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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선 칼럼] 복음은 천국보험을 드는 것이 아니다

사진: Luca R on unsplash

공군 목사 이야기(12)

1. 그런 놈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기독 장교회 성경공부

군산 비행단 기독 장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할 때였다. 비행대대장이신 중령 김 집사님에게 내가 물었다. 만일 당신의 상급자인 대령 조종사가 당신 대대의 부하인 편대장 소령의 아내를 간음하고 그 범죄를 감추기 위해 비행 전대를 이끌고 하늘로 올라가 적 전투기와 공중전을 하는데 교묘하게 그 소령의 편대를 적 전투기들에 포위되게 하여 마침내 격추되어 사망케 했다면 당신은 비록 중령이지만 그 대령 전대장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중령 집사님은 심각해졌다. 그리고 한 마디 했다. “그런 놈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 듯이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아로 하여금 적을 공격케 하고 다른 부대는 후퇴하여 우리아의 부대만 전사토록 한 성경의 이야기를 공군에 맞춰 각색한 것이다.

다윗도 군(軍) 출신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윗이 죄를 범할 때는 왕이었지만 그는 군인 출신이다. 우리아도 군인이다. 다윗은 자신도 군인이기에 군인이 어떤 정신의 사람인지를 잘 안다. 다윗은 자신의 죄악을 감추기 위해 우리아에게 휴가를 주었다. 그러나 우리아는 아내와 동침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왕과 왕의 군대가 적과 싸우고 있는데 자신만 편안히 집에서 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충성이다. 절대 충성이다. 다윗은 이런 충성스러운 군인을 죽였다. 그것도 정말 간교하고 사악하게.

그 상황이 공군으로 따지자면 대령 전대장이 소령 편대장의 젊고 예쁜 아내를 간음하고 공중전을 핑계 삼아 편대장을 죽인 것이다. 중령 대대장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 그 대령 전대장을 용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중령 대대장의 대답은 제목으로 말했듯이 “그런 놈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였다. 사람들은 성경의 말씀을 다윗의 입장에 서서 어떻게 보면 쉽게 말하고 설명하는 것 같다. 그런데 다윗도 군인이고 그 상황이 군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로 보고 현실로 가져오면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보게 된다. 군인으로서 다윗은 군인들에게 용서되지 않는다. 다윗이 대령 비행 전대장이었다면 그는 중령 대대장의 권총에 의하여 즉결 처분되었을 수 있다. 혹은 비행 전대장이 먼저 잘못했다고 고백한다면 비행 대대장은 “왜 고백을 하냐? 그것이 고백한다고 해결될 문제냐? 그렇게 해서 용서받고 그 더러운 생명을 살고 싶다는 거냐? 그 죄는 용서될 수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그나마 도리 아니냐?” 하는 말을 했을 수 있다. 나는 다윗의 이야기를 그때 군인이란 환경에 맞추어 상황을 바꾸어 보았는데 내가 그렇게 말해 놓고도 군인의 입장에서 볼 때에 다윗의 죄는 정말 용서될 수 없는 것임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2. 내 죄도 용서될 수 있습니까?

너무나 끔찍한 죄

공군중앙교회의 교인들 가운데 몇몇 분들은 주변에 있는 보라매병원에 심방전도를 다녔다. 병실을 찾아가 환자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여 집사 한 분이 오더니 내게 심각하게 물었다. 보라매병원에서 전도를 하는 데 어느 환자가 ‘내 죄도 용서될 수 있습니까? 하더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신은 외국에 파병된 군인이었단다. 그런데 거기서 못쓸 짓을 많이 저질렀는데 외국 여성을 죽이는 등 차마 인간으로 못할 짓을 했단다. 후에 한국에 돌아왔지만 자신이 저지른 악행이 늘 생각에 남아 광기(狂氣)를 일으켰고, 참다 못한 아내와 자식들은 결국 자신을 버려두고 외국으로 떠났단다. 자신만 남겨져 살다가 엉덩이 골반 뼈가 썩어가는 무서운 병에 걸려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했다.

무섭고 떨린 죄

여 집사는 경악했다. 어떤 죄도 고백하면 용서받는다는 성경말씀을 전할 수 없었단다. 그래서 나에게 와 그 상황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 여 집사님에게 뭐라고 말을 해주어야 하나? 우리는 죄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너무 가볍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 같다. 그야말로 말로만 하는 것 같다. 이와 같이 정말 실존적인 죄의 문제에 부딪혔을 때에 그 때도 우리의 머리와 가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주님의 은혜가 말해지던가? 그 죄가 너무나 무섭고 떨려서 그런 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은혜가 임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아니 임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의 머리는 생각한다.

3. 해답

주님의 이름

다시 앞서 말하던 다윗을 보자. 다윗은 양심으로 보자면 자신의 죄악을 용서해 달라고 주님께 말할 수 없다. 비행대대장 집사님이 말했듯이 그냥 죽이든 혹은 죽어야 한다. 잘못했다고 용서해 달라고 하는 자체가 양심을 떠난 가증스런 말과 행동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나온다. 시편 25편 11절을 보자.

