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병진 장로 (보람세종시민교회)
303호 | 사람풍경
햇살이 따사로운 6월, 기독대안학교인 글로벌선진학교 문경캠퍼스를 찾았다. 운동장 옆에 자리잡은 홍병진관 입구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홍병진 장로를 만났다. 홍 장로는 1층 로비 옆에 마련된 대규모 태권도 전용 체육관으로 취재진을 안내했다. 마침 한 여학생이 체육관에 내려와 홍 장로에게 자세를 바로하고 깍듯하게 인사했다. 홍 장로가 던지는 몇 가지 질문에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했다. 10대 청소년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은 태권도장에서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태권도라는 그릇 속에 담긴 홍 장로의 기나긴 인생 스토리를 들어봤다.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사단법인 글로벌 태권도 교육연맹 대표를 맡고 있고, 글로벌선진학교 문경캠퍼스와 음성캠퍼스에서 12학년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태권도계에서는 세종시태권도협회 고문과 대전광역시태권도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 역할이 많으시군요. 태권도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초등학교 때 시작했습니다. 제가 외할머니 손에 자랐어요. 어머니가 일찍 홀로 되시고 서울에서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할머니에게 저를 맡기고 가끔 오셨어요. 학교와 동네에서 까불까불한 애들이 어른들이 없고 제가 만만하니까 괴롭혔는데 할머니가 가서 야단쳐봤자 통하지 않았어요. 저 때문에 이사를 몇 번 했어요. ‘외조모 삼천지교’였죠. 몇 차례 이사를 다니다 결국은 5학년 때 대전까지 오게 됐어요. 대전에 가보니까 태권도라는 게 있는 거예요. 이걸 배우면 괴롭히는 애들도 혼내주고 앞으로 당하지 말아야 되겠다 생각해서 태권도를 시작했어요.”
괴롭힘 면하려고 태권도 배워
– 어릴 때 어려움을 겪으셨군요.
“그때는 태권도를 하는 초등학생이 별로 없었어요. 지금은 보호장비도 많지만 그때는 보호장비 같은 게 없었으니까 좀 거칠고 위험했어요. 당시 도장에는 중학교, 고등학생 형들, 어른들이 많았어요. 그때는 도복만 딱 들고 나가도 동네 건달들이 건드리지 못했을 정도였어요. 그때부터 시작한 태권도를 지금까지 쭉 하게 됐네요. 50여 년 동안 태권도를 하면서 지루해 본 적이 없고 힘들어해 본 적도 없었어요. 그냥 좋았어요. 제가 예수 믿기 전까지는 태권도가 저에게는 신앙과도 같았어요.”
– 예수님은 어떻게 만나시게 됐나요?
“고등학교 때 친구들의 권유로 처음 교회에 나가게 됐습니다. 그때는 머리 빡빡 깎던 남학생들이 여학생들과 대화하는 것도 어려웠어요. 그런데 교회는 전혀 그렇지 않고 자유롭게 만나더군요. 친구가 어느 날 그런 교회에서 체육대회가 있는데 와서 같이 하자고 했어요. 선수가 필요하다고요. 아마 전도하려고 그런 구실을 만들었던 것 같아요. 그 일이 계기가 돼서 교회에 발을 들이게 됐어요. 그러다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에요. 졸업 후 태권도 사범 생활을 하면서 결핵을 얻었어요. 몸이 굉장히 힘들었는데, 그때서야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게 됐어요. ‘내가 지금 죽으면 천국 갈 수 있나?’라는 의문이 들면서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것 같아요. 천국에 간다는 자신감이 없었어요. ‘가봐야지 알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한 친구가 한 교회에서 하는 교리 공부를 소개했어요. 이틀 동안 했는데, 다들 눈물도 흘리고 변화가 되는 것 같았죠. 그런데 저는 전혀 감흥이 없었어요. 둘째 날도 마찬가지였어요. 목사님은 공부가 끝나자 책을 딱 덮으셨어요. ‘이제 나는 틀렸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목사님이 ‘여러분 이틀 동안 배웠는데 뭐 기억나세요? 만약에 이 성경책을 다 알고 이해해야지 구원받을 수 있다면 몇 사람이나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다 몰라도 이것만 알면 됩니다.’ 그러면서 들려주신 이야기가 제 마음에 꽂혔어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분의 아들이고, 그분이 우리 죄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내가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면 지금 죽어도 천국 갈 수 있는 겁니다. 이걸 믿으면 됩니다.’ 그동안 교회 다니면서 그렇게 많이 들었던 얘기가 그때는 확 믿어졌어요. 그 뒤로 신앙생활의 굴곡은 있었지만 천국 소망에 대한 의심은 별로 안 들어봤던 것 같아요.”
