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개월간의 복음사관학교 시간을 되돌아 본다. 오직 주님의 은혜였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아웃리치를 준비하며 나의 마음에 적지 않은 부담과 갈등이 있었다.
‘이 지체들과 연합할 수 있을까?’ 내 마음 한 켠은 ‘안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게다가 아웃리치를 준비하며 나의 연약함이 드러나게 되면서 나는 팀 내에서 걱정거리와 기도제목이 되었다. 수치스럽기도 하면서 억울하고 분했다. 나를 변명하고 싶은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났지만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당신께 맡기기를 원하셨다.
아웃리치로 가게 된 S국에서는 현지인 성도를 대상으로 한 복음캠프가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헌신의 삶에 대한 강의를 맡았다. 강의안을 준비하며 한계에 부딪히기도 했다. 하지만 머리를 쥐어짜듯 준비한 강의안은 의외로 좋은 평가를 받았고 별 무리 없이 아웃리치를 시작하는 듯 했다.
그러나 현지에 도착하여 계획된 일정이 지나고 있음에도 나의 머릿속에는 강의생각 뿐이었다. 우선 내용이 부족하다고 여겨졌다. 또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복음의 진리를 선포해야 된다는 사실이 마음을 어렵게 했다.
복음캠프 전날, 팀원들과 함께 강의내용을 정리하며 많은 부분을 새롭게 수정하게 되었다. 더욱 자신이 없고 부족한 것만 같았다. 강의를 할 수 있을까? 마음 한 켠에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맞닥뜨려야 하는지 너무나 분명하게 나타나는 듯 했다.
이때야 말로 믿음의 원리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믿음의 걸음을 이끌어가셨다.
큰 부담감으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하나님은 나를 포함한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현지인 한 영혼, 한 영혼을 만나주고 계심을 보았다. 선포되는 진리 앞에서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다.
그리고 복음을 외칠 때 마다 주님은 나에게도 동일하게 질문하셨다. “현지인에게 외친 복음이 너에게는?” 나 역시 그 복음 앞에 다시 서게 되었다.
어렵게 여겨지던 지체와 연합하는 일에 대해 주님이 깨달음을 주셨다. 아담은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됐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됐다는 것이며, 이는 또 누구와도 교제가 가능하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았다. 지체들과 온전한 교제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교제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삶과는 거리가 너무 먼 내가 복음사관학교를 수료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엄하고 경이로운 십자가 복음이 선포되는 거룩한 현장 한복판에서도 지체의 모습 때문에 복음을 누리지 못하는 나의 실존을 보게 됐다. 그리고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회개의 기도가 터져 나왔다.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존재적인 죄인이며 조건과 상황만 갖춰지면 히틀러나 가롯유다 같은 악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오직 주님만이 신뢰의 대상이지 사람은 기대할 대상도, 상처받을 대상도 아닌, 사랑하고 용서하며 섬겨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이 정말로 믿어졌다. 주님의 평안이 임했다.
더 이상 지체들의 모습이 문제로 보이지 않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존재로 보였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끝까지 그 말씀을 붙들 때 하나님이 친히 일하시는 영광을 보았다.
그렇게도 부담스럽던 강의와 지체와의 교제도 주님이 이끄시는 은혜의 시간이었다. 성경 말씀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걸음으로 나를 드리고, 말씀을 이루실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믿음의 결단으로 나를 이끄셨다. 잃어버린 나의 원형,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나를 찾았다. 내 평생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뿐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마라나타. 주하! [GNPNEWS]
장기순(인천 선린감리교회)
고희를 앞둔 늦은 나이에 총체적 복음을 만난 후, 갈급한 마음으로 복음사관학교를 지원했다. 언제든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기 위하여 현재 가정에서 믿음의 증인으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