(시 25:11, 개역)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시 25:11, NKJV) For Your name’s sake, O LORD, Pardon my iniquity, for it is great.
耶和华阿,求你因你的名赦免我的罪,因为我的罪重大。

정확하지 않은 회개(悔改)의 방법

죄악에 대한 깨달음은 인간의 양심이나 이성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거기에 근원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도덕적 윤리적 설교라는 것이 이런 단어를 사용하여 죄의 각성 작용이 일어나고 회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 짚은 것이다. 간결하게 말하면 죄악에 대한 깨달음은 주님의 은혜에서 시작한다. 주님의 은혜가 임해야 죽은 내가 산다. 정확하게 말해서 주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은 사람이란 죽어있는 것이다. 양심이, 이성이, 감성이 다 작용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죄로 인해서 죽었다

주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고 했다. NKJV에서는 ‘die surely’ 라고 했다. ‘분명히, 확실하게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생각해보자. 죽었는데 어디에 양심이 있고 이성이 있고 감성이 있나? 그런 것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님의 은혜가 없는데 마치 작동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양심, 이성, 감성은 죄악을 깨달았으니까 돌이키고 잘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것은 후회(後悔)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후회는 참된 돌이킴과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반복되는 아픔을 되씹을 뿐이다. 오직 주님의 은혜만이 우리의 죄악을 바로 보게 하고 양심과 이성과 마음을 회복시킨다.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이름의 관계

자 이제 이 상황을 정확히 보자. 주님의 은혜라는 것이 시편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표현된다. 다윗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돌이킨다고 하면 그것은 자살해야 한다. 잘못했다. 용서해달라는 말 자체가 가증하게 여겨진다. 그런데 다윗은 주님께 용서를 청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말했지만 그는 그 자신의 양심에 기대어 한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에 근거하여 용서를 청했다.

오늘 날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으면 한다. 죄악을 범했을 때에 그것을 깨닫고 용서를 구하고 회개하는 것은 인간의 양심이나 이성이나 마음이나 의지가 하는 작용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한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도구로 양심, 이성, 감성, 마음, 의지 등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근본 작용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고 그 표현이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내가 회개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회개케 하신다는 사실이다.

보라매 병원 환자의 결국(結局)

보라매병원의 그 끔찍한 죄악을 저지른 사람에게로 돌아가자. ‘내 죄도 용서될 수 있습니까?’ 나의 양심과 이성과 마음과 의지를 보고 있으면 그 죄는 용서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가 임하면 가능하다. 내가 무릎 꿇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무릎 꿇게 함이 일어나야 한다. 글을 쓰며 그때를 생각한다. 그 엉덩이 골반 뼈가 썩어가는 사람은 얼마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벌을 내리셨다. 그에게 주님의 은혜가 임했을까? 그는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용서를 청할 수 있었을까? 그가 주님의 이름을 의지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감히 용서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안다는 것은 곧 주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했다는 것을 말한다.

4. 기독교 신앙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고 사람을 아는 지식

로마 가톨릭의 엄청난 잘못을 알고 목숨을 걸고 싸운 종교개혁자 칼뱅이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알리기 위하여 평생 동안 쓴 책이 [기독교 강요](基督敎綱要: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이다. 나는 머리가 그리 총명하지 못해 몇 번 읽었는데 아직 다 기억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기독교 강요의 처음 부분이다. 칼뱅은 기독교라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그 다음에 인간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이것이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보았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

무속 종교에서는 ‘액땜’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이 살다가 재수 없는 일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곳을 가면 죽을 수도 있고 사업이 실패할 수도 있다고 하며 또 어떤 나이가 되면 큰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다고 하며 ‘부적’(符籍)을 사게 한다. 혹은 ‘굿판’을 벌리기도 한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세상 살면서 재수 없는 일을 피해가라는 부적을 나누어주는 일이 아니다. 복음은 인간이 죽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시킨다. ‘죄가 얼마나 더럽고 고통스럽고 치명적인가?’를 사람의 깊은 내면으로부터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복음을 부적과 같은 것으로 알고 산다. 마치 재수 없는 일을 피하기 위해 액땜 하듯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있다. 현대 사회의 개념으로 보면 보험 들어놓는 것이다. 만일의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 보험을 들 듯이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하니까 사후 세계를 위한 보험으로 보험을 들듯이 복음을 산 것이다. 만일 이런 개념이라면 이것이 신앙이냐? 이 정도의 행위를 기독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인간적 측면으로 표현하면 기독교는 목숨을 거는 것이다. 목숨을 걸어 영생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측면으로 말하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는 치열한 것이다. 그것을 ‘부적’과 ‘보험’처럼 생각하는가? 그 가벼움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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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선 선교사 | GMS(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서 사역 중 추방된 이후 인터넷을 활용한 중국 선교를 계속 감당하고 있으며 세계선교신학원에서 신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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