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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성경 권위의 효과성이 믿음의 분수령이다

▲ 사진 : Pixabay

“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 진리고 무엇이 옳은가에 관한 모든 주장에 관해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권위를 갖는다. 성경에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문제들과 관련해서 무엇이 진리고 옳은가의 여부는,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기준에 근거해서 판단한다 ”

모든 세대를 가리지 않고 분수령이 되는 이슈는 성경과 성경이 드러내는 실재에 관한 효과적인 권위의 문제다.

왜 나는 그냥 “모든 세대를 가리지 않고 분수령이 되는 이슈는 성경과 성경이 드러내는 실재에 관한 권위의 문제다”라고 말하지 않을까? 단어 사용이 조금 미숙할 수도 있다. 분수령이라는 단어도 설명이 필요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모든 빗물과 눈이 녹은 물은 협곡을 통해 거칠게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물은 흘러가며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물이 흘러들어 가는 목적지인 바다는 한참 전 상류에서, 그러니까 분수령에서 이미 결정된다.

분수령이 되는 이슈도 이와 마찬가지다. 인간의 지성과 마음이 분수령이 되는 이슈를 만날 때면 생각과 느낌이 이리저리 달라지는 모호한 변화들을 겪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미 정해진, 이 바다 아니면 저 바다라는 목적지를 향하게 된다.

그렇다고 모든 이슈가 다 분수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주제에 관해서는 얼마든지 다른 의견을 가지면서도 서로 간에 멀어지지 않을 수 있다. 다른 의견을 가졌다는 사실 때문에 항상 서로 간에 점점 더 멀어져서 아예 다른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수령이 되는 이슈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하고 또 결정적이며 게다가 워낙 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비록 흐르는 물의 주변 모양이야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강은 전혀 다른 경로로 흐르게 된다.

‘성경의 권위’

다음으로 명확하게 해야 할 용어는 ‘성경의 권위’다. Desiring God은 성경의 권위를 우리의 신앙 고백(Affirmation of Faith)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명시했다.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 진리고 무엇이 옳은가에 관한 모든 주장에 관해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권위를 갖는다. 성경에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문제들과 관련해서 무엇이 진리고 옳은가의 여부는,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기준에 근거해서 판단한다.

우리가 이런 확신을 갖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구약과 신약이라는 66권이 책으로 구성된 성경은 완벽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구두로 영감을 받고, 원전에 비추어서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간단히 말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그 속에 있는 모든 가르침이 옳으며, 성경의 모든 명령은 다 순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만이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최종 권위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구절을 통해서 그 점을 스스로 증거하는 성경을 믿는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만들어졌다(딤후 3:16).

어떤 예언도 사람의 뜻에 의하지 않았고, 오직 성령에 감동을 받았을 때에만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벧후 1:21).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우리는 이 말씀을 전한다(고전 2:13).

하늘과 땅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마 24:35).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전하다(잠 30:5).

말씀은 폐할 수 없다(요 10:35).

하나님이 인간의 눈을 열어 볼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면, 성경이 말하는 이런 주장의 진실 여부에 대한 증거는 평범한 사람들이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분명하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런 우리의 입장에 대해 가장 온전한 설명과 논증은 내가 쓴 ‘존 파이퍼의 성경과 하나님의 영광’(A Peculiar Glory: How the Christian Scriptures Reveal Their Complete Truthfulness)에서 자세히 찾아볼 수 있다.

‘효과적인 권위’

그럼 나는 왜 그냥 “모든 세대를 가리지 않고 분수령이 되는 이슈는 성경과 성경이 드러내는 실재에 관한 권위의 문제다”라고 말하지 않을까? 왜 나는 ‘효과적인’이라는 단어를 추가했을까? “모든 세대를 가리지 않고 분수령이 되는 이슈는 성경과 성경이 드러내는 실재에 관한 효과적인 권위의 문제….”

왜냐하면 성경의 권위가 말씀에 기꺼이 동의하는 마음과 변화된 인식을 갖춘 지성을 만드는 데 효과성을 가지지 않는 한, 성경의 권위는 결코 분수령의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이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니다. (그것이 믿음을 확증하는 표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성경이 말하는 바를 실재로 인정하지 않고 성경이 말하는 바를 아름답고 소중하다고 느끼지도 못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진짜라고 하는 것을 나도 진짜로 받아들일 때까지, 성경이 기뻐하는 바를 나도 함께 기뻐할 때까지, 내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권위가 결코 내 속에서 효과성을 발휘할 수는 없다. 그래서 성경의 권위 문제는 내게 분수령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성경은 기독교인을 향해서 “죽었다”(골 3:3)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살아났다”(골 3:1)라고도 말한다. 그리고 “너는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졌다”(골 3:3)라고 말한다. 이것이 실재다. 그러나 수많은 기독교인의 삶을 보면 성경이 말하는 이런 실재를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만약에 그들에게 당신의 삶 어떤 부분이 이 말씀이 말하는 바를 구현하고 있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성경의 가르침은 그들의 마음에서 전혀 효과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성경이 가치있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들과 관련해서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빌립보서 3장 8절과 마태복음 13장 44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유한 그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한 존재다. 그러나 믿는다고 고백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소유물을 그리스도보다 더 가치있게 여긴다. 그리스도야말로 나를 기쁘게 하는 무엇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리스도 대신 그들의 분주한 생각과 활기찬 대화를 채우는 것은 소셜 미디어와 스포츠 그리고 정치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의 궁극적인 아름다움과 가치가 그들에게 있어서 효과적인 권위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기독교인에게 성경의 권위는 마치 선물을 싼 예쁜 포장지를 보면서 “이 선물 너무 좋아. 정말로 아름다워”라고 말하는 식으로 인정받을 뿐이다. 그러니까 예쁜 포장지 속 내용물에는 관심도 없고, 행여 선물이 불쾌할 수도 있고, 또는 그냥 무시해도 되는 수준이지만 그냥 포장지가 예쁘니까 괜찮다는 식이다.