– 결핵은 좀 나아졌나요?
“결과적으로는 깨끗하게 회복됐어요. 신탄진에 있는 체육관 사범으로 가게 됐을 때였어요. 제가 아프다는 걸 사람들은 몰랐죠. 하루는 금강변을 걷는데 너무 힘드니까 앉아서 바위에서 쉬었어요. 이렇게 앓다가 괜찮아지면 다행이고 안 그러면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때는 결핵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당시 서원이라는 게 정확하게 뭔지도 몰랐는데, ‘하나님 저를 고쳐주시면 이제 남은 삶은 하나님을 위해 살게요.’ 기도했어요. 아무런 의미도 없고 뜻도 모르고 그냥 너무 힘들어서 신음하듯 기도했는데, 그 뒤로 약을 먹으면서 굉장히 빨리 호전되어 몸이 회복됐어요. 이후엔 주님과 깊어져서 자연스럽게 선교단으로 이어졌어요.”
결핵 회복 후 태권도 통해 선교 결심
– 어떤 선교단인가요?
“예수를 믿고 나서 태권도가 내 신앙이었다는 걸 보게 됐죠. 주님을 만나고 그런 우상 같은 태권도를 버리고 선교사로 나가야 되나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현재 내 도장에 태권도를 배우겠다고 온 믿지 않는 영혼들 수백 명이 내 앞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이 사람들을 전도해야 되겠다.’ 저 혼자 그런 갸륵한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토요일에는 운동을 안 하고 유단자들만 불러서 성경 공부를 시작했어요. 어설프니까 막 그냥 열정만 가지고 운동 가르치는 식으로 했어요. 그런데 성경 공부를 하다 보니까 제가 성경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훈련생들의 많은 질문들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거예요. 그렇다고 거짓말도 할 수 없고, 그래서 배워야 되겠다 싶어서 1987년도에 서울에 있는 체육인신학교에 가게 됐어요. 그러다 88올림픽 홍보차 태권도시범단으로 미국에 한 달 동안 다녀오게 됐죠. 이후 미국에 함께 다녀온 동료들 중 7명이 세계선교에 뜻을 두고 의기투합해서 미국에 나가 6개월을 순회하면서 태권도 선교를 했어요.”
– 태권도 선교는 어떻게 이뤄지는 건가요?
“태권도복을 입고 시범을 보이며 기타 치고 찬양하고 율동하고 간증을 했어요. 사실 그 시절엔 미국에 가는 게 쉽지 않아서 준비하는 데만 6개월이 걸렸어요. 비자가 동시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어렵게 미국에 갔어요. 그런데 가서 보니 우리가 간다고 잡아놨던 스케줄이 6개월이 지나면서 모두 취소가 됐다는 거예요. 그래도 당시 우리를 초청하고 섬겨주시는 목사님이 어렵게 한 교회와 연결시켜 주셔서 예배 때 시범과 태권도 찬양 율동을 했어요. 그 소식이 미주 신문에 소개되면서 6개월 동안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바쁘게 공연을 했어요.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 후배, 제자들이 모여 대전에서 처음엔 할렐루야 태권도 선교 시범단을 시작했어요.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국제 태권도 선교회(ITM)’로 자라게 됐어요.”
– 선교회에서 어떤 활동들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1989년도에 7명으로 시작됐어요. 1년 동안 기도원에 올라가 모여 기도했어요. 그렇게 1년간 아무 활동도 안 하고 기도와 훈련으로 준비만 했어요. 1년이 지난 다음 먼저 각자 섬기는 교회에서 태권도 시범과 찬양 간증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됐어요. 한국에서도 많은 곳에서 연락이 오면서 많은 교회를 방문하며 태권도를 통해 복음을 전하게 됐어요. 또 필리핀을 필두로 해서 1년에 한두 차례씩 단기 시범을 나갔어요. 약 15년 동안 25개 국가에 30여 차례 다니며 수백여 회에 걸쳐 시범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선교회 회원들이 다 각 도장의 사범, 관장들이어서 각자 소속된 체육관이 있는데, 일주일 혹은 열흘을 자비량으로 해외 선교를 간다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10년 이상 지속했죠. 대전 태권도협회에서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교회가 후원하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래도 참여하는 사범, 관장들이 매주 훈련하고 기도하면서 순수 자비량으로 교회 집회나 해외 선교를 꾸준히 했어요. 나중에 단원이 한 20여 명까지 됐고 지방에서 가장 큰 시범단이 됐어요.”
