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영광은 지금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미래가 보장되었던 사역 현장에 있었지만 복음의 진리 앞에서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의 영광을 추구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목회자. 지금은 복음만이 전부되어 순종하고 있는 처음사랑교회의 편해윤 목사를 만났다. 대화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얼마나 놀랍게 한 사람의 종을 낮추시고, 세우시고, 이끌어가시는지, 또 깨어진 그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얼마나 부요하게 되고 있는지 보는 시간이었다.
– 예수님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어요?
“저는 모태신앙은 아니에요. 중학교 때 친했던 친구와 그 친구 어머니가 저를 전도하려고 아주 노력을 많이 했는데 오히려 반감이 컸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우리 부모님처럼 정말 성실하신 분들이 억울한 일도 많이 당하시고 가난하다는 것이 이해가 안되었거든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친한 친구에 의해서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거부감이 없었어요.
그 교회에 한 전도사님이 계셨는데 그 전도사님으로부터 사영리로 전도를 받게 되었죠. 그런데 거기에 있는 첫 문장이 제 마음에 받아졌어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놀라운 계획? 그 말은 곧 부자가 되게 해준다는 말처럼 들렸어요. 부자 되고 출세하는 것이 제 꿈이었기 때문에 그 말이 너무 좋게 들려졌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교회를 열심히 다니게 되었죠.”
고1 때 친구의 권유로 교회 출석
– 아직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신 것은 아니었군요?
“그렇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그다음 해 수련회에서였어요. 복음을 온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큰 은혜가 있었고 무슨 정신이었는지 그때 제 삶을 드린다는 고백을 했죠.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고, 군대를 갔다 오면서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짐을 싸들고 금식기도를 하기 위해서 한 기도원에 들어갔어요. 도착해서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주님께서 내면의 음성으로 ‘넌 내 종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래서 그날 바로 내려왔죠. ‘아, 나는 다른 길이 없구나.’하고 생각했죠. 그런데 얼마 후 할머니께서 암에 걸리셨는데 눈 감으시기 전에 저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고 하셔서, 대학 1학년 때부터 교제했었던 지금의 아내와 4학년 때 서둘러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 그렇게 사역자의 길로 들어서신 건가요?
“아니에요. 결혼 후 두 달이 지났을 때, 아버지께서 건설현장 사고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어요. 너무 충격적인 사건이었죠. 어머니가 홀로 남겨지는 상황이 되었고, 저는 어머니를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역자가 되겠다는 결심과 상관없이 전공을 따라 호텔에서 일을 하게 되었어요. 그곳에서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같은 날에 파티나 이벤트를 해주는 일도 했었는데요. 그때 제 별명이 ‘밤에 피는 장미’였어요.(웃음)
그런데 1년 정도 지나자 제 안에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작정 금식기도에 들어갔죠. 그러던 어 느날 대학생 시절 선교단체에서 알고 지내던 한 목사님이 교회에 찬양사역자가 필요하다고 연락을 해왔어요. 그리고 신학대학원 등록금도 교회에서 지원해 주겠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그 제안을 기도응답으로 여기고 호텔 일을 그만두고 그 교회 사역자로 가게 되었어요.”
– 그렇게 사역을 시작하게 된 거군요?
“네. 사역이 시작되자마자 주님께서 많은 은혜들을 주셨어요. 성도님들의 반응도 참 좋았어요. 그러다가 1년 반 정도 되었을 때 한 대형교회에서 저에게 사역의 기회를 주셨고 특별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어요. 새로 간 그 교회에는 아주 큰 규모의 단기선교학교가 있었는데요. 처음에는 그 학교의 책임자를 맡게 해주셨어요. 그 교회에 있으면서 선교를 동원하는 사역과 찬양사역도 많이 했었죠. 규모가 워낙 커서 계속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위치에 있었어요.”
