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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혁명적인 성경 읽기 노하우

ⓒ unsplash

초대 교부 시절부터 종교 개혁 시대까지, 기독교 지도자는 사실상 성경을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 속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었다

교회 교부들이 남긴 길거나 짧은 설교를 읽을 때면 겸손해진다. 어거스틴(Augustine)의 ‘시편 주해’ 중에서 아무 부분이나 펼치고 읽어보라. 시편에서 시작해서 창세기, 출애굽기, 그리고 계시록으로, 또 복음서에서 시작해서 계시록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어거스틴이 펼쳐내는 놀라운 미로 여행을 경험할 것이다.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8세기 영국의 화가이자 시인)가 모든 모래 알갱이에서 세상을 보는 눈을 훈련했다면, 어거스틴은 성경 속 모든 구절에서 만화경처럼 신비한 그림을 그려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어거스틴의 글을 읽을 때 겸손해지는 것은 그가 반드시 모든 것을 다 올바르게 알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종종 그가 만든 뒤틀림과 굴곡 중 일부는 출구가 없는 골목으로 이어지기도 했고, 천하의 어거스틴도 후퇴를 할 때도 있었다. 그의 글을 읽을 때 겸손해지는 이유는 어거스틴은 우리가 지금 성경을 읽을 때 의지하는 갖가지 수단과 도구 없이 성경 전체를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 관련 소프트웨어와 검색 엔진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손에는 그 흔한 관주 성경도 없었다. 초대 교부 시절부터 종교 개혁 시대까지, 기독교 지도자는 사실상 성경을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 속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었다. 

그런 수준의 성경 지식을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마도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비슷하게나마 흉내를 낼 수는 있지 않을까? 만약에 우리가 다음 네 가지 교훈을 지킨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1. 본문을 신뢰하라

내가 진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저자를 신뢰하라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내가 이 글에서 하는 어떤 말도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본문을 신뢰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 필요한 구절이고, 또 모든 것에는 다 의미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성령님은 단 한 번의 호흡도 낭비하지 않았다. 성경 속에 우연히 끼어들어 온 구절은 없다. 우리는 알고 있다. 아브라함이 318명의 장병을 데리고 있었던 것에도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또한 성령님은 환자가 베데스다 연못 옆에서 38년간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길 원한다. 153마리의 물고기가 단지 현지 상황의 결과일까? 아니다, 이것은 다 주님 말씀의 일부다. 

만약에 누가 왜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흘간 있었냐고 묻거든 그냥 “그거야 뭐 나흘간 있었으니까 그런 거지”라고 대답하지 말라. 그럼 왜 나흘일까? 당신이 보기에 성경 저자가 이상해 보이는 구절을 사용한 경우, 그냥 엉터리 학자들처럼 “그것은 고대 히브리 관용구야”라는 식으로 쉽게 결론내리지 말라. 그 표현이 뭔가 중요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기대하라. 

본문을 신뢰한다는 것은 또한 일관성을 기대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고백할 게 있다. 나는 요한계시록에 관한 많은 주석을 볼 때마다 화가 난다. 몇 장을 읽고는 이제 좀 내용이 이해되어 속도를 내려고 할 때면, 사도 요한은 주변의 다른 장들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또 다른 ‘삽입’ 내지 ‘이탈 또는 후퇴’로 본문을 채운다고 주석은 설명한다. 신령한 저자를 괴롭히지 말고 잠시만이라도 좀 가만히 놔두라. 왜 사도 요한이 그 책을 그렇게 힘든 방식으로 구성했을까? 결국 마지막 순간에 다다르면 브레이크를 밟을텐데 뭐하러 그 전에 속도를 내는 이상한 전개 방식을 택했을까? 인간인 저자를 조금만 더 믿도록 하자. 그가 그렇게 쓴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다. 무엇보다 궁극적 저자인 하나님을 믿자. 하나님은 수십억 개의 인류 역사 속 다양한 주제를 조화시킬 수 있으며, 당연히 일관된 내용의 책을 쓸 수 있다.

2. 지름길은 없다

여러 해에 걸쳐 성경 해석학을 가르쳤을 때, 나는 종종 로버트 펜 워렌(Robert Penn Warren, 20세기 초미국의 평론가·소설가·시인)이 시에 대해서 했던 논평을 다음처럼 풀어서 말하곤 했다. 시를 가장 자연스럽고 잘 이해하는 것은 처음 읽었을 때가 아니다. 열 번째 읽을 때도 아니고 쉰 번째 읽을 때도 아니다. 바로 백 번째 읽을 때다. 백 번째 읽을 때 우리는 비로소 뒤를 보면서도 기억하지만 ‘앞을 향해서도 기억(remember forward)’하게 된다. 시 전체가 비로소 한 줄 한 줄마다 우리와 함께 있게 된다. 

워렌의 주장은 요즘 문화가 길러내는 환경을 역행하는 발상이다. 우리는 즉각성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고 그렇기에 가장 처음 노출되었을 때 가장 신선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워렌이 맞다. 시를 읽을 때나 성경 한 권 또는 성경 전체를 읽을 때, 지름길은 없다. 읽고, 또 읽고 또 읽는 길 밖에는 없다. 그래서 성경 전체가 구절 하나 하나와 함께 당신 곁에 머물 때까지 읽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야 비로소 본문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성경 주석을 쓸 때, 나는 성경을 최대한 많이 읽고 또 읽었다. 내가 요한계시록 주석에 매달린 칠 년 동안 하루에 세 장씩 읽으면서 대충 한 주마다 요한계시록을 한 번씩 다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요한계시록의 각각의 구절에도 심혈을 기울였지만, 때때로 가장 신선한 영감은 계시록 전체를 읽고 또 읽는 중에 떠올랐다.  

