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가을이었다. 나는 그때 총신을 졸업하고 농촌개척교회를 시무하고 있었다. 50호밖에 살지 않는 조용한 농촌에 교회를 시작했지만, 볼록으로 쌓은 20평 정도 크기의 조그마한 교회당을 짓다가 그만둔 교회였다. 교회당은 마룻바닥 없이 가마니를 깔고 몇 사람이 예배하고 있었다. 사택이 있기는 해도 한 칸 짜리로 거의 쓰러져가는 초가였다. 물론 전기도 없고, 램프에 경유를 넣어 불을 밝히던 시절이었고, 주민들은 찌들게 가난했었다. 교인이라야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고, 그래서 서울의 어느 후원자가 무쇠 종을 선물해서 산에 나무를 찍어 겨우 종탑을 세웠다. 동네 사람들은 교회에 관심도 없고, 더구나 시골 사람들의 신앙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 영화사 대표라는 분이 날 찾아와서, ‘우리 교회당과 우리 동네 전부를 영화 촬영지로 적절하다고 감독이 그러니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때 나는 아직 어렸고 이듬해 목사 안수를 받을 때였다. 나는 영화 내용에 ‘목사님과 공산당이 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는 말만 믿고 덜컥 허락을 하고 말았다. 우리 교회당과 마을 주변을 영화 세트장으로 점찍은 분은 당시 영화계의 거장 <임권택> 감독이라 했다. 이 영화를 감독할 때 그는 겨우 30세쯤 되는 청년 감독이었다. 나는 27세의 젊은 목회자였다. 나는 평생 영화인들과 만나는 것이 처음이었다. 그때 여기에 와서 촬영하신 분은, 한국 영화사에 길이 빛난 말 그대로 대 스타들이 나왔다. 즉 신영균, 남정임, 김동원, 허장강, 서영춘 등을 비롯해서 많은 조연들이 참석해서 만든 <바람 같은 사나이>란 작품이 되어 영화관에 상영되었다. 이것은 우리 마을과 우리 교회로는 크나큰 사건이었다. 시골 사람들은 당대의 연예계, 영화계의 거성들이 한꺼번에 와서 촬영장이 되어 버리니, 온 동네가 이들에게 식사를 만들어 주거나 빈방을 잠자리로 내어주면서 약간의 수입을 올렸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교회 쪽에서도 그냥 교회당을 몇 날 빌려주는 조건으로, 영화 장면에서 목사의 기도와 권고로 마을 깡패가 회개하고 그 사람이 반공 투사가 된다는 스토리로 전개된다고 하니 나는 수용을 한 것 뿐이다. 지금은 그런 것이 없지마는 옛날에는 영화사가 작품을 계속하려면 어느 정도의 반공(反共)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고 한다. 하여간 이 일로 말미암아 농촌 주민이 새로운 문화를 받게 되었고, 교회는 마을에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 사람들은 당시의 인기 스타의 촬영장면을 보려고 몰려들었고 동네가 떠들썩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연예인이란 말이 없었고, 연극, 노래, 음악, 영화에 종사하던 사람들을 싸잡아 모두 <딴따라>라고 부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중에 조연 배우인 아주 잘생긴 남자 배우가 있었다. 그때 내 기억으로는 하얀 양복 정장에 참 멋진 배우였다. 그는 잘 곳이 없어서 사택의 조그만 방에 함께 자게 되었다. 내생에 이런 미남 배우와 시골 오두막집에서 함께 자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가 잠들기 전에 내게 이런 고백을 했다. “목사님, 딴따라 일은 도저히 힘들어 못 해 먹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목사로서 아무 대답을 못했다. 그런데 들리는 말로는 후일 그 조연 배우는 연예계의 어려움과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안타까운 말이 들렸다. 그는 ‘이수련’이라는 미남 배우였다. 55년 전의 그의 이미지를 아직도 나는 지울 수가 없다. 영화인, 가수, 코미디언, 무용수, 음악가, 기악 하는 천재들이 모두가 인생을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성공하여 빛을 발할 뿐, 나머지는 가난과 스트레스로 평생 풀지 못한 한과 꿈을 이루지 못하고, 어둡게 살아가는 이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며칠 전 대한민국의 국민 MC, 영원한 딴따라 송해(宋海) 선생님이 영면했다. 그는 34년 동안 KBS 전국노래자랑의 사회자로서, 남녀노소 빈부귀천 따질 것 없이, 모든 이에게 웃음과 기쁨과 감격을 선사하다가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전철과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성실과 진실로 사람들을 대하는 모범적 삶을 살았다. 스스로를 나는 <딴따라>라고 말하고 그는 모든 것을 용해했다. 그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마음의 벽을 헐고, 그들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특이한 마술사이고, 재치와 겸손과 신파조의 노래를 같이 합창하던 송해 선생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지난 34년 동안 소용돌이치는 정국과 가난에 찌들어 희망을 잃고 방황하던 사람들에게 용기와 확신과 사랑을 전한 위대한 딴따라였다.
나는 목사로서 송해 선생을 생각하면서, 바울의 메시지인 고린도 전서 9:18~22의 말씀을 묵상해 보았다.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라고 했다.
송해 선생님은 70여 년의 연예생활 중에 자기를 낮추고 상대를 섬기는 삶을 살았으므로 그의 삶은 더욱 빛이 났다. 송해 선생님은 영원한 딴따라일 뿐 아니라, 우리들 가슴에 희망을 심어준 위대한 딴따라요 연예인이었다.
우리는 너무 거룩한 척, 너무 잘난 척, 너무나 아는 척하는 자가 되어 굳어져 버린 우리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 보았으면 한다. [복음기도신문]
정성구 박사 | 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40여년간 목회자, 설교자로 활동해왔으며, 최근 다양한 국내외 시사를 기독교 세계관으로 조명한 칼럼으로 시대를 깨우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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