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특별기획] 밤마다 들기름 솔 심지 불로 통신강의록을 봤다

사진: Pew Nguyen on unsplash

[정전협정 70주년 특별기획]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5)

중단된 학업을 다시 시작하다

1946년 3월경, 단양우체국 게시판에 ‘한영중고 통신강의’ 회원모집에 관한 내용이 게시됐다. 즉시 우체국 전보를 이용해 등록 신청을 했다.

일주일 후 등록회원들에게 강의록 전체 내용이 송달되었다. 경제적 사정이 어려워 면학의 꿈을 접어야 했던 나에게 다시 학업의 길이 열릴 것으로 기대하고 소정의 금액을 마련해 송금했더니 중학교 1학기분 강의록 전체가 송달 된 것이다.

해방 후, 1946년 중학교에 진학한 친구들은 첫 통학이 시작된 때였다. 국민학교 졸업생 60명중 농촌에 살던 친구들은 잘 모르지만 단양읍내 출신 중에 통학을 포기한 친구는 나를 비롯해 선○만, 최득○, 박재동, 김석만 5명 뿐이었다(흘려쓴 한문서체로 해독이 안되는 글자는 ○ 표기). 단양읍내 거주 동창은 당시 30여 명이었다. 친구들 중 ‘선○만’은 6.25사변 후 결혼해 부인 덕분에 돈을 많이 벌었다. 지금은 단양 사회에서 내로라하는 거부가 되어 단양에선 일등유지로 여생을 살아가고 있다. 공부 잘한다고 꼭 출세하는 법은 아닌 것 같다.

나는 틈만 나면 공부하려고 열심을 냈다. 밤마다 들기름에 솔 심지를 이용하여 등불을 밝히면서 날이 새는 줄 모르고 강의록에 빠져들곤 했다. 어떤 날은 공부에 몰두하다가 날이 새어 어머님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야 일을 나가기도 했다.

“얘야, 공부 그만하고 날이 밝았으니 아침 한술 먹고 삼봉에 고기잡이 가야되지 않겠느냐.”라며 일 나가기를 재촉하셨다.

나는 눈을 비비면서 어머님이 삼베보자기에 싸주신 주먹밥 하나를 받아들고 고기잡이를 나섰다. 당시 주먹밥은 쌀이 약간 섞인 보리밥에 소금과 들깨를 섞어 만든 밥이었다. 주경야독이다. 낮에는 돈을 벌어야 하고 밤을 새워 공부해야 하는 고단한 세월이었다. 아침 한 술도 못 뜨고 어장으로 나가는 날은 수도 없이 많았다. 체력에 한계를 느껴 나무팔이와 고기팔이를 대체할 뭔가를 생각해야 했다. 그렇게 계속 해봐야 승산이 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해 동생 용국(두꺼비)이와 함께 개구리참외 장사를 하기로 했다. 장날 읍내로 오는 아낙네들의 참외를 싸게 구입해서 소장거리 가축시장 사거리에 가마니를 깔고 본격적인 장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참외장사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동생 두꺼비가 들락거리면서 참외를 축내고 가끔 부모님들이 오시면 참외를 깎아 드려야 하고 게다가 상품가치가 없는 참외는 집으로 가져와 식구들과 나눠 먹게 되니 적자가 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아버님께 참외장사에 대해 한번은 이렇게 말씀드렸다.

“아버님, 밑지는 장사는 아니지만 남는 게 없습니다.”

그러자 아버님은 “얘야, 먹는 것이 남는 장사란다.” 하시면서 격려하셨다. 우리 아버지는 늘 그렇게 절박함이 없는 분이셨다. 2개월 동안 죽어라 참외장사를 했지만 거듭되는 본전치기 장사를 계속할 수 없어 걷어치웠다.

담배장사로 변신하다

그때 우리 집 건넌방에 신혼부부가 세 들어 살았는데 어느 날 우리 어머님을 찾아와 제안했다.

“봉가가 어린 나이에 나무를 하며 고기를 잡아 가장 노릇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저희 집에서 생산하는 담배를 떼다가 팔면 소득이 조금 나을텐데 한번 해보라고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게 제안했다는 것이다.

어머님으로부터 그 얘기를 전해 듣고 알아봤다. 담배 잎사귀를 썰어서 만든 일명 마타초 담배인데 물론 단속대상인 물품이었다. 그런데 완성된 담배갑에 ‘무궁화’ 담배와 같은 고무도장을 찍어 겉보기에는 정품 담배와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판매조건은 3:7로 나누자고 했다. 개당 100원에 팔면 30원의 이익이 나는 장사다. 판로는 중앙선 기차를 이용해야 승산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판매용 담배박스와 광목어깨 띠를 건네주면서 머리가 너무 기니 이발도 하고 옷도 단정하게 입으라고 권했다. 특히 주의할 것은 여객전무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고 귀띔을 했다.

이발하는 대목에서 큰 형님의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겠다. 해방 후 결혼한 형님은 가족을 데리고 분가했다. 형님은 이발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시내의 한 이발관에서 업주와 수익금 분할제 조건으로 일을 했다. 하루는 형님 이발소에 동생 두꺼비를 데리고 찾아갔다. 형님은 우리를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

“왜 두 놈이 함께 왔느냐 바쁘니까 내일와라.”고 하며 벼락 치듯 말하는 것이다. 다음날 나 혼자 가서 이발을 했다. 형님이 얼마나 거칠게 이발을 해주는지 머리카락이 뽑히는 것처럼 아프고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 시절 이발 기구는 두 손으로 잡고 좌우로 흔들며 깎는 거였다. 형님은 “왜 아프냐?”면서 수건으로 툭툭 털어내더니 “머리는 집에 가서 감아라.” 하며 나를 밖으로 내쳤다.

