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캐나다 로키산맥으로 떠난 가족 여행에서 우리는 많은 강과 시내를 보았다. 우리 아이들, 체트(4)와 아이라(2)는 틈만 나면 그 흐르는 물에 자갈과 돌멩이를 던지면서 놀았다. 남자아이들에게 이건 만국 공통의 본능이다. 나도 그 시절 그렇게 했다(솔직히 지금도 그러고 논다).
아이들이 돌멩이를 바위투성이 강바닥으로 던지는 걸 바라보면서, 나는 여행 내내 맴돌던 생각으로 되돌아갔다. 준비해 간 여행 음악 목록에 있던 노래 (Zaac Pick의) “Whitewater”도 일조한 생각이었다.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시간은 강물, 너무 빨리 움직여
우리 몸의 강둑 너머로
시간은 강물, 얼마나 깊은지 몰라
우리 발을 스쳐 지나가는 그 물이
시간은 정말이지 강과 같다. 결코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곧장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 흐름은 우리 모두를 데려간다. 우리가 좋아하든 말든.
강물 속 바위 더미
강물에 돌을 던지고 놀던 아이들 모습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우리는 돌이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다. 저항할 수 없는 거센 탁류에 휩쓸려 내려가는, 우리는 조약돌이다. 우리가 시간이라 부르는 거센 물줄기가 떼어내 빚고, 깎고 옮겨놓은 게 우리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시간이 충분히 흐른 뒤에 저 유체의 완력에 바스러지는 모든 돌처럼, 자갈이 되고 모래가 될 것이다.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전 3:20)
그렇지만 살아가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의 강물에서 잠시 가라앉는 돌처럼 그렇게 쉬어 가기도 한다. 가끔은, 흐름이 잦아들면, 우리는 한 자리에서 한 철을 보내기도 한다. 다른 돌들과 모둠(community)을 이루고, 강물의 완력이 우리를 깎아내는 만큼이나 우리끼리 서로 부대끼면서 그렇게 우리 모양새를 빚어나간다.
그러다가도 물줄기가 너무 빠르고 거세지기라도 하면 우리는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던 돌 더미에서 밀려나 급작스레 하류로 옮겨지기도 한다. 이러한 급류는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갑자기 밀어닥치기 마련이다. 우린 이걸 돌발 홍수라 부른다. 이럴 때면 우리는 한동안 같이 지낸 돌멩이 친구들에게 제대로 작별 인사를 나눌 기회도 갖지 못한다. 우리는 눈 깜박할 사이에 그 강의 다른 장소에, 새로운 암석에 우리 몸을 박고서 또 한때를 보낼 준비를 한다.
내가 이 은유[시간은 강이고, 우리는 조약돌이다]를 처음 생각한 것은 지난 여름이 시작될 무렵 체트를 유치원에서 집으로 데려오면서였다. 그날은 체트가 어린이집을 졸업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체트가 어린이집 친구들을, 약 9개월 동안 같은 시냇물에서 함께 지낸 사랑스런 조약돌들을 다시는 같은 바위 더미 모둠에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가을에 새 학기가 시작되면 그 친구들을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가혹하게 흐른다. 장소와 사람의 항상성(permanence)을 희구하는 인간의 갈망에 무심하게.
우리가 어떤 것/곳에 붙박여 있으면, 어김없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이 우리를 다른 것/곳으로 옮겨놓는다.