– 그곳에서의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사역은 계속해서 너무 잘 되었지만 점점 제 안에 교만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죠. 드디어 유명해졌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나중에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봐 주고 인정해 주는 것에 완전히 도취가 되어버렸어요. 그리고 음란이라든지 명예욕과 같은 자아의 욕구들이 막 분출되기 시작했어요. 나로서는 끊어낼 수가 없었어요. 사람 앞에서는 잘 감출 수 있었지만 혼자 있을 때는 매주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기가 일쑤였어요. 그렇게 가면무도회와 같은 삶이 반복되는데도 교회에서는 점점 더 주목을 받고, 제 영향력이 더 커져만 갔어요. 그러다가 결국 평생을 사역할 수 있도록 교역자가 될 기회까지 왔어요. 알고 보니 주위에서 시기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고, 교회의 모습들을 깊이 알아가면서 실망도 많이 하게 되었죠. 너무 힘든 시기였어요.”
가면무도회 같은 삶에 절망
– 참 어려운 시기였겠네요.
“그 와중에 교역자 시험을 봤는데 합격이 되었어요. 그런데도 기쁨이 하나도 없었어요. 제 양심을 속이는 것도 한계가 있고, 매주 몇 천 명 앞에서 찬양을 인도해야 했는데 그 자리에 올라갈 면목이 없었어요. 아내에게 죽을 것 같다고 말했죠. 그래서 결국에는 교회에 사표를 냈어요. 그 후 여러 우여곡절 끝에 2004년도에 목사안수를 받았어요.”
– 교회 개척은 어떻게 하시게 된 건가요?
“처음에 저는 개척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2005년 카자흐스탄에 단기선교를 갔었는데 거기에서 기도하고 있는 저에게 주님께서 개척에 대한 마음을 강하게 주셨어요.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빈털터리 상태에서 2006년 1월에 교회를 개척했어요. 처음에는 교회가 꽤 잘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만 가면 일만 명 목회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개척 1년 만에 교회가 쪼개지는 상황이 벌어졌어요. 한 전도사님이 성도 반을 데리고 나가는 일이 생겼죠. 너무 절망스럽고 할 수 있는 것이 기도밖에 없어서 금식기도에 들어갔죠.
3일 금식, 보식하고 5일 금식, 보식하고 7일, 나중에는 40일 금식까지 하게 되었죠. 이유는 이런 거였어요. 내 인생이 여기서 완전히 무너질 수 없다는 생각, 또 내가 이렇게 무너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니 좀 도와달라는 거였어요. 생각해보면 그 얘기도 결국 나를 위한 것이었는데 말이죠. 참 추잡했어요.(웃음) 그러다가 금식 35일째인가 속이 뒤집혀서 응급실에 실려갔는데,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실려온 이유를 듣더니 큰 소리로, ‘하나님이 사람 하나 또 잡네.’하는 거예요. 절망에 절망을 더했죠. 그러면서도 또 무슨 정신이었는지 금식 40일을 다 채우긴 했어요.”
– 하나님이 정말 심령을 가난하게 만드셨겠네요.
“그렇죠. 그즈음에 아는 목사님을 통해서 한 선교단체가 주관하는 복음 앞에 서는 훈련과정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그 시간이 정말 제 삶에 혁명과 같은 시간이었죠.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죄에 대한 설명이었어요. 죄는 그냥 나에게 붙었다 뗐다 하는 스티커같이 회개하면 사라지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내가 죄 자체이고 그런 내가 죽어야 한다는 말이 정말 충격적으로 다가왔죠. 알고 보니 그게 성경 말씀 그대로인 거죠. 그 시간을 통해서 복음이 저에게 비로소 실제가 되었어요.
그리고 이 십자가 복음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가지고 있던 책 중에 십자가 복음과 관련 없는 책들은 다 버렸죠. 그리고 이제 이 복음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마음에 작정하게 되었어요. 목회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이 복음으로만 목회할 수 있도록 주님이 은혜를 주셨어요.”
죄는 스티커가 아니다
– 그 이후 교회에는 어떤 변화들이 있었나요?
“일단 지금 생각나는 것은 예배를 드리던 예배실에서 보증금을 다 잃고 쫓겨나게 되었어요. 큰 결단 이후에 뭔가 잘 되어야 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상황이 점점 더 안좋아졌어요.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요. 제 마음이 너무 기쁘더라는 거예요. ‘바로 이게 목회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해서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6명의 성도들과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얼마 후에 예배 장소로 건물을 빌려주겠다는 곳이 네 군데나 나타났어요. 그래서 성도들이 오기 좋은 가장 가까운 곳으로 선택했죠. 너무 감사했어요.