나는 속으로 ‘다른 아이들은 뒷머리 잔털도 면도질을 해주는데…’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불편한 심기로 이발소를 나왔다. 뚜벅뚜벅 집으로 걸어오는데 푸념이 절로 나왔다. 내가 형들을 대신하여 비록 험한 밥이지만 부모님과 동생들을 부양하고 있는데, 겨우 동생 이발 한 번 해주면서 이렇게 야박할 수 있을까. ‘처삼촌 산소 벌초하듯 한다’는 말이 생각났다. 아무런 관계없는 처삼촌 산소 벌초를 해도 이것 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에 야속한 마음이 못내 가시지 않았다. 어린마음에 배신감마저 들어 또 한 번 이를 악물었다. 담배장사를 성공하기 위해 떳떳하게 요금을 지불하고 어엿한 손님으로 다른 이발소에 가서 깨끗하게 이발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를 악문 각오였다.

1947년 5월경 본격적인 담배장사가 시작됐다. 단속 대상이지만 강행하기로 결심하고 매일 밤 8시 안동발 서울행 열차가 단양 역에 정차할 때면 소화물 적치장에 잠입하여 요령껏 무임승차를 감행하였다. 판매활동 구간은 북으로는 충북 제천역까지, 남으로는 경북 영천역까지였다. 담배상자를 어깨에 메고 조심스럽게 ‘담배요, 담배요’ 소리치며 여객실 중앙복도를 지날 때면 여기저기에서 담배를 달라고 손을 내민다.

“얼마냐?” 손을 내밀면서 값을 묻는다. “예, 10원입니다.” 그 가격은 시중의 정품보다 훨씬 싼 값이었다. 예상외로 판매가 수월했고 가져갔던 담배도 남김없이 전량을 다 팔았다. 무조건 10원으로 판매하는 것은 거스름돈이 없어야 신속하게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계속 허리를 굽신거리며 담배를 팔다가 어느새 기차가 충북 제천역에 도착하면 요령껏 하차하여 재빨리 하행선 열차를 갈아타야 했다.

그 당시 역에 있는 기관차 점검원들은 나에게는 불법승차 검사를 심하게 하지 않았다. 어린아이인 나를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것 같았다. 하행선을 타고 경북 영주에 도착되면 담배는 거의 팔렸다. 담배장사가 고기잡이와 나무장수 못지않게 수입이 짭짤했다. 어떤 때는 여객전무가 나타나면 재빨리 아버지나 어머니 같은 손님에게 ‘저 좀 숨겨주세요’하면서 기어들면 대부분 따뜻하게 숨겨주시곤 했다. 그렇게 위기를 모면하면서 담배장사는 지속됐다.

어린 내가 담배장사를 하면서 제법 여윳돈이 생겨 강의록 구독료뿐 아니라 가끔 아버지 담뱃값도 보충해 드렸다. 장날이면 어머님을 모시고 맛있는 반찬거리도 사드리는 여유도 생겨 마음이 흐뭇했다. 담배장사는 그해 연말까지 계속됐다. 똑같은 철길을 반복하던 어느 날, 단양역을 통과할 무렵 당시 기차 내에서 각종 물품을 판매하는 ‘홍익회’ 소속 판매원의 밀고로 여객 전무에게 붙들려갔다. 영천 역무실로 연행돼 얼마 되지 않은 판매대금과 팔다 남은 담배 전량을 몰수당하고 몇 차례 빰도 맞았다. 홍익회 가판원으로부터 여러 번 나를 단속하라고 독촉을 받았다는 얘기도 했다.

“집이 어디냐.” 여객전무가 물었다.

“네, 단양입니다.”라고 했더니 차표 한 장을 주면서 단양으로 쫓아냈다. 늦은 밤 세찬 강바람을 맞으면서 터벅터벅 솟재를 넘어가노라니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새벽길 찬 서리가 뼈끝에 스미는데 굽이굽이 내 고생길은 언제나 끝이 날까. 서러운 마음에 부모님께 모든 사실을 말씀드렸다. 법 없이 사신다는 아버님은 불법으로 목숨을 영위하는 것은 처음부터 아버지 뜻이 아니라고 언제나처럼 고상한 말씀만 하시면서 ‘당장 집어치우라’고 하셨다. 옆에서 듣고 있던 오너(사랑방 업주)는 누구나 한번쯤은 당하는 일이라며 굳게 마음먹고 계속할 것을 요구했으나 나는 마음을 접었다.

고단한 세월이었지만 나의 주경야독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몇 개월 동안 헤어져 지낸 현필 선배와 나무장사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담배장사를 하기 전에 처마 밑에 모아 두었던 땔나무는 거의 소비하고 어머님이 야산에서 땔나무를 조달해 쓰고 계셨다. 사연인즉 아버님께서 남의 집 지붕 ‘기와 일’을 하시다가 낙상을 하여 허리를 다쳐서 지게 일을 못하셨다는 것이다.

하루는 내가 선배에게 중학통신 강의록으로 함께 공부하자고 권했더니 “그까짓 공부를 해서 뭐 하냐, 돈을 벌어야지.” 하면서 내게 면박을 주었다. 근본적으로 그의 사고방식은 나와 차이가 있었다. [복음기도신문]

조용학 | 1934~2013. 충남 단양 생(生). 학도병으로 6.25전쟁 참전. 삼미그룹 총무과장 정년퇴직. 서울 노원구 국가유공자수훈회 사무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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