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목회하면서 이런 분들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것에 어려움을 더하게 하려고,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마음 상하라고 더 열심을 내는 사람들도 봤습니다. 분명하게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흘러갔습니다. 교회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랑 안 맞을 때, 그 말씀이 자신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오히려 믿음생활을 더 열심히 하고 사역을 더 열심히 하는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교회 지도자의 말씀이 흘러가는 것에 어깃장을 놓으려고 오히려 더 순전하게 믿음생활을 열심히 하는 분들도 봤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런 상황에서도 기뻐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무너졌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 볼 때 힘들어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처럼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어깃장을 놓으려고 열심히 더 주님을 증거하는 것을 보면서, 그래도 주님이 증거 되니까 기뻐했습니다. 주님이 사도 바울의 삶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뻐하고 또 기뻐했습니다. 저는 부끄럽기도 했지만 큰 위로를 받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았군요, 그래서 염려가 나를 힘들게 했고, 상황들이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이군요. 기준이 달라서 그랬던 것이군요!”
주님이 우리의 구주라고 말하면서도 삶의 이유는 각기 달라 보입니다. 주님을 믿기는 믿는데 주님이 이유가 아닙니다. 동기 부여가 되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성공, 자녀, 돈입니다. 믿기는 믿지만 우리 삶의 어떤 성취를 위해 주님을 갖다 씁니다.
돈이 이유가 되고 돈을 사랑하게 되면 돈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해집니다. 자녀가 삶의 이유면 자녀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입시 문제, 취직 문제가 단기적으로 삶의 이유가 되고, 그것 때문에 주님을 갖다 쓴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이 보여야 합니다. 우리 삶의 이유는 주님입니다. 주님은 판단하시고 계획하시고 이끌어가시고,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고 사랑하고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 수만 명을 이끌어가십니다. 재앙을 통해 이끌어가십니다. 초자연적인 역사입니다. 개인적으로 경험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경험했습니다.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 바로 군대가 수장당했습니다. 백성들은 직접 눈으로 봤습니다. 광야로 들어가 물도 마시고 만나도 먹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경험을 했는데도 백성들은 힘들 때면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불평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죄성입니다. 순종하며 나아왔고 약속의 말씀을 믿고 왔음에도 속사람이 실제 변화되지 않으면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우리의 기준, 자아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행복해, 이것 있어야 성공이야, 당선이 성공이고 떨어지면 낙오자야!” 그 기준이 깨지고 주님이 기준 되어야 우리는 삽니다! 그것이 확인될 때 어느 조건, 어느 순간이나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실천적인 과제를 말씀드립니다. 새 사람으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고요하고 단정한 마음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나아갈 때는 보통 이 순서대로 진행됩니다. 먼저 고요해져야 합니다. 고요하다는 것은, 먼저 고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고요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즉, 내 마음이 시끄럽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왜 시끄러울까요? 내 마음에 다른 목표 설정이 있고 다른 기준이 있는데,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니까 시끄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 마음이 시끄러워요, 복잡해요, 갈등해요, 시기도 아픔도 많아요, 욕구가 많아요”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때 고요함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끄러운 자신을 책망하기도 하고 채근하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하고 다그치기도 하면서 고요한 자리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고요해야지, 잠잠해야지!” 어떤 기준에 못 미친다고 해서 답답해 하지 않고 우울해 하지 않고 조급해 하지 않으며, 만군의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게 앉아 있으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 시간의 많은 시간을 마음이 고요해지도록, 할애해야 합니다.
생각이 많은 분들은 마음이 고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왜 이리 판단이 많고, 염려가 많고, 비판이 많은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내 영혼아! 주님 앞에 잠잠히 고요하거라!” 스스로 채근하기도, 격려하기도, 위로하기도 하면서 주님 앞에 머물러 있을 때 단정함은 익어집니다. 단정함은 정결한 시간입니다. 그때 돌이키고 자복하며 우리 존재를 주님 앞에 내던지는 것입니다.