함께, 잠시
나는 그 늦여름이 되어서야 아타바스카, 보우, 블래버리… 못다 센 강과 개울들에 서서, 이 은유가 (가족 공동체를 포함한) 모든 공동체에 똑같이 적용된다는 걸 깨달았다. 카이라와 나는, 같은 시냇물에서 서로를 발견하고 그 강바닥 진흙에서 한 몸이 되어 지금까지 10년 동안(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앞으로 수십 년 더!) 함께하며 하나의 더 큰 바위 더미가 된 두 개의 돌과 같다. 그동안 우리는 작은 바위 셋을 우리 몸에서 떼어냈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휘감아 도는 강물 가운데서 우리의 작은 바위 공동체를 함께 유지해 가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것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걸 (모든 부모가 그렇듯이) 알고 있다. 언젠가 이 강은 이 작은 우리 조약돌들, 우리 아이들을 흩어놓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 아이들은 다른 돌들을 만나 또 다른 바위가 될 것이다. 오늘은 체트와 아리라가 강물에 돌멩이를 던지면서 유아기를 보내고 있다. 아마도 다음에는 우리 모두 캐나다에 있을 것인데, 그때는 이 아이들이 십대가 되어 있을 터이고, 더 묵직한 돌을 집어 들어 더 깊은 물에 던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곧 내 나이가 될 터이다. 돌멩이를 강물에 던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아버지가 될 터이다. 변함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이 근원의 순환은 계속될 것이다.
시간은 강, 점점 더 빨리 흐르지
필요한 걸 전부 가질 시간은 절대 없어
시간은 강물, 가라앉지 않으려면 헤엄쳐야 해
우릴 붙잡아 둘 닻은 없어
마침내, 아마도 80년 후, 예전에 맥크래켄 가족 바위 더미(McCracken Family Rock Pile)라 불렸던 5중주단은 굵은 모래, 가는 모래가 되어 흩어질 것이다. 강물의 흐름에 맞춰 함께 춤추며 흘러가기보다는 강바닥의 일부로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1,000년이 지나면 우리 후손 세대도 이 강을 따라 내려갈 것이다. 아마도 자기네가 떨어져나온 암석 조상을 모른 채, 그들도 그 강을 따라 흘러갈 것이다.
강 같은 평화
가차 없는 강, 그 강 어디에도 영원히 닻을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은 슬픈 생각이 아니다. 내가 강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신비한 기쁨을 느끼듯이(흐르는 물의 진면목과 아름다움에 본능적으로 끌리는 게 인간 아닌가?), 강에서 나의 위치는 체트가 강둑에서 흐르는 강물로 던진 돌만큼이나 잠정적이고 미약하다는 사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인다. 두 가지 중요한 이유로 나는 이러한 생각에 마음이 편하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가족과 친구라고 부르는 귀한 돌들과 함께하는 여행이 너무나 짧다는 생각에 가슴이 너무 아플 것이다.
하나. 나는 이 강이 고요하고 영원한 안식의 바다 어딘가에서, 고요의 바다, 영원한 안식에서 끝날 것임을 안다(히 4:1-11). 아마도 내가 알고 사랑했고 끝내 여정 중에 헤어졌던 돌들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를 그곳에 데려다주었고 때로는 겹치기도 했던 각자의 연속 드라마의 기억을 함께 나누게 될 것이다.
둘. 나는 강의 근원을 믿는다. 시간의 거센 흐름이 그저 우연이고 목적 없는 흐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힘에 맡긴다는 것은 절대로 위로가 되지 못할 것이다. 가망 없는 해안을 향해 필사의 헤엄을 치거나, 아니면 절망하여 가라앉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강에는 근원이 있고, 창조된 시작이 있으며, 그 여정에 목적이 있음을 안다.
이렇게 흐르는 강물이니, 여전히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나는 그 여정에 평온과 위안이 있음도 안다. 이것은 내가 목적지가 있는 길 위에 있음을 아는 평온이다. 이는 아내와 아이들, 내가 사랑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누구도 그 흐름을 막을 수 없다. 다만 우리가 그 근원을 믿고 목적지가 있음을 안다면, 우리는 그 흐름에, 우리가 알게 될 가장 잔잔한 대양으로의 여행에, 무한히 좋은 새 땅에 닿게 될 여정에 즐거이 나를 맡길 수 있을 터이다. [복음기도신문]
가차 없는 강, 그 강 어디에도 영원히 닻을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은 슬픈 생각이 아니다.
브랫 맥크레켄(Brett McCracken) | 미국 TGC 편집장. Southlands Church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으며, ‘Hipster Christianity: When Church and Cool Collide’를 비롯하여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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