– 오직 하나님이 불러주신 선교회 사역에 순종한 셈이군요.
“그런데도 바라는 목적은 이뤄지지 않았어요. 우리 안에서 선교사를 파송하고 싶었는데, 관장들은 이미 자기 사업이 있으니까 어렵고, 사범들도 쉽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마하나임이라고 하는 청소년 시범단을 만들었어요. 중학교 때부터 하니까 가장 순수하게 자기 미래와 꿈을 결정하는 시기였기 때문이지요. 태권도 선교 시범단이니까 ‘이걸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다. 선교사라도 하고 싶다.’ 해서 마하나임을 통해 목회자도 나오고 선교사도 나오고 국가대표 시범단도 14명인가 나왔어요. 지금은 오랫동안 제가 학교를 섬기면서 그 시범단은 아쉽게도 자연스럽게 흩어져서 없어졌지요.”
다음세대 인성교육에 안성맞춤인 태권도
홍 장로가 글로벌선진학교와 인연이 시작된 것은 2004년, 태권도 수업 봉사를 시작하면서부터다. 태권도를 배운 아이들은 2~3개월 만에 홍 장로가 지나가면 ‘태권’ 하며 거수경례를 했다. 예의, 염치, 인내, 극기, 백절불굴이라는 태권도 정신을 접목시킨 그의 가르침은 인성교육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어느새 몸에 균형이 잡히고 우렁찬 기압소리와 달라진 눈빛, 깍듯한 예의범절이 다음세대 아이들에게 옷처럼 입혀졌다. 태권도를 배워갈수록 자기방어력과 자신감이 생기자 아이들이 좀 더 여유 있어지고 관용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태권도는 글로벌선진학교의 정식 교과로 채택돼 홍 장로는 학교 울타리 안에서 20년 동안 다음세대를 길러왔다.
“요즘엔 학교에서 도덕 과목도 없어지고 윤리도 없어지니 어른을 봐도 인사할 줄 모르는 세대가 됐어요. 뭘 조금 안다 하면 남들 무시하고, 강한 사람한테는 굽신거리고 약한 사람한테는 군림하는 이런 폐단들이 많이 나타나는 이때 태권도는 그런 것을 바르게 교육할 수 있는 좋은 틀인 거예요. 글로벌선진학교는 고등학생이 되면 유단자가 되는 관문으로 의무적으로 외부 시합을 나가야 합니다. 나가면 많은 것을 배워요. 겨루기 시합을 나가면 대부분 다 지고 옵니다. 일반 출전자들은 모두 선수로 준비되어 나오는데 우리 아이들은 수업으로 의무적으로 나가니 그럴 수밖에요. 대회에 나가는 교육적인 이유가 있어요. 시합장 코트에 들어섰을 때, 내가 모르는 상대방 앞에 섰을 때, 갈등과 두려움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해요. 그걸 극복하고 자기가 뭐라도 해보든지, 아니면 겁나서 도망다니든지, 아니면 겁은 나지만 배운 대로 막 해보느냐를 대회를 통해 경험해 보는 거죠. 우리는 참여가 목적이지 이기고 지는 것은 상관도 안해요. 그러면서 배우는 게 많기 때문에 교육적으로 가치가 있지요. 우리 인생은 살아가면서 새로운 것을 만날 때마다 뭔가를 겪게 돼죠. 그런데 인생이 다 겨루기잖아요. 내가 모르는 것과 만날 때는 계속 겨뤄야 되는데, 상대방이 어떤 수를 가졌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해 봐야 되잖아요. 이런 것들을 아이들이 배워가기를 바래요.”
<이상 303호에 게재>
– 지금은 태권도 선교활동을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요?
