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9:14~29)
전하고 싶은 소중한 메시지가 있을 때, 빨리 전하고 싶은 마음을 주님 안에서 정돈하지 않으면 죽을 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빨리 전하고 싶다는 나의 의지가 강할 때,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29절 말씀에 나오는 ‘이런 종류’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안다면 귀신의 역사도 선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도 외에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도와는 다른 의미입니다. 어떤 명령의 기도로 귀신을 쫓아낸다는 뜻도 아닙니다. 귀신을 나가게 하는 기도의 참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본문 말씀 바로 전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와 함께 변화산에 올라갔습니다. 세 명의 제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제로 봤습니다. 주님께서 모세, 엘리야와 말씀하시는 것을 봤습니다. 너무 좋아서 초막 셋을 짓고 살자고 하는데 하나는 주님을, 하나는 엘리야를, 하나는 모세를 위해 짓자고 합니다. 하늘의 영광을 보면 땅의 것들은 잊어버립니다. 땅에서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 의미를 부여했던 것들은 자연스럽게 소멸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 땅에 마음을 둔 것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한 아버지가 귀신 들린 아들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9명의 제자들이 달라붙어서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러자 왜 쫓아내지 못하느냐는 논쟁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기도하면 귀신이 나갈 것이라는 믿음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서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냐는 이야기도 있었을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는 그 상황을 보시고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말씀하십니다. 무리에게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하신 말씀은 이해하기 쉬운 말씀은 아닙니다. 믿음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보편적이지도 않습니다. 믿음은 굉장히 특별하고 예외적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내가 얼마나 참으리요 하시며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꾸짖으십니다.
우리 교회에 신학생이 9명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기에 마음이 더 갑니다. 신학생들을 만나 마음이 흐트러졌을 때 어떻게 즉각 돌이키는지, 마음에 하나님이 담겼을 때 존재가 어떻게 변하는지 확인시켜 주고 싶었습니다. 제가 흠이 많고 부족한 것이 많지만 절대 놓을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회심과 거듭남’이라고 이야기해줬습니다. 회심과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아들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리하게 국면을 해석하고 욕구를 채우려고 무언가 수를 씁니다.
회심과 거듭남이 회중에게 일어나야 합니다. 목회를 잘해서 교회에 성도가 많아지더라도 부르심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회심하고 거듭나야 하나님의 부르심을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하나님, 저를 이 직장으로 부르셨나요?” 하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부르셨다는 뜻은 부르신 분의 음성을 먼저 듣는 것입니다. 부르신 분의 말씀을 분별하는 귀가 있어 말씀하시는 분의 음성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회심과 거듭남이 없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일상적으로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부르심은 세상으로부터 주님에게로 부르신 것입니다.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가치에서 주님의 가치로 바뀝니다. 반드시 그렇게 바뀝니다. 예수님에게로, 예수님의 사람으로, 예수님 안으로, 예수님의 가치로 바뀐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에게로 부르심 받은 사람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을 따라갑니다.
저도 예수님에게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목회 현장으로 가시기에 목회 현장으로 따라온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예수님에게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확인되지 않으면, ‘내가 이 직장을, 이 학교를 빨리 그만둬야겠다’고 말하며 주변을 피곤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직업으로, 어떤 전문직으로 부르시는지 묻는 것은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주님께 점령되어 주님을 따라갑니다. 부르심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보이지 않는 상태가 절망이요 암흑이요 죽음의 상태라는 것을 압니다.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단절로부터 회복되어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우리를 통해 이루어가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 무엇인지 삶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그런 삶이 실제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막 9:17)
귀신이 말을 못하게 합니다. 귀신 들리면 말을 못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막 9:25)
