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박태양 칼럼] 세상을 뒤덮는 동양사상

사진: Sandeep Kr Yadav on unsplash

눈먼 기독교(19)

세계적인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는 세계 역사와 더불어 세계의 종교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언젠가 “20세기는 동양 종교들과 기독교를 혼합한, 제3의 천년기의 거대한 보편 종교가 처음으로 등장한 세기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앞날을 내다본 탁월한 식견(識見)이 아닐 수가 없다. 지금 이 시대는 그의 말처럼 동양 종교가 기독교를 잠식하고 서양으로 점점 더 퍼져나가고 있다. 사실 잠식이라기보다는 혼합이라는 표현이 더 맞는 것이지만, 어쨌거나 기독교가 지금 세상에서 뿌리를 잃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동양 종교의 침투다. 토인비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는 않으면서도, 교회야말로 세상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선포했던 사람이다. 이런 그가 ‘서양 사상의 동양화’라는 시대적 흐름을 파악하고 선포했는데, 그의 예견은 무서우리만치 정확했다.

세계적인 비교신화학자인 조셉 캠벨도 불교가 미래의 종교가 될 것임을 내다본 바가 있다. 그뿐 아니라 알버트 슈바이처 역시 불교에 대해 매혹된 인물인데 그의 사상에 대해 에리히 프롬은[1] 이렇게 말한다.

슈바이처는 기독교의 형이상학적 낙관주의와는 대조적인 형이상학적 회의론자(懷疑論者)였다. 그가 “인생은 어떤 지고(至高)의 존재에 의해 주어지고 보증된 아무런 의미도 갖고 있지 않다”고 하는 불교사상에 크게 매혹된 이유의 하나다. (중략) 부처, 에크하르트, 마르크스, 슈바이처의 사상에는 뚜렷한 유사점(類似點)이 있다. 소유 지향의 포기에 대한 철저한 주장, 완전한 독립의 주장, 형이상학적인 회의론, 신이 없는 종교성, 사랑과 인간적 연대의식 속에서의 사회적 활동의 주장 등이 그것이다.[2]

흔히 기독교 사상가로 알려져 있는 슈바이처가 실은 신(神)이 없는 종교성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것을 프롬은 잘 파악하고 있다. 신이 없는 종교의 대표는 역시 불교이고 그래서 슈바이처는 불교에 크게 매혹을 느낀 것이다.

비단 불교뿐만이 아니라 도교나 힌두교 같은 동양 종교에 대해서 관심 이상의 감동을 소유한 사상가는 그 밖에도 많으나 특히 쇼펜하우어가 그러하다. 염세주의 철학자로 유명한 쇼펜하우어는 힌두교의 우파니샤드를 읽은 후 “아, 이렇게 내 마음에 붙어있던 유대인의 미신을 깨끗이 씻어버릴 수 있는가!”라고 외쳤다. 그가 말하는 유대인의 미신은 물론 기독교다. 평생을 거의 하숙집에서 보내고, 유일한 자식을 사생아로 버려두고, 정상적인 생활을 거부하던 쇼펜하우어는 죽음의 공포를 종교의 궁극적 원인으로 보았던 인물이다. 그는 여자와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어버이가 되는 것을 최대의 악으로 생각하던 철학자인데 그것은 그의 불행한 가정사에 기인하는 것으로 추측된다.[3] 그는 말년에 불교에 심취해서 불상을 집 안에 들여놓기까지 했다. 그는 불교를 서양에 본격적으로 전파한 인물 중의 하나였다.

서양이 동양에 의해 사상의 전복(顚覆)이 일어나고 있는 이런 현상을 가히 혁명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정도인데, 이러한 모습은 특히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미국에서 1세기 이전부터 시작되어 현재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헤르만 헤세, 하나님 신앙에서 자아의 신앙으로 떠나간 천재

그들(동양 및 서양 신비주의자들)의 사상은 특히 미국 초절주의자들과[4] 비트족에게는[5]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외국의 사상들은 미국적 생활 방식과 미국의 정신을 통해 여과되고 독자적으로 응용되었다. 이를테면, 미국에서의 선(禪),[6] 스베덴보리주의, 신지학(神智學), 베단타[7] 등은 일본이나 18세기 영국, 또는 19세기 인도의 것들과 다르다는 말이 다. (중략) 헤세는 “‘동쪽’을 향한, ‘본향’을 향한, 인간의 영혼의 영원한 노력”이라고 말했다. 동양은 하나의 문화나 종교보다는, 보다 폭넓고 자유로운 시각을 구하기 위한 방법론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서양의 신비주의 전통에 ‘동양’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8]

