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여가는 그의 가치체계와 마음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소재다. 현대인 대부분이 맡겨진 여러 종류의 일과 삶의 무게에서 오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저마다의 “가상현실” 또는 “기분전환 장치”를 찾는다. 그리고 음악, 소설, 영화, 드라마, 게임 같은 갖가지 예술 장르들이 현실도피의 세계로 그들을 유혹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면서 여가를 보내야 할까? 쉬어야 할까? 어색한 질문이다. 여가의 내용에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구분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이 여가와 ‘쉼’을 민감하게 생각해야 한다.
쉼은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정해 놓으신 “우주적 리듬”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백성도, 여종과 남종도, 머무는 손님도, 심지어 가축도 일곱째 날마다 쉬라고 명하셨다(출 20:10). 십계명에 포함된 이 명령은 수많은 율법 조항 중에서도 최고의, 헌법과도 같은 강령이다. 주님께서 제정하신 이 안식일에는 모든 처소에 불도 피우지 말아야 했고(출 35:3), 심지어 땅도 안식했다. 땅은 7년이 되는 해에 안식하고, 그렇게 7번의 안식년을 지난 다음 해, 곧 50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희년으로 지켜야 했다. 이 희년에는 땅이 파종 없이 완전한 휴식을 취해야 했고, 더 나아가 담보 잡힌 땅도 “해방”되어 돌아올 수 있었다(레 25:8-13). 하나님이 제정하신 안식일 법의 목적은 쉼이요, ‘노예살이로부터 해방’에 대한 기념이었다.
그리고 이 ‘쉼’은 ‘아름다움’을 동반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피조물을 보시며 “심히 좋아”하셨다(창 1:31). 심미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그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과 즐거움 속에서 ‘쉼’을 누리셨다는 뜻이다. 출애굽 이후의 안식일에는 ‘죄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는 감격과 기쁨의 아름다움이 더해졌다. 즉, ‘쉼’과 함께 그림자처럼 ‘아름다움’이 존재했다.
그래서인지, 예술의 ‘아름다움’은 이 세상의 고난과 압제에서 벗어나는, “쉼의 유사 기능”을 한다. 저명한 독일 철학가 쇼펜하우어는 미학적 경험을 묘사할 때, 익시온(Ixion)이라는 그리스 신화의 등장인물을 예로 들었다. 익시온은 존속살인을 하고 헤라를 강간하려고 했다가 제우스로부터 지옥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회전 바퀴에 매달리는 노역 형벌을 받았다. 쇼펜하우어는 익시온의 이 고된 노역 형벌을 인용하며 “예술은 ‘익시온의 멈추지 않는 바퀴’에 달려 돌아가는 세상의 고통 속 안식일”이라고 결론을 내린다.[1]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예술이란 고통의 세계에서 잠시나마 안식을 경험하게 해주는 신으로부터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죄로 타락한 세상은 하나님을 떠나, 남겨진 아름다움의 흔적의 조각을 맞추며 거짓된 쉼을 누린다. 그 영광의 자리에 대신 앉는 단골 주인공은 단연코 “예술”이다. 때로는 추앙할 만큼 고귀하고 탁월하며, 찬양할 만큼 아름답고, ‘의미’라는 것도 전달해 준다. 때로는 심각할 정도로 마음의 파장을 일으키고, 마음 깊은 중심에 담을 만큼 심장을 뛰게 한다. 존 파이퍼는 “하나님의 가장 큰 적은 그분의 선물”이라고 말했다.[2]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의 씨앗과 마음의 밭’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막 4:19)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기타 욕심”은 악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특히 예술의 아름다움이 그렇다. 안식 대신 안식의 유사 기능인 “마취제”로 쓰이는 예술의 놀라운 기능을 보라. 우리는 일상에서 (1) 심미적이고 감정적인 아름다움을 누리며 (2) 고된 노역과 같은 삶으로부터 해방감을 느낀다.
