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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의 죽음을 딛고 일어선 순천 선교부

▶ 조지와츠 기념관. 등록문화재 제127호. 프레스톤이 설립한 보통성경학원으로 현재 1층은 병원, 2층은 재정 후원자였던 조지 와츠의 기념관으로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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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선교열전 (14) – 전라남도편

종교개혁 500주년을 넘긴 2018년, 한국의 기독교 역사는 133주년을 맞았다. 구한말부터 본격화된 개신교 선교 역사는 문화, 교육, 의료 분야에서 우리나라 역사와 맥을 같이 하며 한반도의 근대화와 함께 진행됐다. 우리나라 곳곳의 선교역사를 통해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을 되새겨본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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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와츠 기념관. 등록문화재 제127호. 프레스톤이 설립한 보통성경학원으로 현재 1층은 병원, 2층은 재정 후원자였던 조지 와츠의 기념관으로 사용<출처: 문화재청>

순천 선교부의 설립

순천을 처음으로 방문한 선교사는 1894년 호남 일대를 순회한 레이놀즈(이눌서) 목사 일행이다. 그 후 1897년에 테이트(최의덕) 선교사가 그 지방에 선교 여행차 들러 전도지를 나누어 주며 장터 전도를 했는데, 그때 돌렸던 전도지가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어느 주막집 벽에 도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광주의 오웬(오기원) 목사는 순천까지 내왕하며 몇몇 교회를 설립했다. 그가 치명적으로 아프게 된 것도 이곳에서였다. 그의 사후에 1909년 프레스톤(변요한) 목사와 유진 벨(배유지) 목사가 목포에서 광주로 옮겨 전라도 동남부 지역의 사역을 감독했다. 두 사람은 이 지역을 함께 둘러보면서 순천 근교에 여섯 내지 일곱 개의 예배 공동체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중에는 도시 안에 50명이 모이는 큰 예배처소도 있었다. 순천은 광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지만, 이 지역에는 새 신자들이 많았고 도서지방을 위한 도약점이 될 수 있었다. 프레스톤과 벨 목사는 순천에 선교부를 세울 것을 추천했고, 그해 가을 프레스톤 목사가 다시 순천을 찾아가서 한 달 동안 체류하며 전도했다.

1910년부터는 일 년에 봄, 가을로 두 차례씩 문답을 실시하고 니스벳(유서백) 목사가 그곳에 가서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1911년 선교부는 순천에 선교기지를 구입했다. 그 다음 해인 1912년에는 광주에 있는 코잇(고라복) 목사와 스윈하트(서로득) 장로가 순천을 내왕하며 집터를 닦고 선교사 주택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미국교회의 전적인 후원과 선교사 지원

그보다 전인 1911년, 프레스톤은 미국으로 안식년을 떠났다. 그는 새로운 순천 선교부의 스텝과 다른 센터에서 섬길 33명의 선교사를 모집하는 사명을 받고 떠났다. 당시 미국 교회들은 해외선교를 위한 열정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1907년 평신도 선교 운동이 후원하는 새로운 선교강령의 채택에 따라 모든 교회는 7개 선교현장에 속한 총 2500만 명의 복음화를 위해 분명한 선교의 책임을 수락했다. 각 교회 교인들은 믿음으로 이 거룩한 의무를 수행하도록 요청받았다. 선교부의 목표는 1년에 1인당 4달러였다. 이것은 선교사들의 지원을 강조하는 좋은 기회였다. 프레스톤은 프래트 목사와 함께 이 평신도 선교 운동의 후원을 받아 선교사와 재정 후원자를 찾기 위해 교회를 순회했다. 고국 교회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해에 33명의 선교사가 선발되고, 그들의 한국 지원이 약속됐다. 가장 놀라운 일은 더램 제일장로교회에서 일어났다.

프레스톤 목사가 강단에서 한국의 사정에 대해 설교한 그 자리에는 조지와츠라는 사업가가 있었다. 프래트 목사는 설교가 끝난 그 주말에 와츠 씨를 방문했다. 그리고 선교사 한 사람의 후원이 아닌, 순천 선교부 전체의 후원을 요청했다. 며칠 후 조지와츠는 그 제안을 수락하고, 순천에 세워질 새로운 선교부를 보강할 13명을 지원하기 위해 매년 1만3000달러씩 후원하기로 했다.

프레스톤이 지원금을 가지고 순천으로 돌아오자 순천 선교부 건축은 급물살을 탔다. 중국, 일본, 한국의 일꾼들이 근처 산기슭의 화강암을 다듬어 무거운 돌을 50km 정도나 지고 산길을 넘어 아래로 운반했다. 포구에는 미국에서 보낸 시멘트와 각종 자재가 도착했다. 곧 전체 선교부가 지어지고, 선교사들이 채워지는 보기 드문 역사가 일어났다. 1913년 4월에 드디어 코잇과 프레스톤 목사 가족도 순천으로 이사했다. 두 가정의 여성들은 말을, 남자들은 자전거를, 아이들은 가마를 탔다. 가마꾼들이 담배를 피우는 사이 아이들은 잠시 가마 밖에 나와 풀을 따고 노래를 부르며 놀기도 했다. 그렇게 인구가 늘고 교회와 학교가 생겨나면서 순천 선교부는 그 모습을 현실 가운데 활짝 드러냈다.

이질로 아이들을 잃고

그러나 순천 지역 선교사들은 불과 같은 연단의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순천으로 이사 온 후 일주일도 되기 전, 4월 26일과 27일에 코잇 목사의 어린 딸 로버타(2세)와 아들 우즈(4세)가 차례로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코잇 부인도 이질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 있었지만, 순천과 광주 선교사들의 중보기도와 치료로 살 수 있었다. 이 시기를 지난 코잇 부인의 간증은 멀고 낯선 땅에서 가족을 잃은 선교부에게 인내와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 이후 의료사역을 위해 이곳에 도착한 티몬스(김로라) 박사 부부와 간호사 그리어 자매는 알렉산더 병원을 설립했다. 순천 선교의 리더격인 크레인(구례인) 목사의 여러 가족은 남학교 사역을, 여선교사 두피(두애란) 자매는 여학교 사역을 위해 부임했다. 또한 여성들을 위한 복음선교와 성경사역에는 여선교사 비거(백미다) 자매가 부임했다. 이들 여러 선교사들은 순천의 일반·농촌 선교와 함께 매산학교 설립 등의 학원 선교, 알렉산더 병원을 통한 의료 선교를 서로 분담해 하나님의 역사를 펼쳤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참고문헌: <한국선교이야기>(조지 톰슨 브라운 지음, 도서출판 동연,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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