“보안이 필요한 선교지를 섬기다보니 선교회라는 이름으로는 활동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선교회라는 것을 가리고 사단법인을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처음 제가 속해있던 태권도 선교회 총재를 하셨던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님이 계세요. 그분이 설교에서 하신 유명하신 말씀이 태권도는 다이너마이트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선교사나 목사가 선교지에 들어가서 20~30년 이루는 일을 태권도 사범은 2~3년 만에 해낸다는 의미였어요. 태권도는 현지의 학교나 관공서, 군, 경, 특수부대, 대통령 경호실, 국가대표, 이런 데서 많이 사역을 해요. 그런 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제자화를 시킬 수 있지요. 태권도가 접촉점이 되는 거죠. 현지인들을 태권도 지역대표나 국가대표로 키우게 되면 지역과 국가의 위상을 올려놓게 되고, 국익에 기여를 하니까 금방 인정을 받게 돼요. 이렇게 섬길 사람들을 내보내기 위해서는 역량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연맹에서는 그것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어요. 기르고, 내보내고, 지원하고 이러한 사이클로 선교를 해왔고 이제 다시 그런 사역을 하고 싶어요. 오랫동안 학교에 있다보니 아직은 활동을 재개하진 못했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 기도하던 중에 지금은 선교사가 될 다음세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태권도 선교로 열방 섬겨
– 선교사가 될 다음세대요? 자세히 말씀 해주세요.
“알고 지내던 한 선교사님이 4학년부터 고등학생까지 선교사를 양성하는 기독학교가 있다는 이야기를 해줬어요. 그곳에 강의를 간다면서요. 처음에는 무심코 들었는데, 그 학교 이사장이 김용의 선교사님이라고 하더군요. 10여 년 전에 김 선교사님 메시지 영상을 매우 인상적으로 본 기억이 있어 학교에 함께 가보자고 했어요. 그런데 가서 아주 뭉클한 장면을 본거예요. 아이들이 뛰면서 찬양을 하고 메시지를 듣는데, 조는 애들이 안보이는 거예요. 제가 학교 생활을 오래해봐서 아는데, 그 때가 굉장히 피곤하고 졸린 시간이거든요. 대부분 아이들이 끝까지 집중해서 듣고는 마지막에 기도하는 시간에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닌데 아이들이 기도를 너무 잘하는 것이죠. 꼬마 목소리가 들리는데 기도를 너무 잘해요. 그걸 또 이어 받아서 중학생 여자아이 정도의 목소리가 기도하는데 보통이 아닌거예요. 이런 학교가 있구나. 끝나고 교장 선생님을 만나서 교제하면서 우리학교의 태권도 수업 이야기를 했어요. 교장선생님이 ‘우리도 그렇게 해 줄 수 있어요.’라고 답하는데 그 자리에서 제 마음이 많이 동요가 됐어요. 제가 와서 가르치는 게 선교적인 자료가 된다고 하니까 제가 수고를 한다고 해도 가치가 있을 것 같았어요. 기도 한번 꼭 해보시라고 하는데, 이미 제 마음이 기울어졌더라고요. 그렇게 섬기게 된지 벌써 1년 반이 됐네요. 헤브론원형학교에 태권도가 정착이 돼서 졸업할 때 4단까지 따서 사범 지도자 교육과 사회체육 지도자 교육을 받으면 국제사범이 될 수 있어요. 이런 자격이 확보가 되면 어디든 퍼져나갔을 때 선교사역에 훨씬 큰 동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봐요. 이런 일을 위해서 기도가 필요하죠.”
– 앞으로 계획과 기도제목 말씀해주세요.
“해외 학교들을 방문하다보면 태권도 시범단을 보내달라고 요청을 많이 해요. 교육기관에 들어가면 선교의 접점이 돼요. 태권도 시범단이 세워지면 신분도 확보가 되면서 안정적으로 사역을 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20년 동안 학교에 있으면서 태권도 선교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다 흩어져서 지금은 저 혼자에요. 이제 초심으로 돌아가 마음을 가다듬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뜻있는 젊은이들과 매주 모여 기도와 훈련을 하면서 준비하려 합니다. 다시 한번 태권도 선교에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고 함께 기도하고 훈련하며 세계를 향해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함께 사역에 참여할 동역자들이 다시 한번 전국 각지에서 모여질 수 있도록 그들을 기르고 파송하고 섬길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복음기도신문]
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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