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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혁명 주장하는 미국 언론… WP, 낙태 금지 때문에 10대가 부모됐다고 보도

사진: Ioann-Mark Kuznietsov on unsplash

최근 워싱턴포스트(WP)가 낙태 금지법 때문에 쌍둥이 자녀를 낳게 된 한 10대 부부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낙태 금지가 이들을 십대 부모로 만들었다”는 제목의 기사를 게제했다. 이에 대해 가족연구위원회의 미디어 코디네이터인 조슈아 아놀드가 이는 낙태를 옹호하려는 WP의 모순적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크리스천포스트에 소개된 그의 기고문을 번역 소개한다.

헤드라인으로 보도했다. 5000단어가 넘는 이 기사는 낙태 찬성을 옹호하려고 시도했지만 낙태의 비인간성 측면 외에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이 기사는 한 살짜리 쌍둥이 딸을 둔 19세 부부인 빌리(Billy)와 브룩 하이(Brooke High)의 이야기를 다룬다. 빌리와 브룩은 결혼 계획도 없는 상태에서 2021년 봄, 브룩이 임신을 하게 됐다. 그들은 아기를 낙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빌리와 브룩은 임신초기라 할지라도 태아를 낙태로부터 보호하는 법이 막 통과된 텍사스에 살고 있었고, 낙태를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은 차로 13시간이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 때문에 워싱턴포스트의 헤드라인은 이들을 십대 부모로 만든 것은 그들의 행동이 아니라 법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이들의 결혼 생활은 흔들렸고, 빌리와 브룩은 결혼 상담에 참석한다. WP는 이들은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며, 각자의 결점 때문에 관계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빌리는 비디오 게임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고, 휴대폰 중독에 빠져 있으며, 다른 여성을 쳐다본다. 브룩은 남편이 집안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자주 소리를 지르고 잔소리를 한다. 부부는 이혼에 대해 생각해 봤지만 자기 자녀들이 자기들과 함께 지내기를 원했다.

이에 WP는 “아기가 없었다면 브룩과 빌리는 함께 살지 않았을 것”이라며 “두 자녀와 함께 그들은 영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결혼 관계를 위해 예비하신 행위, 즉 ‘한 몸’으로서 결혼의 관계적 친밀감을 누리는 행위들을 탐닉했음에도, 두 자녀를 둔 이들은 이제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쌍둥이가 태어나면서 이들 부부의 인생 계획이 틀어졌다. 브룩은 부동산 학교에 입학할 예정이었지만 전업주부가 됐다. 빌리는 부리토 레스토랑에서 최저임금을 받으며 더 나은 월급을 받는 월마트에 취직하는 것 이상의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의 꿈은 매일 스케이트를 타는 것(실제 브룩을 스케이트 공원에서 만났다)과 밤에는 파티를 여는 것이었다. 그러나 빌리는 아내와 아이들을 부양하기 위해 연봉 6만 달러의 공군 정비공으로 취직했다. 이에 WP는 “빌리는 그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내와 쌍둥이를 부양할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아내와 쌍둥이를 부양하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빌리가 옳은 일을 한 것이다. WP에 따르면, 빌리의 부모님, 그가 존경하는 선생님 등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했다. 이에 빌리는 지난 여름 법원에서 브룩과 결혼하고 향후 6년 동안 군복을 입을 수 있는 공군 정비공 계약서에 사인했다. 그는 쾌락을 추구하는 독신 생활을 희생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졌다. 즉, 그는 조금 성장했다.

낙태 자유보다 금욕 교육이 강조돼야

이 기사에서 언급된 유일한 부정적인 경험은 빌리와 브룩이 경험한 고립감뿐이었다. 많은 커플이 출산을 서른 살 가까이까지 미루는 시대에 쌍둥이를 둔 19세 부부가 겪는 단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집에서 100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군 생활을 하는 것이 단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기사를 읽으면서 이 부부의 고립감에 대한 진정한 해독제는 강력한 교회 공동체와 그에 수반되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다면 왜 WP는 이들의 이야기가 낙태에 대한 설득력 있는 사례를 제시한다고 믿었을까? 물론 빌리와 브룩에게는 문제와 어려움이 있다. 쌍둥이를 둔 19세 부부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문제는 수백만 명의 다른 부부들이 직면한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이야기에서 한 번의 낙태만큼 충격적이고 끔찍한 이야기는 없다.

WP는 심지어 브룩이 “내가 낙태를 했었더라면…”이라고 가정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그녀는 낙태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다.”며 “아이들은 우리 자녀”라고 말한다.

빌리와 브룩의 이야기에서 이전 세대의 메아리를 들을 수도 있다. 결혼한 지 30년 이상 된 부부와 이야기를 나눠보면 극복해야 했던 어려움, 해결해야 했던 갈등, 희생이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다수는 그러한 희생을 하길 잘했다고 말할 것이다.

빌리와 브룩은 부모가 되기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했고, 그것은 나쁜 일이라는 구도가 WP의 기사에 전반에 깔려 있다. 하지만 이는 디즈니 영화처럼 현실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곰돌이 푸’나 ‘하쿠나 마타타’와 같은 영화가 아니다. 성서학자 칼 트루먼은 그의 저서 ‘현대 자아의 부상과 승리’에서 이러한 자기 중심적 세계관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오염시켰는지 보여준다. 인생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의심스러운 자기 정의가 아니라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진정으로 형성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지상 사명을 정의한 것이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3~45)

그리스도인, 특히 남편(엡 5:25~28)은 섬기는 태도(빌 2:5~8)로 부름받았다.

WP의 설명에서 간과된 것은 쌍둥이의 삶이다. 사실, 이 아름답고 재미있고 지적인 두 어린 소녀가 부모의 기쁨이다.

낙태 합법화 옹호에 대한 WP의 논리적 결론은 두 젊은이의 직업적 야망과 근심 걱정 없는 즐거움이 이 두 소중한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꿈을 쫓는다는 것’이 자궁에서 자신의 자녀를 억지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변명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미성숙과 성적 난잡함에 대한 경고의 이야기다. 금욕 교육의 메시지는 아이를 임신하는 것은 성관계의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미성숙하고 미혼일 때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면 미성숙하고 미혼일 때 성관계 하지 말아야 한다. 지난 50년 동안 많은 정치인과 교육자들은 낙태를 ‘안전망’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러한 메시지의 우선순위를 낮췄다. 이제 각 주에서 이 끔찍한 관행을 폐지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으므로 금욕 교육이 더욱 절실하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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