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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봄 칼럼] ‘안 돼’에서 ‘오시야’까지

사진: Lucas Metz on Unsplash

말라리아와 장티푸스 발병 후 한 달이 지나서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어느새 시에라리온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계절 7월이 시작되었다.

‘이곳이 아프리카가 맞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가 온 뒤의 하늘과 바람은 한국의 가을 같다.

앓는 동안 한국의 가족, 친구, 공동체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가슴 절절하지는 않았다. 절실한 그리움도 힘이 있어야 생기는 거지 생사가 오갈 정도로 아프면 정말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던 지난 한 달이었다.

그런데 몸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자 한국이 너무 그리웠다. 딸이 너무 보고 싶었고, 친구들과 함께 수다도 떨고 싶었고, 자주 갔던 식당과 카페, 자주 걸었던 산책길도 목이 메도록 그리웠다.

회복은 그리움을 불러왔다. 한국과 가까운 동남아시아였다면 당장이라도 날아갔을 것이다.

대부분 선교사는 복음이 가장 필요한 나라를 자기 고향으로 삼는 열정이 있다고 한다. 선교를 향한 열정과 비전 안에서 다른 모든 열정과 비전은 죽고 사라진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죽을 정도로 아프고 난 뒤 이렇게 한국에 가고 싶은 열정으로 가득한 걸 보니, 아무래도 선교사가 되기에는 글러 먹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라는 생각에 비참함마저도 생겼다.

곁에 누구라도 있으면 위안이 되겠는데, 오늘따라 유달리 센터가 조용하다. 그 많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나는 철저하게 소외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마치 그런 나라, 투명한 나라 시에라리온처럼 말이다.

숙소 앞 벤치에 앉아 있는데 멀리서 누군가 걸어온다.

온전하지 못한 걸음걸이에 다 떨어져서 걸레보다 못한 옷을 걸치고 며칠은 씻지 않은 몰골로 맨발로 걸어오고 있는 아이. 아부였다.

사실, 아부도 정확한 이름이 아니다.

어눌한 발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아이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 내가 그냥 지은 이름이다. ‘네 이름이 아부 맞아?’라는 나의 질문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저었다가 했지만, 어쨌든 아부가 되었다.

나이도 몇 살인지 모른다. 어떤 날은 아홉 살. 어떤 날은 열두 살. 어떤 날은 세 살이 되는 아부의 나이였다.

이름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나이도 모르는 아부는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부는 언제나 맨발이다.

몇 번이나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신발도 신겨 주었지만,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다 떨어진 옷에 또다시 맨발이다.

아마도 가족 중 하나가 벗겨서 시장에 팔았거나 누군가에게 빼앗겼을 것이다.

말을 제대로 못 하는 아부는 지독히도 말을 듣지 않은 아이였다.

예배 시간에 돌아다니는 건 예사였다. 막무가내인 아부 때문에 예배에 집중하지 못할 때가 너무 많았다. 좋은 말로 타일러도, 엄한 표정으로 꾸짖어도, 아부는 상관하지 않고 제 감정에 충실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아이들을 때리고, 내가 야단치면 울고 드러눕기까지 했다.

어떤 날은 참다못해 아부를 예배 시간에 밖으로 쫓아내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아부가 괴성을 지르면서 뛰쳐나가기도 했다.

당연히 끝까지 품고 사랑해야 하지만, 그러기엔 나의 가슴 품은 너무 좁았고 아이들은 너무 많았다.

토요일 오후가 되면 아부 생각을 한다. ‘내일 아부가 올까?’

와도 오지 않아도 내 마음에 짐이 되는 아이.

미안한 마음에 죄책감이 들게 하는 아이.

아부는 나에게 계륵 같은 아이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가끔 아부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찾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은 예배가 주는 평안과 안도감이 더 컸기에 아부는 나의 마음에서 점점 사라져갔다.

두 달 만에 본 아부는 여전한 맨발에 옷이라 할 수 없는 천 쪼가리를 걸치고 있었다. 온 얼굴은 버짐으로 가득했고 머리에는 딱지가 앉아 있었다. 토끼 눈처럼 충혈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부는 굶주리고 아파 보였다. 그동안 누구도 아부 곁에 없었던 것 같다. 왈칵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고 겨우 아부에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부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웃어준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아부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오…. 오……. 시……. 야?”

우는 아이를 달랠 때, 사용하는 부족 언어. ‘오시야’

사랑보다 더 사랑을 담고 있는 단어 ‘오시야’

그 오시야를 아부가 나에게 이야기한다.

오…..오…시…오시…오시야?

마치 마지막 사명을 다하는 전사처럼 자신 안에 있는 모든 힘을 짜내어 힘들게. 나에게 그 한마디를 남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그렇게 힘겨운 한마디, ‘오시야’를 뱉어낸 아부의 눈을 차마 보지 못하고 겨우 고개를 끄덕였더니 아부가 나를 안고 토닥여 준다.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아부를 안아준 적이 없었다. 아부에게 ‘오시야’ 라고 말해본 적도 없었다. 그동안 난 아부에게 해준 게 아무것도 없었다. ‘조용히 해.’ ‘안 돼.’ ‘나가.’ ‘혼난다.’라는 말 외에.

다른 아이들과 달라서 어디에서도 환대받지 못했던 아이. 손 갈 곳이 너무 많아서 차마, 손길이 가지 않았던 아이. 그래서 미처 챙겨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내 눈에 들어오고, 내 마음이 가던 아이들이 많아서 여전히 내 눈 밖에 있었던 아이. 교회에서조차도 관심을 받지 못했던 아이. 그 아이를 통해 위로받는다.

아부가 예수님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낮고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 나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오시야.’라고. <계속>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작지만 피어있는 꽃들>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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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봄 | 기록하는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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