그때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만일 제가 개척을 해서 잘 되기만 했더라면 저는 복음 앞에 설 수가 없었겠죠.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완전하신 조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저에게는 교회의 사이즈가 중요하지 않아요. 어떤 회중 앞에서도 주님 허락하시는 한 복음을 나눌 수 있는 자로 바꾸어 주셨어요. 제가 늘 기도했던 ‘일만 명’에 대한 기도제목을 ‘일 명만’으로 바꾸어 주셨어요.”
– 정말 엄청난 변화네요.
“저는 정말 복음이면 충분한 교회를 개인적으로 보고 싶었어요. 복음을 수단 삼아 이렇게만 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교회가 아니라, 그저 복음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 교회 말이에요. 다른 어떤 프로그램으로 유지되는 교회 말고, 오직 복음이면 충분한 교회를 지금도 보고 싶어요. 저희 교회가 그렇게 되기 원하고, 또 복음을 통해 제 삶이 그렇게 온전해지기를 원해요. 그러나 저도 아직은 충분히 보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분명히 보고 있기도 해요.
지금 저희 교회에는 열두 분의 집사님이 섬기고 있어요. 어떻게 하다보니까 열두 분이 되셨는데 교회의 모든 결정을 이분들이 거의 다 하고 계세요. 교회를 지금 있는 곳으로 이전하는 문제도 이분들이 주축이 되어서 진행한 일이죠. 제가 보고 싶은 것이 그런 거거든요. 목사 한 사람이 이끌어가는 교회가 아니라 정말 말씀이 일하시고 복음이 이끌어가는 교회 말이죠. 우리 집사님들, 너무 귀하신 분들이에요. 이 얘기는 꼭 좀 실어 주세요.(웃음)”
복음이 정말 실제되어야 하는 영역, 가정
– 교회에서 선교학교를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주님의 은혜로 2014년 겨울에 1기 복음선교학교를 시작으로 올해 3기까지 왔는데요. 규모는 작지만 몇 주간의 강의와 해외아웃리치까지 매 기수마다 참 은혜가 많았어요. 특별히 올해에는 7월에 네팔을 다녀왔는데요. 현장에 계신 선교사님들과 함께 연합해서 현지인들에게 한 주간 복음을 나누는 복음학교를 가졌어요.
현지인만 44명이 복음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시간이 되었는데요. 그 중에서 선교사로 헌신하는 지체들도 있었어요. 너무 감격스러웠죠. 그리고 내년 3월 6일에 다시 네팔에서 2기 복음학교를 하기로 약속하고 왔어요. 그래서 지금 교회가 또 준비하고 있고요. 3년째 복음선교학교를 하면서 저희 교회에 주신 결론은 아웃리치마다 어떤 선교지이든 복음학교를 하는 것으로 목표로 삼게 되었어요. 이건 정말 저희 교회에게 주신 특권이자 영광이죠. 이런 일들이 교회 안에 정말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어요.”
– 정말 모든 성도가 복음으로 선교하는 교회네요. 가족들 이야기도 좀 해 주세요.
“교회를 개척할 때 저희 두 아이가 초등학생이었어요. 당시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교회를 할 정도였으니 참 많이 어려웠죠. 아이들이 신앙적으로도 많이 방황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주기도문도 모르더라고요. 제가 너무 잘못한 거죠. 기독교라는 형식 속에서만 있었던 거예요. 복음이 실제가 되어야 할 영역은 정말 가정이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주님의 은혜로 첫째 딸은 문화예술선교사로 살고 있고, 둘째 아들은 어느새 저의 동역자가 되어 있어요. 정말 복음의 능력을 가정 안에서도 맛보고 있죠.”
–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저는 플랜B가 없어요. 오직 복음으로만 달려가기 원해요. 내가 받은 이 복음을 이해하고, 이 복음을 내 삶에 관통시키고, 이 복음이 전부 되는 일에 진력을 다 쏟는 것만 해도 제 인생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부족하고, 엎어지고, 자빠질 때도 있지만 어떻게 해서든 이 복음이 있는 곳과 함께 연합하고 그렇게 주님 오실 때까지 섬기고 싶어요.” [GNPNEWS]
J.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