3. 당신보다 뛰어난 가상의 독자를 찾으라

내 막내아들은 작곡가다. 우리는 종종 음악을 함께 듣는다. 그가 음악을 듣다가 멈추고는 이렇게 물을 때가 있다. “아빠, 저거 지금 들었어요? 지금 막 피아노 소리가 난 거 말이에요? 조가 바뀌는 거 들었어요? 리듬이 복잡해지는 거 알아챘어요?” 그러면 나는 멍한 얼굴로 이렇게 말할 뿐이다. “아니, 난 아무 것도 안 들려.”

물론 내 아들이 망상에 빠져서 있지도 않은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짜는 더 단순하다. 조금 겸손하게 말하면, 그의 귀가 나보다 낫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타고난 재능 때문일 수도 있지만, 또 계속 쉬지 않고 노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내가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다. 

우리는 이런 식의 불평등을 굳이 성경 읽기에까지 적용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우리 개신교도는 성경의 명쾌함과 더불어 모든 믿는 자가 다 대제사장임을 믿는다. 우리는 성경을 도서관 책장 사슬에 채우지 않는다. 누구나 다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음을 안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성령의 은사 때문에 또는 긴 훈련 때문에 다른 이보다 성경을 더 잘 읽는다. 다른 사람이 그냥 넘긴 것을 잡아내는 사람이 있다. 훌륭한 독자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내용을 연결시킨다. 장식용 벽걸이 천에서 패턴을 읽어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패턴은 고사하고 그냥 실의 형태만 보고 있을 뿐이다. 

성인이 된 내게 제임스 조던(James B. Jordan)은 변함없는 스승이다. 나는 수십 년간 그의 메시지를 들었고 또 그와 함께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럼에도 그는 거의 언제나 내가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을 한다. 그는 구절과 구절 사이에서 튀는 메아리를 찾아낼 정도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 때때로 ‘A’를 이야기하던 그는 갑자기 아무런 설명도 없이 ‘Z’로 튀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회의적인 생각에 인상을 찌푸린다. 그런데 오 년 정도가 지나고 나면, 나는 비로소 그가 건너뛰었다고 생각한 B부터 Y 사이를 채우게 되고, 그가 옳았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내가 그나마 지난 수 년에 걸쳐서 성경을 읽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은 대부분 내가 그를 따라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그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러고 싶지 않다면, 당신만의 제임스를 찾으면 된다. 당신에게 자극을 주고 기쁨을 주는 방식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누군가를 찾아내라. 당신의 가슴에 불을 붙이는 이를 찾도록 하라. 잘 들으라 그리고 흉내내라. 당신이 성경을 읽을 때, 지금 그가 곁에 서서 행여 당신이 놓치고 있는 것들을 가리키면서 인도하고 있다고 상상하라. 

4. 말씀이 차고 넘치는 의식을 치르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라

근대 이전에 살았던 성경 교사들은 우리보다 이로운 점이 있었다. 우리는 성경 소프트웨어, 인터넷 그리고 차고 넘치는 책을 갖고 있다. 그들에게는 대신 의식(liturgy)이 있었다. 중세 수도사들은 경전에 둘러싸여 일하면서 성경 텍스트를 복사하고 공부했다. 그들은 또한 매주 시편 전체를 암송했고 기도 시간에도 상당량의 말씀을 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눈을 통해 그들의 영혼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 그들의 귀에도 있었고, 또 그들은 그 말씀을 입으로 맛볼 수도 있었다. 

슬프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에서 이런 식의 경험을 재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교회 이름에 ‘말씀’을 넣은 많은 교회가 정작 예배 중에는 말씀을 경시한다. 찬송가에도 말씀은 아주 조금 묻어있는 정도다. 목회자는 설교를 위해 몇 구절 읽는 것이 전부고 그것 외에 예배 중에 말씀이 들리는 것은 거의 없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전통적인 의식을 집례하는 교회가 성경을 믿는 복음주의 교회들보다 훨씬 더 말씀에 깊이 몰입한다. 

만약에 복음주의자들이 교회 교부들이 누렸던 깊이를 따라하고 싶다면, 그 시작은 루터교 또는 성공회 예배처럼 예배가 성경적으로 말씀에 깊이 빠지도록 하는 것이다.  

말씀은 지금도 선포하고 있다

당신이 목사라면, 예배 속에 말씀을 더 많이 포함시켜라. 목사가 아니라면, 말씀에 의지해서 하루하루를 살 수 있도록, 말씀을 더 많이 공급해달라고 크게 외쳐라.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말씀을 읽고 읽고 또 읽어라. 그리고 모든 구절에는 다 이유가 있음을 기대하라. 멘토를 찾고 그의 눈을 통해서 더 많이 배우도록 노력하라. 

이 세상을 존재하도록 한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당신에게 지금도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 [복음기도신문]

읽고, 또 읽고 또 읽는 길 밖에는 없다. 그래서 성경 전체가 구절 하나 하나와 함께 당신 곁에 머물 때까지 읽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본문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피터 레이하트 J. Peter J. Leithart | 앨라배마주 버밍엄에 있는 Theopolis Institute의 대표, 역대상하 주석을 저술.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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