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보는 이슬람(36)
딸 하영 이야기
첫째 딸, 하영이가 유엔난민기구(UNHCR)에서 근무한 지 벌써 8년이 되어간다. 첫 근무지인 파키스탄을 시작으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를 거쳐 지금은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위해 동유럽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우리 대견스러운 하영이가 유엔 근무를 시작하기 전, 우리나라에서 난민교육을 받고 있을 때였다. 매일 교육을 받고 집에 돌아와서는 하루 중에 받은 교육을 아빠 엄마와 나누면서 난민들이 불쌍하다고 말하는 하영이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하영이를 위해 준비해 주신 천직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하루는 밖에서는 대견스러운 유엔난민기구 직원인지는 몰라도 집에 들어오면 여전히 철부지인 하영이가 집에 들어와서는 손도 까딱하지 않는 모습이 좀 서운해서 우리 가족을 난민으로 대해 달라했더니 한마디로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영이는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얘기했다. “엄마 아빠는 절대 난민이 될 수 없어. 왜냐하면, 난민은 우리처럼 따듯한 방에서 편하게 잠잘 수 있는 사람들도 아니고, 아침에 일어나 서로 안아 줄 가족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식탁 앞에 오순도순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밥 먹을 수도 없는 사람들이야.”. 하영이 말을 가만히 들어보니. 우리는 난민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실향민
‘실향민’이란 전쟁 등의 뜻하지 않는 사태로 갑자기 자기 삶의 터전과 거처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말한다.
2022년 유엔난민기구(UNHCR) 통계에 따르면, 현재 고향을 잃고 세계에서 떠도는 실향민(난민)의 수는 어느덧 1억 명을 넘어서고 있다.
이 숫자는 전 세계 인구 중 거의 100명 중 1명이 난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수많은 전쟁으로 발생한 난민들로 인해 세계 정치, 경제, 외교가 흔들리고 있다. 이들 중 반 이상이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그리고, 최근에 우크라이나 난민이 합세했다. 지금도 지구촌 안에서는 매일 4만여 명의 난민이 새롭게 발생하고 있으며, 이 난민 중 누군가는 2초마다 집을 잃고 있다.
중동 아랍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이슬람국가(ISIS) 테러 사태와 2010년부터 민주화를 갈망하며 시작된 아랍 민주화 운동인 “아랍의 봄” 사태 이후로 전 중동 이슬람권에 혼란이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발생한 시리아 내전으로 거의 천만에 가까운 시리아 국민이 난민으로 전락해서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또, 20년 동안 미국 보호 아래 있던 아프가니스탄이 최근 탈레반의 손으로 들어가면서부터 또다시 수많은 아프가니스탄 난민이 지금 전 세계에 흩어져서 갈 곳을 찾고 있다.
또, 최근에 발생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로 우크라이나 난민이 600만 명이 넘어서고 있으며, 이후 얼마나 많은 난민이 더 발생할 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에 이런 어려움을 당한 난민들에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난민에 대한 각 나라의 반응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만약, 난민들을 받으면, 국가 경제가 어려워지고, 사회가 혼란에 빠진다고 생각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전쟁을 포함해서 다양한 이유로,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집, 재산, 가족을 포기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인근 국가로 피해 들어온 난민에 대한 세계 각국의 보호와 도움이 매우 절실하고 절박한 상황이다. 국제적으로는 1951년 난민협약[1]에서 이들의 보호에 대해 이미 약속한 바 있지만 각국의 태도는 여전히 미온적이다.
지금 이들은 살아가던 지역에서의 향후 정치, 경제, 테러 등에 대한 끝없는 불안과 절망으로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 지금 중동 이슬람권을 비롯한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이념과 종교적 갈등에 따른 충돌은 무자비한 전쟁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수많은 난민이 지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난민의 발생은 셀 수 없는 끔찍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뒤따른다. 어떤 지역에서는 난민 문제로 말미암아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사회문제를 초래하면서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치 동전의 양면이 있는 것처럼, 이러한 난민들의 안타깝고 가슴 아픈 소식 뒤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왔던 지역에서 난민의 이동은 하나님의 선교에 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수많은 난민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부흥의 소식들도 들려오고 있다.
그동안 우리 한국교회는 지구촌 곳곳에서 기아 문제에 대책을 마련했으며, 국내로 유입한 이주민들을 향해서도 따듯한 마음을 보여 왔다. 이제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 고적한 삶을 지속하는 난민들을 향해서도 선교적 관심을 보여줘야 할 매우 시급하고도 절박한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던 중, 2018년 6월, 예멘에서 발생한 내전을 피해 제주도에 도착한 예멘 난민들을 계기로 우리나라에서도 난민 문제가 표면으로 떠 올랐다.
당시, 우리 국민은 이들의 수용 여부를 놓고 찬반 여론이 들끓었으며, 그 뒤로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이 들어왔지만, 지금까지도 딱히 해결점을 찾지 못한 채, 인도적 측면에서만 그들을 지원하고 있을 정도이며, 미온적인 태도와 반응은 여전하다.
국제법에서 보는 난민
국제법에는 난민의 권리와 인권을 옹호하는 적지 않은 장치가 있다. 1948년에 만들어진 세계인권선언 제14조 제1항에는, ‘모든 사람은 박해를 피하여 다른 나라에서 피난처를 구할 권리와 그것을 누릴 권리를 가진다.’라고 적혀 있다.
이를 좀 더 보완해서, 1951년에는 난민 지위에 관한 협약이 맺어지면서 난민 보호가 법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
또, 1967년에는 난민 지위에 관한 의정서가 체결되면서 난민의 일반적이고도 기본적인 정의와 협약체결국의 의무 등이 만들어졌다.