앞의 글에서 ‘동쪽’을 ‘본향’이라고 표현한 헤르만 헤세는 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모두 인도 선교사였다. 헤세 자신도 어렸을 때 인도에서 살면서 일찍이 동양적 감수성을 익혔는데, 이것은 평생 동안 그의 사상과 문학성에[9]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스스로 ‘동방의 순례자’로 자처했는데, 그가 동방에서 얻은 사상은 한마디로 ‘자아(自我)가 곧 신(神)’이라는 것이다. 그가 쓴 글을 읽어보자.

짜라투스트라는[10]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신에게서 한 가지 능력을 받았네. 그 능력으로 인간은 신이 되었고, 자신이 신이라는 점을 기억할 수 있었네. 그 능력이란 바로 자신의 운명을 인식할 수 있는 힘이네. 바로 짜라투스트라의 운명을 깨달았다는 점 때문에 나는 짜라투스트라일 수 있는 것일세. 내가 그의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짜라투스트라인 것이네. 소수의 사람들만이 자신의 운명을 깨닫는다네. 소수의 사람들만이 자신의 삶을 산다네. (중략) 운명이 우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결국 이 세상에는 숭배의 대상으로서의 신이나 우상은 없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네. 어머니의 몸속에서 아이가 자라듯 운명은 모든 인간의 몸속에서, 달리 말하면 모든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 속에서 자라는 것이네. (중략) 운명은 자네들의 신이어야 하네. 왜냐하면 자네들이 숭배해야 할 대상은 바로 자네들 자신이기 때문일세.[11]

헤세가 쓴 이 에세이는 그의 사상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지은 니체의 절대 추종자답게 그는 절대 자아(自我)이자 새로운 신으로서 짜라투스트라를 환영했다. 그는 자기가 짜라투스트라인 것을 깨달았으며, 다른 사람들도 스스로가 이미 그렇게 짜라투스트라인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상이나 신 같은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인간이 인간을 신으로 만든 것에 불과하다고,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신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헤세는 말한다.

그는 뉴에이지(New Age)라는 단어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할 무렵 이미 최고의 뉴에이저(New Ager)가 돼 있었다. 뉴에이지의 핵심 사상이 바로 ‘인간이 곧 신’ 아니던가! 그는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숭배할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숭배하라고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말한다. 그의 가르침은 마치 인도 고승이나 중국 지혜자의 설법(說法)처럼 들린다. 헤세 자신의 신앙에 대해 언급한 다음의 글에서 그는 자신의 글과 사상이 동양인들에 의해서 친근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나는 종교를 두 가지 형태로 체험했다. 하나는 신앙심 깊고 성실한 프로테스탄트교도의[12] 아들과 손자로서, 또 하나는 인도의 계시(啓示)의 독자로서 이다. 그 계시 중에서도 나는 우파니샤드와[13] 바가바드기타[14] 그리고 부처의 설법을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실제로 나는 기독교신자였던 소년 시절을 통해서 교회로부터 아무런 종교적 체험도 경험하지 못했다. (중략) 이렇게 몹시 갑갑하고 옹졸한 기독교와, 약간은 달콤한 시구(詩句와), 그리고 대개는 너무나 지루한 목사의 설교 등에 비하면 인도의 종교와 문학세계는 훨씬 더 유혹적이었다. (중략) 나는 또 인도의 정신세계보다도 좀 뒤늦게 중국의 정신세계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발전이 이루어졌다. 공자(孔子)와 소크라테스를 형제로 생각하게 한 고대 중국의 도덕적 개념과, 신비적인 탄력(彈力)을 지닌 노자(老子)의 은밀한 영지(靈智)는 나의 마음을 강렬하게 매혹시켰다.[15]

헤세는 평생 종교 없이 산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교회 없이 살아왔다. 헤세에게 있어서 정통적인 기독교는 ‘갑갑하고’ ‘옹졸한’ 종교였다. 그러한 기독교 속의 예수가 부처, 공자, 소크라테스나 노자에 비해 별로 매력이 없어 보인 것은 당연하다. 그는 ‘교회적인’ 기독교가 아닌 ‘신비적인’ 즉 동양 종교적인 기독교의 영향을 평생 동안 지배적으로 받아왔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가 붙잡고 있는 기독교는 성경적 기독교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어긋난 기독교관은 그의 아버지와 외조부 시절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16] 어린 시절 교회로부터 아무 종교적 체험도 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에 대해 헤세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대는…할 지어다”라는 말만 들어도, 나의 마음은 완전히 딴전을 부리게 되고, 나는 완고해졌다.[17]