드러난 발화점

성경이 말하는 실재와 선에 관해서 특별히 개인적으로 반대하지 않거나 또는 문화적인 논쟁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라면, 성경 권위에 관한 효과성의 문제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고 묻혀있는 경우가 많다. 그냥 말로는 얼마든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 그러는 이유 중 하나는, 그냥 내가 사는 문화와 내 개인적인 윤리가 성경이 말하는 바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성경이 정말로 내 삶 모든 영역에서 권위의 효과성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러다가 문화적 발화점을 만날 때가 있다. 바로 논쟁이 생긴다. 동성애가 죄인가? 회개하지 않고 계속 죄를 범하는 동성애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고전 6:9-10)? 만약 이 사회 문화가 동성간의 연합을 ‘결혼’이라고 부른다면, 그게 결혼이 되는가(엡 5:31-32)? 동성간의 성교가 ‘자연스러운’ 것인가? 아니면 이것은 ‘본성에 거스르는'(롬 1:26-27) 것인가? 남자와 여자 간의 결혼만이 유일하게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결혼인가?

갑자기 발생한 문화적인 발화점(매우 개인적인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은 그 사람이 평소에 갖고 있는 성경의 권위가 실제로도 효과적인지 아닌지를 드러낸다. 성경의 권위가 말씀에 기꺼이 동의하는 변화된 마음을 만드는 데 효과적인가? 무엇이 진짜고 참인지를 확신하는 데 성경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변화시키는가? 아니면 성경의 권위는 단지 우리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가르침을 싸고 있는 선물 포장지에 불과한가?

‘드러난 실재’

따라서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모든 세대를 가리지 않고 분수령이 되는 이슈는 성경 권위가 가진 효과성의 문제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이 글의 첫 문장에서 말하고자 한 모든 의미를 다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구절을 첨부했다. “모든 세대를 가리지 않고 분수령이 되는 이슈는 성경과 성경이 드러내는 실재에 관한 효과적인 권위의 문제다.” 추가한 이 구절에 대해서 우리는 아직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권위 그 자체는 그 어떤 효과성도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짜고, 또 진짜 아름다움을 누리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보여줌으로 우리의 인식 자체를 바꾸어 버리는, 권위 있는 말씀이 드러내는 실재다. 성령님은 진짜가 진짜로 보이도록 만들고, 진짜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이 되도록 한다. 권위는 우리의 관심을 끌 수 있다. 그러나 권위만으로는 우리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

단지 권위와 함께 성경의 가르침과 실재가 주어졌다고 해서 우리 속에서 실재가 실재가 되고 아름다움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지성과 마음은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부모로서 권위를 가지고 자녀로 하여금 먹기 싫어하는 채소를 억지로 먹일 수는 있지만, 자녀가 채소를 좋아하도록 만들 수는 없다. 권위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권위는 자녀로 하여금 식탁에 앉도록 하고 맛있을 것이라고 장담은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권위가 맛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권위만으로도 실재를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권위가 당신으로 하여금 그 실재를 보도록 하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얼마든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고 모범 답안을 말하면서도 당신은 여전히 성경이 진짜라고 말하는 실재를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성경이 드러내는 아름다움을 보고 누리는 변화된 지성과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신령한 은사

우리의 지성과 마음이 변화되는 것은 단지 권위에 굴복하는 것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은사다. 은사를 받음으로 우리는 비로소 보고 또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실재를 진리이자 또 진짜로 보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눈이 필요하다. 성경이 드러내는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음미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미각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서, 성경은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한다(엡 5:24). 그리고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한다(엡 5:24). 이것이 실재다. 그러나 아무리 엄청난 권위가 이 가르침을 진짜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아름답게 포장해서 들고 오더라도, 당신은 그 진리를 보지 못하고 또 당신의 마음은 그런 가르침을 사랑하지 않는다. 권위는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얼마든지 권위를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효과적이지 않다. 오직 성령님에 의해 당신 속에서 실재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드러날 때에만, 권위는 효과적이게 되고, 당신은 비로소 진짜를 진짜로 보게 된다. 비로소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느끼게 된다. 그리고 하나 덧붙이자면, 끔찍한 것을 진짜 끔찍하게 여기게 된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경의 실재가 드러내는 진리와 아름다움을 보고 또 맛볼 수 있도록 성령님이 우리를 변화시켜야만 한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진짜와 성경이 드러내는 아름다움을 비로소 보고 음미할 수 있게 된다. 성령님은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이런 역사를 이루신다. 그렇게 될 때, 권위는 비로소 효과성을 갖게 되고, 가고 오는 세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분수령 앞에서 바른 길을 가게 된다.

“ 권위만으로도 실재를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권위가 당신으로 하여금 그 실재를 보도록 하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얼마든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고 모범 답안을 말하면서도 당신은 여전히 성경이 진짜라고 말하는 실재를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성경이 드러내는 아름다움을 보고 누리는 변화된 지성과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

존 파이퍼 John Piper | desiringGod.org의 창립자이며, Bethlehem College & Seminary의 총장. 33년 동안 미네소타에 위치한 베들레헴침례교회 담임목사 역임. 대표작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라’가 있으며, 최근 저술한 ‘내가 바울을 사랑하는 30가지 이유’​ 외에 50여 권의 책을 저술.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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