예수님께서는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을 꾸짖으시며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고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된 것입니다. 몸이 되었다면 머리 되신 예수님의 생각이 들립니다. 머리 되신 예수님의 생각이 흘러들어와 우리 삶을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여 소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귀신의 책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 귀신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이런 종류’는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를 만들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서 말하지도 못하게 하고 듣지도 못하게 합니다. 귀신에게 잡히면 하나님과 단절됩니다.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막 9:21)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느냐고 물으시니 어릴 때부터라고 대답합니다. ‘우물 안 스쿨’(유치원과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학교)을 곧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나라 대학의 크리스천 인구가 1퍼센트라고 합니다. 3퍼센트 미만이 되면 미전도 종족이라고 부르고, 국제선교 단체에서 공식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합니다. 우리나라 대학이 미전도종족이 됐습니다. 대학 교정에서 믿음의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인본주의 교육의 결과입니다. 미션스쿨이라는 고등학교에서는 한 반에 한 명 정도가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태원의 클럽에는 특정한 날에 수천 명의 젊은이가 모인다고 합니다. 20대가 특별히 많고 전문직도 많다고 합니다. 20대는 죄가 문화인 것 같습니다. 죄에 묶여 헤어나오지 못하면서 그 죄를 따라갈 때는 통증이라도 있지만, 어떤 문화가 되어버리면 통증도 별로 없습니다. 왜 우리를 향해서 그러느냐고 오히려 반문합니다. 태국의 동성애자는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양성애자보다 더 인격적이고 더 이해를 잘하고 더 선을 잘 베푼다는 우월한 인식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 세대에 대해 아파하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이 대항하는 일은 반드시 생겨납니다. 우리는 일희일비하지 않고 빛을 따라가면 됩니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막 9: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다고 합니다. 귀신에게 잡히면 불과 물에 던진 바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귀신에게 붙잡힌 바 되어 불과 물로 던져진 경험이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귀신은 하나님과 우리를 단절시키려고 불과 물에 던집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 놓인 내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임에도 믿음의 사람이라고 우기면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불에 던져지면 타게 되고 뜨겁습니다. 인간은 에덴에서 하나님과 단절되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범죄를 저지른다는 의도가 아니라 발전과 성장을 염두에 두고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도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행복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행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능성도 있으니 노력합니다. 가끔 그 가능성이 꺾이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우리 삶을 보면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습니다. 실패가 많으니 속이 타는 것입니다. 귀신이 불에 던졌다는 뜻은 우리를 염려 가운데 밀어 넣어 속이 타게 한다는 뜻입니다. 희망과 행복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염려가 생기고 속은 타게 됩니다. “할 수 있다! 될 수 있다!”를 계속 외치지만 속은 타고 헤매게 되면서 하나님께는 나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과는 단절된 것입니다.
물에 빠지면 또 어떻게 됩니까? 물가나 강가에서 잠시 쉬는 것은 좋을지 몰라도 계속 거기에 있으라고 하면 우울증 환자가 많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의 속성 때문입니다. 하나의 문제, 하나의 생각에 깊이 몰입하게 됩니다. 해결책은 없지만 우울에 빠지도록 그 문제를 골똘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물에 던져졌다는 의미도 하나님과 단절됐다는 뜻입니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막 9:18 상)
귀신에게 잡히면 거꾸러집니다. 좌절하고 낙망하게 됩니다. 희망도 없는 죽을 길로 들어서게 됐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되면 그렇게 됩니다. 또 귀신에게 잡히면 이를 갑니다. 교회 개척할 때 생각하면 재미있습니다. 대부분 성도들이 복수의 이를 갈면서 왔습니다. 복수할 것이라고, 앙갚음 해줄 것이라고, 두고 보라며 이를 갑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사탄에게 잡히면 그렇게 됩니다. 또 귀신에게 잡히면 파리해집니다. 이 말씀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저는 공격당하면 화가 아니라 창피해서 수치심부터 느낍니다.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숨어버립니다. 심할 때는 일주일 동안 사람을 만나지 못합니다. 겁도 많고 내향적이라 수치심을 심하게 느끼면 동굴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말을 안 하는 것이 더 편하게 되고, 속은 겁을 먹고 파리해집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귀신에 잡히면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내가 계획하고, 실행하고, 성공하고, 보람을 느껴야 삽니다. 그러나 ‘성공’이라는 무지개는 봤는데 그것을 잡지는 못하는 것처럼, 나의 계획이 잘 실행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염려에 빠져 우울해지고 낙망하고 이를 갈고 수치심에 사로잡힙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다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시 소통이 되어야만 귀신에 잡힌 그 상태로부터 헤어나올 수 있습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막 6:7)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막 6:12~1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많은 귀신을 쫓아냈고 많은 병자들을 고쳤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귀신을 내어쫓지 못했습니다. 과거의 기억으로 사역하려고 했지, 지금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지 못한 관록과 기억과 경험으로 하는 사역은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점점 교만해집니다. 때로는 그 교만을 담대함으로 착각합니다. 담대함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사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나로부터 멀어지면 괴로워합니다. 아닙니다. 경험도 아니고 기억도 아니고 관록은 더더욱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과 연결되었느냐가 중요합니다.