실제로 현대에는 절망에 빠진 그리스도인이 도피할 수 있는 예술적 장치들이 많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 음악 같은 스토리를 가진 장르 속으로 도피한다. 마음이 내려앉아 절망 가운데 거할 때 베토벤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곡을 밤새워 들었던 기억이 있다. 깊은 감정을 건드리는 선율에서 위로를 얻고, 그 화성의 진행에 상상력을 펼쳤다.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고, 세상 그 어떤 행복감과도 비교할 수 없을 감정적 만족감을 느꼈다. 가사가 없는 아름다운 악기 소리는 더없이 맑았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다. 주님 앞에 거리낌 없는 ‘쉼’이며 ‘마음의 여행’이라고 믿었다. 며칠 동안 그 아름다움에 빠져 멈출 수도 없었고, 잠도 오지 않을 만큼 몰입했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 그 행복은 그 어떤 선한 열매도 맺지 못했음을 봤다. 하나님과 깊이 대화하며 그분께 모든 염려를 맡긴 후와 음악으로 마취시킨 나의 감정의 결과를 비교해보았다. 그 후로 다시는 밤새 음악에 심취하지 않았다. 아름다움에 늘 민감하고 누구보다 깊이 누렸던 습관이 “하나님의 적”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던 기억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예술의 아름다움을 주 안에서 누리는 법, 그리고 우선순위에 주님과의 관계를 먼저 놓는 법, 예술로 참된 안식을 얻는 법을 꾸준히 연습해야 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을 올려놓는 것이 인간 마음의 속성이다. 칼뱅은 “마음은 우상의 아비요, 손은 우상의 어미다”라고 했다.[3]마음에 품은 것이 선하더라도, 그것이 인간 마음속 어느 한구석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이 되어버리고, 반드시 말과 행동으로 우상이라는 쓴 열매를 맺게 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영화를 감상하고, 그 영화에서 하나님의 대서사시를 찬양할 수 있다. 그 영화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영화가 영원한 소망을 품게 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은혜의 경험을 취하여, 어느 순간 그 영화에 몰입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 자리에 그 영화를 대신 앉힐 수도 있다. 영적 분별력과 예민함이 없다면 인간의 마음은 거짓된 아름다움에 내어주기가 너무 쉽다. 이유가 무엇일까? 참 아름다움과 거짓 아름다움이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처절한 노력과 깊은 말씀 묵상, 쉬지 않는 기도 없이는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둘은 비슷하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은혜 아래 있지만, “이미 그러나 아직” 이 땅에서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해야 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온갖 아름다운 예술 활동이 잘못된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우리는 매일의 문화예술 감상에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나는 그 작품을 통해 “창조주 삼위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찬양하고 누리고 있는가? 나는 그 음악에서 “복음”을 누리고 있는가? 나는 그 드라마 시청보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더 기뻐하고 있는가? 기도보다 그림 감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은가? 시의 아름다움보다 말씀의 진리를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쉬는 시간에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으며,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승리로 이끄시고자 우리에게 꾸준히 안식을 경험하게 하신다. 안식일은 ‘이미 그러나 아직’의 하나님 나라의 징표로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안식일’과 ‘아름다움의 경험’은 완전하고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는 종말론적 소망을 낳게 한다. 그 소망은 천국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잠시 맛보며 고통을 견딜 힘을 가져다주는 즐거움과 기쁨으로 나타난다. 즉, 그리스도인에게 아름다움의 경험은 이 땅에서 누리는 평화와 앞으로 임할 천국을 통해 오는 것으로, 단순하게 고통을 줄여줄 마취제로서의 예술이 아니라, 평화와 안식이 있는 미적 경험을 소망하는 것이다.
푯대를 향해 걷지 않고 늘 달음박질했던 사도 바울도 예외 없이 이 땅에서 규칙적인 안식을 누렸다. 그리고 그 쉼은 죄로부터의 해방감에 감사와 최후 영광의 아름다움을 잠시 맛보는 것이었고, 그 안식의 경험을 통해 그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롬 8:18)고 선포했다. 예레미야 또한 “말과 함께 달리는” 주의 전사였다(렘 12:5). 하지만 그도 영원한 영광의 안식을 맛보는 “이 땅의 안식”이 있었기에 멈추지 않고 달렸다. 마음에 새긴 “만개한 살구꽃의 환상”(렘 1:11)이 마음의 영원한 안식을 향한 그의 표지가 되었다. 스가랴는 성령의 기름으로 꺼지지 않는 아름다운 순금 등잔대의 환상(스가랴 4장)을, 제사장이 왕의 면류관을 받는(스가랴 6장) 영원한 나라에서 누리는 진정한 화목의 안식을 마음에 새겼다.
아름다움의 ‘안식’의 목적을 아는 것은, 어쩌면 삶을 예배로 드려야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인식들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안식일의 신학이 기독교의 핵심 교리의 중심에 있듯이, 매일의 삶에서 아름다운 예술을 즐기는 그리스도인은 (1)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이 하나님 나라에서 더 빛나게 펼쳐질 것과 (2) 죄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이라는 진리를 기억해야 한다. [복음기도신문]
[1] Arthur Schopenhauer,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 I, trans. E. F. J. Payne (New York: Dover Publications, 2000), 220.
[2] John Piper, A Hunger For God, 23.
[3] “The mind begets an idol: the hand gives it birth.” John Calvin,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McNeil, trans. Ford Lewis Battles (Philadelphia: Westminster, 1960), 1.11.112.
서나영 | 교회음악 피아노 전공으로 학부(B.A)와 석사(M.M)를 마치고, 남침례 신학교(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M.div.equi.)과 기독교예술학(Ph.D)을 공부했다. 이후 성서대학교, 백석대학교, 백석예술대학교에서 강의하였다. 기독교 신앙과 문화예술, 기독교 미학(예술신학), 예배학 분야에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대표 논문으로는 “개혁교회 안 시각예술 사용에 대한 신학적 고찰” “아름다움과 안식: 예술의 역할에 대한 신학적 고찰” “신앙과 예술: 기독교 예술에 관한 성경적 이해” “마음의 경건: 청교도 영성 안의 찬송과 기도시 역할 고찰” “성도(聖徒)의 여섯 지 노래: 기독교 세계관으로 본 음악의 역할 고찰” 등이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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