한편, 1949년에는 난민들을 대상으로 체계적인 활동을 위해 국제기구가 하나 설립되었는데, 바로 유엔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UNHCR 혹은 유엔난민기구)가 그것이다.
유엔난민기구는 각국의 정부와 유엔의 요청으로 설립되어, 난민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국제 조치와 권한을 가지고 난민의 권리와 복지 보호 활동하고 있다.
국내 대표부는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역할이 점차 중요해짐에 따라서 국내 난민 보호 역량 강화에 이바지하고,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한 국내 사회의 옹호와 참여를 이끄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2006년 7월에 설립되었다.
대한민국 법에서 보는 난민
우리나라는 1991년 난민협약과 난민의정서에 가입하였으며, 2012년에는 출입국관리법에서 분리해서 난민법이 따로 제정되었다.
인권 국가로서 국제규범의 충실한 이행을 목적으로 제정된 우리나라의 난민법은 아시아 최초의 난민법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 우리나라는 2013년 7월 1일에 발효된 아시아 최초의 독립 난민법을 가지고 있다. 돌아가면 박해당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하는 외국인은 난민 인정 신청서를 지방 출입국ㆍ외국인 관장에 제출하여 보호를 요청할 수 있다.
명백한 이유가 없는 신청이라 할지라도 접수공무원이 접수단계에서 이를 판단할 수는 없으므로 신청의 접수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고, 난민 심사관의 면담과 사실조사를 거쳐 6개월 이내에 제1차 결정이 이루어진다. 출입국 항에서 신청할 때는 7일 이내에 난민 인정 심사에 넘길 것인지만 결정한다.
불인정 결정에 대해서는 30일 이내에 이의신청할 수 있으며, 이의신청이 있으면 난민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다시 6개월 이내에 제2차 이의 결정이 이루어진다.
이의 결정에 대하여도 14일 이내에 제1심 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제2심 고등법원, 제3심 대법원까지의 재판이 보장된다. 제3심까지의 재판은 2년 이상 걸릴 수도 있으며, 이러한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사정변경이 있을 수 있으므로 절차가 끝나도 난민 신청을 다시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나 법적으로 가능하다.
최근 제주 예멘 난민사태를 계기로 이러한 난민 신청자의 권리가 거짓 난민들의 체류와 취업 수단으로 악용되고, 국민의 권리와 안전을 위협하므로 난민법을 개정하거나 폐지하고 난민협약도 탈퇴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설령, 명백한 근거가 없거나 개인적 사유로 난민 신청을 해도 접수거부나 불회부는 인정되지 않는다. 아울러, 접수된 사건은 제1차 심사, 제2차 이의 심사, 제3차 행정소송, 제4차 고등법원, 제5차 대법원을 거치는 제5단계의 난민심사가 장기간 진행된다.
한편, 같은 사건의 반복적 재신청도 가능하므로 난민이 아닌 다른 외국인도 체류와 취업을 목적으로 난민 신청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틀린 것은 아니다.
이는 난민법 제정 당시 난민의 생명과 인권 보호에 치중하여 남용 가능성에 대한 충분한 장치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현재 반복적 재신청이나 명백히 근거 없고 남용하는 신청을 통제하기 위한 난민법 개정작업이 진행 중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난민 인정률이 지나치게 저조하여 정말 보호가 필요한 난민들이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하고, 귀국도 하지 못하면서 소송이나 재신청을 반복하면서 심리적으로나 재정적으로도 매우 피폐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성경에서 보는 난민
지금 전 세계에 흩어져 어렵게 살아가는 이 난민들을 향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받아들어야 하나?
주님은 지금 지구촌 곳곳에서 이웃이 되어 어렵게 살아가는 수많은 난민을 향해 뭐라고 말씀하고 계시나?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우리가 받은 교훈은 어려움에 빠진 난민들이 바로 우리의 이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는 이론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그들에게 다가가서 삶의 자리에서 그들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이면 당연히 돕겠지만, 이웃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도울 필요가 없다는 매정한 생각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우리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그들이 누구든 간에,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든, 어느 나라 사람들이든, 종교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지금 그들이 어려운 상황에 빠져있다면 우리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라고 말씀하신다.
지금 어려움 속에서 죽어가는 그들이 바로 우리의 이웃이며, 우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동시에 실제로 그들 곁으로 다가가서 도우라고 말씀하신다.
지금 전쟁으로 무고한 이들의 삶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많은 이들이 폭격에 집을 잃고 가족을 잃어버렸다. 저들은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 어느 사람도 스스로 난민이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야 한다.
지금, 지구촌 곳곳에서 자기들이 생각하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어떠한 폭력이라도 이를 정당화한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서야 할 자리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복음기도신문]
[1] https://www.unhcr.or.kr/unhcr/html/001/001001003003.html.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자신의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서,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 또는 그러한 사건의 결과로 종전의 상주국 밖에 있는 무국적자로서, 상주국에 돌아갈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상주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 (1951년 난민협약 제1장, 일반규정 제1조, “난민”의 용어 정의, A항 (2)번.
김종일 | 장신대 신대원 졸업, 前 중동선교회(MET) 본부장, 現 FOT 선교회 대표. 국내 이슬람권 선교사 네트워크 회장, 저널 ‘전방개척선교(KJFM)’ 편집인, 아신대학교(ACTS) 중동연구원 교수. 저서: ‘밖에서 본 이슬람, 무슬림 이해하기’(20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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