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보는 이슬람(30)
‘코비드-19’로 인한 엄청난 변화
최근 전 세계적으로 ‘코비드-19’라는 엄청난 사태로 변화를 얘기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제 예전의 방식을 다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바꾸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어제의 ‘안 된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이 이제 될 수 있게 되었다. 또, 반드시 돼야 하는 것들도 되면 안 되거나, 안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 교회도 새로운 시대에 맞게 교회 안팎과 선교 현장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역사는 말 없는 스승
역사는 말 없는 스승이라고 했다. 말은 없지만, 묵묵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들이 많다는 뜻이다.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통해서 시대나 환경이 바뀐다고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떠한 외부적인 변화나 도덕과 선행이 우리 인간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거듭나야만 변할 수 있다.
우리의 교회는
교회는 이런 거듭난 사람들이 모인 천국의 축소판 같은 곳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에만 가면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거룩한 하나님의 영의 영역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늘의 평화와 자유, 성령 안에서의 얻어지는 기쁨과 환희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인간의 영이 이 땅에서 영원으로까지 연결되어 영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성령의 역사로 느껴져야 한다. 옛사람의 기질과 죄의 성향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변하여 새사람 되어 버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여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 가운데 암담하고 우울한 시대가 적지 않았고, 이 속에서 반복되어 온 실수를 찾아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교회가 물질과 결탁했을 때 속화되었다
실례는 과거 러시아 교회에서 교회의 치부 문제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러시아 공산당의 탄생이 그것이다. 러시아 교회는 물질 때문에 타락하기 시작했으며, 교회에 물질이 쌓이고 나눠주지 않았을 때, 공산주의 혁명을 낳게 했다. 성경 속, 라오디게아 교회도 그랬다(계 3:17). 성경에서 물질을 죄악시하라는 얘기는 없지만, 물질은 오직 하나님의 덕과 사랑을 전하는 선한 용도로 쓰일 때만 그 가치가 있다. 미국의 초기 자본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청교도(청지기) 정신과 자본주의가 접목되어 사회로 환원하고 구제하고 봉사하는 정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청교도 윤리관이 빈약한 가운데 성공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우리 교회부터 솔선수범해서 배금주의 사상을 멀리해야 했다. 서구의 교회가 결코 물질이 없어 문 닫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올바른 생명의 말씀이 전해지지 아니할 때 심령은 병들고 다 떠나가 버린다.
교회가 정치하고 결탁했을 때 속화되었다
교회가 정치하고 결탁해서 잘못된 예는 로마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국교화 선언(AD 313)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야만인들의 침입을 물리칠 길을 찾다 카타콤의 기독교를 국교화해 버렸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아가서’에서 보듯이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2:2)다. 가시에 찔렸을 때 향기가 나는 것이 백합화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핍박 속에서 오히려 성령의 기쁨이 일어난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환란이나 핍박이 없는 상태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면 역시 그들도 속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보다 귀한 예수, 핍박보다 더 가치 있는 예수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기독교를 가장 순수하게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서 생명보다 더 귀한 분이 예수라는 것을 그곳 사람들에게 전했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예수가 누구란 말인가? 저 고귀한 로마의 시민이 예수를 생명을 내던져가면서까지 저렇게 전한다면 예수가 우리의 생명보다 더 귀하다는 것이 아닐까?”
이렇듯 그들에게 예수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그가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데살로니가에 가서 더는 핍박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보다 더 귀하고 이 세상의 어느 것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삶에서 몸소 실천하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비로소 우리의 주변은 변할 수 있다.
교회가 숫자와 결탁하면 속화되었다
다윗은 여호와의 예비하신 뜻을 헤아리지 않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인구조사를 하다가 재앙을 받았다(삼하 24장). 인구조사가 죄가 된 것은 자신의 판단을 앞세운 다윗의 교만과 하나님을 향한 불신 때문이었다. 다윗이 행한 인구조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다윗의 조사는 병역을 치를 장정이 얼마나 되는가를 알기 위한 것이었고, 이것은 다윗이 여호와보다 자기 군대의 힘을 더 의지하게 되었음을 보여준 행위였다. 하나님께는 의인 단 하나를 찾으시며, 기드온의 삼백 용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씀하셨다.
이 외에도 역사의 교훈 속에서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 과거 소아시아의 일곱교회처럼 세상을 더 사랑하고, 세상의 우상을 섬기며,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와 교인들을 단호하게 잘라 버리셔야 했던 하나님 아버지의 아픔과 단호한 결단(요 15:2)을 기억한다.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
우리가 바라보며 오직 의지할 분은 바로 하나님 한 분뿐이다. 우리 인간의 계산과 하나님의 계산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확신할 때, 복음을 전하는 선교 현장에서 기적은 지금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우리의 선교 현장에서도 비록 많은 성도가 출석하는 교회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제자를 올바로 양육하기 위해서 눈물로 씨를 뿌리며, 고민하며, 노력하는 사역자 하나의 모습이 아름답고 귀하다.
지금, 세상 모두가 변화를 얘기한다. 그러나, 시대적 변화 앞에 서 있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외형적 변화가 절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영적 변화이다. ‘코비드-19’ 사태로 지금 우리 교회와 선교 현장이 어려움에 부닥쳐 있다. 잠시 선교 현장을 뒤로 하고 눈물을 머금고 귀국하는 선교사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동안 3만 명을 파송하고 10만 명의 양적인 파송 목표를 세우며 의기양양하게 가던 한국교회 선교에 제동이 걸렸다. 선교의 총체적 난국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의 교훈 속에서 볼 때, 바로 지금이 우리 하나님이 일하실 때다. 바로 지금이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그분만을 의지하며, 매달리며, 울부짖을 때다. 우리는 코로나 사태를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거시적 섭리를 믿는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우리 한국교회의 영적 회복과 부흥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잠깐 있을 이 세상의 안락함과 쾌락을 추구하다가 영원한 본향을 잃어버리는 자가 될까 늘 조심하며, 깨어 살아가는 이들을 통해서 이 일들이 가능하다.
지금 15억 명이 넘는 전 지구촌 무슬림들과 우리나라에 들어와 이웃으로 살아가는 30여만 명의 무슬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도 ‘세 사람이 갈 때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라는 ‘삼인행 필유아사’의 역사적 교훈을 올바로 깨닫고 변화 받은 이들을 통해서 가능하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복음기도신문]
김종일 | 장신대 신대원 졸업, 前 중동선교회(MET) 본부장, 現 FOT 선교회 대표. 국내 이슬람권 선교사 네트워크 회장, 저널 ‘전방개척선교(KJFM)’ 편집인, 아신대학교(ACTS) 중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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