠간 머물렀다.

하나님을 전하자 아주머니는 밖으로 나갔다. 보안원을 데려올까봐 두려웠다. 한참 후 들어온 아주머니는 말했다. “나도 그 하나님을 믿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지? 나는 죄를 많이 지었어.” 문을 잠그고 함께 무릎을 꿇고 영접기도를 드렸다.

기도 전에는 근심에 눌려보였던 아주머니의 얼굴이 평안해졌다. 헤어질 때 아쉬움에 울었지만, 믿음 안에서 웃는 얼굴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다.

복음 전하기 위해 다시 북한으로

요한이 집에 갔을 때, 당원인 아버지는 기독교 공부를 했다는 말에 칼을 들고 와 보위부에 자수하자고 하셨다. 요한이와 헤어지면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홀로 마을이 한 눈에 보이는 산 위에서 기도하고 찬양했다. ‘성령이여 그들 눈을 열어 열방의 빛을 비추소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저들을 향한 긍휼이었다.

다시 중국으로 넘어오는 길은 험했다. 신분증, 여행증명서가 없는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수시로 기도했다. 청도에 오니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요한이가 와 있었다. 모든 것이 기적 같았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믿음을 강하게 하셨다. 2003년 3월 전 세계적으로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돌기 시작했다. 여러 곳에서 성경을 공부하던 우리는 쉘터라는 피신처로 집결했다. 한 집에 20명 정도가 숨어 지내며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보여야 했다.

어느 날 갇혀 사는 것이 답답했던지 쉘터에 살던 동생들이 나간 후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집을 나와 피신했다. 그 때 다시 못 올 줄 알았더라면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을 챙겼을 것이다.

그러다 3일 만에 경찰들에게 잡혀 중국 청도 감옥에 10명이 수감되었다. 선교사님은 한국으로 몸을 피했고, 조선족 전도사님과 집사님들은 공안에 붙잡혀 심문을 받았다.

3개월간 중국 감옥에 지내다 북송을 위해 청도에서 단동으로 이송되었다. 수갑과 족쇄가 채워졌다. 감시카메라가 있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전기곤봉으로 맞았다.

한 주일을 보내고 2003년 9월 11일 북한 신의주로 보내졌다. 그렇게 시작된 참혹한 북한 감옥 생활은 2005년 2월까지 이어졌다. [GNPNEWS]

강디모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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