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게 패인 주름. 불뚝 올라온 혈관. 마디가 불거졌지만 야윈 듯 가느다란 손가락.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손의 임자는 분명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손은 가지런히 모아져 조심스럽게 하늘을 향하고 있다. 손은 ‘기도’를 하고 있다.
뒤러는 교회에 봉헌할 제단화를 그리기 위해 습작으로 이을 그렸다. 뒤러의 제단화는 사도들을 그린 것이었다. 화가는 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초대교회 시절의 사도들을 그릴 때 기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기도가 사도들의 삶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림에는 단지 손 하나만 그려져 있을 뿐인데, 평탄치 않았을 사도들의 삶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경건과 인내 이 모두가 한 데 녹아 있다. 작은 그림 한 장이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독일에서 활동한 화가 뒤러가 종교개혁이 싹트기 시작할 무렵인 1508년 이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은 또한 이것이 단지 눈에만 아름다워 보이는 그림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뒤러는 그림을 그리기 앞서, 분명 기도에 대해, 기도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했을 것이다.
기도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위라는 사실을 모르고서는 기도가 가진 경건, 경외, 인내를 이처럼 표현할 수 있었을까? 뿐만 아니라 그림에는 얼굴이 그려지지 않아서, 모두의 손인 듯 공감대를 형성한다. 또한 배경이 없어 시간과 장소 이 모든 것을 초월한 ‘끊임없는 기도’를 뜻한다. 마치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처럼 말이다.
사실 이에는 뒤러를 위대한 화가로 만들기 위해 탄광 일을 자처한 형제의 손이라는 미담이 따라 다닌다. 이 미담이 사실인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사람들이 이 작품에 그러한 미담을 붙일 정도로 모두가 감동과 능력과 경건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기도는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을 감동케 한다. 기도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글.이상윤(미술평론가)
大きなしわ。目立つ血管。ゆび骨は太いが、痩せ細そうな長い指。これで考えてみると、手の主人ははっきりして楽な人生は送ってないでしょう。しかしその手はちゃんと会わせられて天に向けている。手は‘お祈り’をしていた。
ディラは教会に捧げる祭壇画を描くために習作としてこの【お祈りの手】を描いた。ディラの祭壇画は使徒たちを描いたものだった。画家はこの世に福音を伝えるためにすべてをささげた初代教会の使徒たちを描く時、お祈りを一番重要に考えた。お祈りが使徒たちの人生、そのものだったからである。
画にはただ手一つだけ描いたのに、普通ではなかった使徒たちの人生と、それにもかかわらず絶えず祈っている敬虔と忍耐、このすべてがひとつに溶けてある。小さい画一枚が私たちに深い感動を与える理由が、つまりその理由ためである。
ドイツで活動した画家ディラが宗教改革が芽生え始めるころの1508年、この絵を描いたという事実は、またこれがただ目に美しく見える画ではない事実が言える。ディラは画を描く前に、はっきりお祈りに対して、お祈りの本質に対して深く考えたでしょう。
お祈りが創造主、神様と被造物の人間が通じ合える一番の偉大な行為であるという事実を知らなくては、お祈りが持つ敬虔、畏敬、忍耐をこのように表現できただろうか。それだけではなく画には顔が描かれてなくて、皆の手のような共感を形成する。また背景がなくて、時間と場所このすべてを超えた‘絶えないお祈り’を意味する。まるでイェス様が私たちに教えてくださったお祈りのようである。
事実、この【お祈りの手】にはディラを偉大な画家にするため、炭鉱の仕事をしていた兄弟の手だという美談がある。この美談が事実がどうかは確認できないが、確実なのは人たちがこの作品にそのような美談をおくほどに、皆が感動と能力と敬虔を感じるのは事実である。お祈りは人だけではなく、神様を感動させる。お祈りの偉大さは、つまりここにあった。
文 李サンユン(美術評論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