제가 귀신을 내어쫓는 축사 사역과 병을 고치는 치유 사역을 많이 했습니다. 항상 귀신이 떠나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항상 치유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 때도 많았습니다. 왜 어떤 날은 귀신이 떠나가는데 어떤 날에는 그렇지 않을까요? 치유의 은사를 받으신 사역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 사람이라도 고쳐지면 좋은 일이니 계속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가 보다 했는데 예수님을 정말 만나니까 그것이 방점이 아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떠나갈지어다!” 하는 명령 기도로 귀신이 떠나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치유가 일어났던 까닭은 그때 주님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6장에서 귀신이 떠나간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권능을 받고 파송되었습니다. 모든 사역을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행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과 함께한 사역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9장에서 제자들이 했던 축사 기도는 귀신이 떠나갔던 마가복음 6장의 경험과 기억으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라는 말씀입니다. 귀신이 떠나갔던 경험과 기억 때문에 지금 하나님과 연결된 믿음이 있다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믿음의 경험이 많은 분들이 더욱더 경계해야 합니다. 이 함정에 자주 빠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늘 ‘지금’입니다.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8~29)
제자들이 조용히 주님께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주님께서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과 연결되려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기도입니다. 얼마 전 하나님께서 “너는 왜 골방으로 더이상 들어가지 않느냐?”고 저를 책망하셨습니다. 기도는 자발적으로 고독한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귀신에게 명령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나의 마음이 먼저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탄원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재정의 문제가 생길 때 주님 앞에 빨리 나와서 해결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건강이 나빠지면 빨리 가서 기도하라고 말하는 것이 좋은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문제가 우리 마음에 남아있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종류의 문제로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물어보십니다. 넘어지니까 화가 나고, 속도 타게 되는 것은 귀신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독한 골방으로 들어가 “내 마음이 주님께 가 있기를 원합니다!” 기도하며, 마음에 붙어 있는 세상의 것을 끊어내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오직 주님만 계셔야 한다는 기도가 실제 힘입니다. 마음에 붙어 있는 욕구와 사람들의 평가를 끊어내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타락한 시대입니다. 우리 존재를 깨달아야 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하여도 울지 않는다(마 11:17, 눅 7:32)는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공간의 개념도 찢어집니다. 어느 곳에서도 다 보게 됩니다. 불교 용어로 야단법석, 얼마나 시끄럽겠습니까? 그런 때에도 지붕에 있는 사람은 세간살이 가지러 집으로 내려갑니다. 주님을 부르며 춤을 춰도 모자랄 판에 보물도 아니고 세간살이를 가지러 내려갑니다.
천사들이 롯의 처를 소돔에서 강권하여 공간 이동시킵니다. 뒤돌아보면 죽는다고 해도 롯의 처는 뒤를 돌아봅니다. 죽는다고 했는데도 뒤를 돌아보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입니다. 뒤돌아보지 않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자아가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살아있으면 예수님 오실 때 기뻐 감사하기보다는 뒤돌아보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 때 유일한 소원은 노예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노예란 억압과 핍박의 상징입니다. 그런 백성들이 드디어 해방되어서 광야로 갔습니다. 그런데 1주일 만에 깨닫습니다. 그들에게는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속이 문제였습니다. 애굽에서 먹던 마늘과 부추와 파가 그립다고 말합니다. 노예라는 환경에서 벗어나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노예에서 벗어나보니 속이 문제라는 것을 보기 시작합니다. 실제 적은 바깥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는 것을 보기 시작합니다. 자아의 문제라는 것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과거의 경험을 믿음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좋은 대학 가기 위해 모든 것을 다 쏟아붓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대학에 들어가면 타락해버립니다. 결혼하고 나서는 좋은 집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며 거기에 마음을 다 씁니다. 목사님들도 누가 교회 하나 새로 지으면 행복하겠다고 축하 인사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단절을 일으키는 자아가 살아있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독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에 주님만 남아있기를 원한다고 기도하고, 그 믿음의 실제가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에필로그
믿음의 사람은 주님을 향한 갈망이 있습니다. 주님 만나고 싶어 합니다. 주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말씀하시면 따르겠다는 다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는 아닙니다. 주님을 찾아 그토록 헤맬 때에도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죽을 자리 알려주시면 죽지는 못해도 죽은 척은 했습니다. 절제하고 사랑하고 노력하면 될까 해서 죽을 힘을 다 써봤습니다. 목사니까 하루에 세 시간씩은 기도해야지, 하고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언제나 주님과 연결된 것인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죽어야 삽니다!” 하니까 교회에서 ‘죽는’ 열풍이 일어납니다. 그런 열풍이 일어날 때, 그렇게 자아가 죽지 못하는 분들을 보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나는 죽었는데, 그렇지 못한 남편과 아내와 자녀들을 보면 화가 납니다. 그런 것을 보면 한심해서 또 화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연결되어야 산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연결되는 곳은 오직 한 곳뿐이라는 사실도 명심하셔야 합니다. 오직 십자가에서만 주님과 연결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는 믿음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허물을 보고 너무 정죄하지 마십시오! 새로운 피조물이 된 거듭남의 역사가 있다면 그 믿음이 나를 이끌어가고 새롭게 하는 것을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고독한 방이 있습니다. 기도의 자리로 꼭 가셔야 합니다. 세상을 끊어내고 오직 마음에 주님만 남아있게 하는 고독한 방으로 가서 주님이 주시는 새 힘이 무엇인지 꼭 경험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런 종류를 처리해야 한단다. 알겠지? 기도해야 한단다. 하나님과 연결되는 기도가 필요하단다. 세상을 끊고 주님 앞에 나오는 시간, 그 고독한 방이 있어야 한단다.”
말씀하시는 주님께 아멘으로 화답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하시옵소서.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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