어린 시절, 예민한 감수성을 가졌던 천재 소년은 성경이 아닌 힌두경전과 불경에서 영적 감흥을 찾았다. 여러 가지 규칙을 좋아하는 청소년은 없겠지만, 헤세는 유달리 규칙에 반감이 컸다. 특히 성경이 말하는 ‘의무(must)’ 규정은 더더욱 반발심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제대로 체험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에 대한 거리감부터 갖게 됐고,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만났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아 발견은 온전하거나 궁극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알지 못한 채 헤세는 결국 하나님 신앙을 떠나 자아의 신앙으로 삶을 마감했다. 선교사 가문의 비극이 어찌 이보다 더 클 수 있겠는가?


[1] 유태인, 독일계 미국인, 사회심리학자이면서 정신분석학자

[2] 에리히 프롬, 『소유나 존재냐』, 청목문화사, 209-210쪽

[3] 그는 평생 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았고, 아버지는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며, 할머니는 정신병으로 사망했다.

[4] 超絶主義者, 19세기 중기 미국에서 일어난 관념론적 입장의 철학 운동에 동참했던 사람

[5] Beat Generation, 1950년대 중반 미국에서 현대의 산업 사회를 부정하고 기존의 질서와 도덕을 거부하며 문학의 아카데미즘을 반대한, 방랑자적인 문학가 및 예술가 세대를 이르는 말

[6] 참선(參禪)을 통한 내적 관찰과 자기 성찰에 의하여 자기 심성의 본원을 깨달을 것을 주창한 불교 종파

[7] Vedanta, 베단타라는 용어는 산스크리트어로 베다(가장 오래된 인도의 경진)의 결론(anta)을 뜻하며, 베다 문헌의 마지막 부분을 이루는 ‘우파니샤드 Upanisad’를 가리키기도 하고, ‘우파니샤드’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생겨난 학파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8] 매릴린 퍼거슨, 『뉴에이지 혁명』, 정신세계사, 466-467쪽

[9] 『데미안』, 『수레바퀴 밑』, 『싯다르타』, 『짜라루스트라의 귀환』 등으로 유명하며, 1946년 『유리알 유회』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0] 고대 페르시아(이란)의 조로아스터교(배화교)의 창시자인 조로아스터의 독일식 발음이다. 여기서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4부작 산문시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주인공 이름이다.

[11] 헤르만 헤세, 『헤세로부터의 편지』, 황금가지, 130-13 쪽 ― 전쟁에서 패배한 후 절망감에 빠져 있던 독일 국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짜라투스트라 사상의 회복이라고 헤세는 이 글에서 주장한다. 그는 위대한 독일 정신을 역사상 마지막으로 보여 준 사람은 짜라투스트라의 창시자 니체였다고 같은 책에서 언급한다. (원래는 ‘자라투스트라’로 표기됐으나 여기서는 ‘짜라투스트라’로 통일했다.)

[12] protestant, 로마 가톨릭(구교)에 저항하는 자라는 의미로서 개혁주의 기독교(신교)를 의미한다.

[13] Upanisad, 가장 오래된 힌두 경전인 베다를 운문과 산문으로 설명한 철학적 문헌들

[14] Bhagavadgita, 고대 인도의 힌두교 경전의 하나, 거룩한 신의 노래라는 뜻

[15]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 을지출판사, 212-215쪽

[16] 인도에 선교사로 갔지만 헤세의 부친과 외조부는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와 참된 기독교를 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선교사이면서도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전하는 선교사는 특이한 것이 아니다. 중국에서 선교사로 살았던 대지(大地)의 작가 펄 벅 역시 예수와 기독교에 대해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현지인들에게 전했다.

[17] 장석주, 『헤르만헤세 잠언록』, 청하, 161쪽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눈먼 기독교>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박태양 목사 | 중앙대 졸. LG애드에서 5년 근무. 총신신대원(목회학), 풀러신대원(선교학 석사) 졸업. 충현교회 전도사, 사랑의교회 부목사, 개명교회 담임목사로 총 18년간 목회를 했다. 현재는 (사)복음과도시 사무총장으로서 소속 단체인 TGC코리아 대표와 공동체성경읽기 교회연합회 대표로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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