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호 / 믿음의 삶]
복음의 은혜를 나누며 가깝게 지내는 한 집사님이 있었다. 어느 날 그분은 자신의 한계 앞에서 주님만 바라보는 놀라운 은혜의 시간을 갖게 됐다. 엄청난 믿음의 진보를 경험한 셈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사건을 기뻐하지 못하는 나를 보게 됐다. 꼭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의 마음이었다. 방탕한 동생이 돌아와도 기쁘지 않았던….
왜 그럴까? 기뻐 눈물이라도 흘릴 줄 알았는데 이런 내 반응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러다 말씀기도 모임에서 주님은 호세아서를 통해 내가 그 집사님에게 복음을 가르치며 복음을 자랑한 게 아니라 복음을 아는 나를 자랑하고 있었음을 알게 하셨다.
‘너는 번성할수록 너의 제단과 너의 주상을 만들고 더 정교하게 만들고자 하였다.’ 호세아서를 통해 나의 실상을 드러내셨다. 순간 연기처럼 증발하고 싶었다.
또 하나의 사건. 어느 날 길을 가는데 남편 얼굴이 떠올랐다. 목사인 남편이 수요 예배 때 강단에 선 모습이었다. 그 예배가 있기 전날 나는 밤새 남편의 영적 생활에 대해 따갑게 질책했다. 제대로 반박 못하는 남편을 보며 속으로 고소해 했다. 주님이 그 장면을 통해 깨달음을 주셨다.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바리새인이었음을.
이런 죄인인 나에게 주님이 요한복음 21장으로 말씀하셨다. 이제껏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먹으며 명성과 빛을 보고 여기까지 따라왔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나도 빛나고 주님도 빛나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없다는 걸 알았다. 주님이 나를 부르신 길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요 21:19)였다.
그 십자가에서 나의 죄인 된 생명이 죽었을 뿐 아니라 복음 전하고 욕먹고, 사랑했으나 멸시당하고, 오해받아도 주님이 묵묵히 지셨던 십자가가 오늘 내가 설 자리였다. 그렇게 살기를 결단했다. 결국 주님은 내게 그 자리에 서게 하셨다.
다음세대 훈련학교 섬김이를 마치는 날. 그날은 십자가의 자리,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자원해서 온 첫날이었다. 내가 마땅히 참석해야할 중요한 결혼식이 있었지만, 섬김의 자리를 택했다. 훈련학교의 부르심이 결혼식보다 먼저 결정됐기 때문이다. 죄송한 마음과 여러 어려움들이 있지만 주님을 따른 그때,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보여주셨다. 나 같은 자에게 그 영광 보여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복음기도신문]
최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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