다윗도 그랬고 모세도 그랬고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생이 넘어졌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의 나무, 죄의 공장입니다. 우리 존재를 내던지고 우리들의 구체적인 죄도 내던지는 단정의 시간이 길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기도하는 기도시간 두 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뒤 우리는 기뻐함으로 그 문으로 들어갑니다. 찬양의 시간, 찬양이 터지는 것입니다. 고요하고 단정한 사람만 그 문으로 들어갑니다. 주님이 하심이 경험되고, 주님의 영광이 깃듭니다. 영광은 탁월함,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되지만, 영광은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들어갔을 때 주님으로 가득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선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온전하게 이루어집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선하시고 기쁘시고 온전하시다는 것, 그 마음으로 가득해지는 것이 영광입니다. 주님께서 이끌어가실 경륜과 방향을 신뢰하는 마음이 영광입니다. 영광 가운데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세를 누립니다. 하나님의 권세가 이루어지는 것을 삶의 자리에서 실제 경험합니다. 보기 힘들었던 사람도 새롭게 바라보게 됩니다. 뒤집혔던 내 속이 새롭게 됩니다.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눈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역사가 펼쳐집니다. 그것이 제대로 기준 세우는 것입니다. 내 삶의 이유는 하나님입니다. 내 삶의 전부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셨던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목회로 부르는 것이 선명한데 두려웠습니다. 가기 싫었습니다. 막연했습니다. 30대 넘어서 목사가 된다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목사님에 대한 이미지는, 하얀 고무신을 신고 검은 양복을 입은 약자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탐탁치 않았습니다. 자신도 없어서 피하고 또 피했습니다.
8개월 동안 교회에서 살았습니다. 강단 밑 공간에서 철야 하고 기도하고 찬양했습니다. 괴로우니까, 피할 수 있으면 피하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주님, 정말 다른 길 없나요? 어차피 열심히 주님 앞에서 살 건데 다른 길은 없을까요?” 그런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날 새벽, 주님께서 천둥처럼 말씀을 주셨습니다. 고민 가운데 지내던 때라 예배도 기둥 뒤쪽에서 드렸습니다. 설교자와 눈을 덜 마주치려고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더이상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부할 수 없는 음성을 들었음에도 하기 싫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거부할 수 없는 음성을 들었는데 염려가 들어옵니다. 결정을 내렸는데도 나의 판단이 따라옵니다. 어쩌면 그렇게 준비해서 살려고 하는지! 어쩌면 그렇게 예측이 되어야 안심하는지! 저는 주님과 관계로 제 존재를 깨달았습니다.
부르심이 선명해도 옛사람이 처리되지 않고 삶의 기준과 삶의 이유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으면 끝없이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존재가 우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백성들을 구원했어도 광야에서 다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삶의 이유를 바꾸어가시는 것입니다. 삶의 자리가 어디든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도록 우리의 고백이 실제 되도록 바꾸어가십니다. 우리 삶의 이유는 주님이십니다.
[에필로그]
고요하려면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시끄럽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끄러운 이유는 대부분 기준에 못 미치기 때문입니다. ‘이것 있어야 행복해’ 하는 기준에 못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복잡해지고 갈등합니다. 힘이 없으면 원망과 시기로 다가옵니다. 힘이 있으면 누름으로 이어집니다. 그것을 돌이키는 것이 단정함입니다. 주 앞에서 기준을 내던져야 합니다. 여기서 떨어지면, 이것에 못 미치면 불행한 줄 알았고, 승진 못하고 돈 없으면 불행하다고 여겼던 기준을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이 기준 되지 못했던 허약한 믿음이었음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럼 그때부터 주님 생각이 많이 납니다. 생각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마음이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연약한 사람은 예수님 생각을 많이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딴생각’, 예수님 생각을 많이 합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품어질수록 주님께서 위로하고 격려하고 이끌어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됩니다. 고요하고 단정해야 감사의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면 주님으로 채워지는 분별이 가득해집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분별이 가득해집니다. 그때 비로소 삶의 처지에 관계없이 권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살아내는 믿음을 쓸 수 있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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