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선교열전 (3) – 전라북도 편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올해 한국의 기독교 역사는 132주년을 맞고 있다. 구한말부터 본격화된 개신교 선교 역사는 문화, 교육, 의료 분야에서 우리나라 역사와 맥을 같이 하며 한반도의 근대화와 함께 진행됐다. 우리나라 곳곳의 선교역사를 통해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을 되새겨본다. <편집자>
조선의 마게도냐인 이수정
세례 후 이수정은 츠다 박사와 일본교계 지도자들, 외국인 선교사들과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 기독교 진리에 가까이 나아갔다. 그는 도쿄 외국어대학 조선어학과 교수로도 재임했는데, 일본 교회잡지 ‘칠일잡보(七日雜報)’와 일반 신문, 기관지 등은 그에 관한 기사를 자주 내며 투고를 요청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높은 보수의 보직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수정은 이런 것들을 거절하고 요코하마에 주재하고 있는 미국 성서공회 총무 루미스(H. Loomis) 선교사와 함께 성경번역에 착수했다.
1884년까지 그들은 한문성서에 한국식 토를 달아 우리말로 번역하여 읽었던 ‘현토한한(懸吐漢韓)’으로 4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번역하였다. 1885년에는 그중 마가복음을 국문으로 번역, 미국성서공회의 자금지원으로 인쇄, 간행했다. 이는 서울말로 된 국한문 번역이라는 점에서 만주 등에서 활동했던 로스 선교사의 서북어 한글 번역과 달랐다. 미국의 ‘바이블 소사이어티 레코드’ 1885년 5월호에는 이수정이 번역한 주기도문이 게재되었다. 이 역시 로스 선교사의 주기도문이 있지만 한국인 최초의 번역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었다.
무엇보다 이수정이 개신교 선교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것은 이 땅에 선교사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그는 ‘조선의 마게도냐인’이었다. 그는 1883년과 84년에 ‘조선의 사정(Condition of Corea)’이라는 서한 형식의 글을 기고해 조선 선교의 긴박성을 호소했다. 루미스와 녹스 선교사는 이것을 미국의 ‘바이블 소사이어티 레코드’와 ‘미셔너리 리뷰’에 발표했다.
“우리나라 1천만 동포는 아직까지 참 하나님에 대하여는 알지 못하고 이교도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아직까지 구세주의 은총을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나는 매우 진지하게 여러분들이 여기 조선 선교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들과 상의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을 일본에 보내 스스로 조선 선교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민족들이 선교사를 보낼 것이라고 우려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나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 주기를 간구합니다. 만일 나의 요구가 허락된다면 나의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 이수정.”
이수정의 호소문, 언더우드를 부르다
이수정 이전에도 중국과 일본 주재 선교사들이 동일한 요청을 했지만, 이수정의 호소는 조선인의 요청이라는 점에서 중요했다. 이수정의 편지는 젊은 신학생들의 마음을 조선으로 돌렸고, 뉴저지 뉴브런즈윅 신학대학생 한 명이 선교를 자원했다. 그가 바로 언더우드였다. 언더우드는 자신이 속한 RCA교단과 미국 장로교에 파송 요청 편지를 보냈다.
“저는 해외 선교 사역에 나서려 하고 있었지만, 몇 개월 전 조선인들 중에 선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진지한 호소를 읽기 전까지는 어느 선교지로 가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글을 읽고 내 마음은 떨리고 흥분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조선에 보내시려 말씀하시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부부는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수정을 만나 한국어를 배우고, 그가 번역한 국문으로 된 마가복음을 들고 인천 제물포항으로 입국했다. 조선은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자국어 성경을 가진 선교 역사상 보기 드문 나라였다.
언더우드, 호남 선교의 통로
이수정은 주일이 되면 조선 유학생들을 모아 성경을 연구했다. 7명모였던 유학생들이 30명이 넘으면서 자생적인 조선인교회가 도쿄 한복판에 세워졌다. 이것이 후일 ‘재일도쿄한인연합교회’의 기틀이 되었다. 그러나 이수정은 국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1886년 5월 정부로부터 귀국명령을 받고 개화파를 적대시하던 당시 집권 세력에게 즉시 처형당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각에서는 그의 배교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조정의 고급관리로 편안하게 살 수 있었던 그가, 일본에서 활동한 4년에 불과한 시간 동안 하나님의 손에서 준비되어 조선 선교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수정이 부른 언더우드는 또 다른 호남 선교사를 부르는 통로가 되었다. 1891년 9월 안식년을 맞은 언더우드 선교사는 미국 각지를 돌며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연설했다. 이때 그의 강연을 들은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 7명이 호남(湖南)지역에 파견되면서 호남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계속> [GNPNEWS]
참고문헌: <전북선교 120주년과 예수병원 설립 115주년 기념 포럼, 2012>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