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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처가 누군가에게 복음의 빛이 되었어요” – 김봄 선교사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하는 김봄 선교사 (평촌 나무십자가 교회)

김봄 선교사 (평촌 나무십자가 교회)

301호 | 사람풍경

12살 때 버려진 한 아이. 외로움과 쓸쓸함이 부모의 보살핌을 대신했던 시간들. 뼛속까지 스며든 아이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 미혼모와 알코올 중독자라는 고통의 터널 속에 빠진 자매. 그녀에게 어느 날 한줄기 빛이 비췄다. ‘내 딸아.’ 자신을 찾아온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속에서 더 이상 고아가 아니라고 외치는 그녀는 이제, 버림받고 외로워하는 영혼을 찾아 나선다. 그녀는 그들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마음의 고통으로 함께 아픔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을 대신해 운다. 십자가의 체휼로 영혼들을 섬기고 있는 김봄 선교사를 만났다.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오랫동안 방송 작가 일을 하다가 지금은 기록하는 선교사로서 선교지에서 하나님의 일을 기록하고 있는 김봄 선교사입니다.

– 기록하는 선교사라는 타이틀이 생소한데요, 어떤 일을 하시는지 소개해주세요.

“선교지에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하나님의 복음이 어떤 능력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시고, 그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키셨는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록하는 선교사에요. 탈북민 선교를 기록한 ‘복음 안에 하나 되리라’(예수전도단) 시에라리온에서의 선교를 기록한 ‘작지만 피어있는 꽃들’(브랜딩키맨)이 있고 지금은 탄자니아에서의 선교 이야기를 출간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러 선교사님들이 선교지에서 학교나, 특정 사역을 하시는 것처럼, 저는 현지의 선교사님을 돕고 그 선교사님들이 하시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록하는 게 저의 주된 사역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기록하는 부르심에 응답하다

– 기록 선교는 언제부터 하셨나요?

“탈북민 선교를 할 때부터 기록을 해 왔어요. 선교지에 있으면서 책을 내거나 신문에 기고하는 일들을 해왔는데, 그때는 이 기록하는 게 부수적인 일이었어요. 기록 선교사의 정체성이 확고해진 건 얼마 되지 않았어요. 제가 시에라리온에서 있었던 일을 책으로 내면서 기록을 나의 사명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탈북민 선교를 언제 하신 거예요?

“교회는 2003년부터 다녔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2010년경이었어요. 그전에는 주일날 예배 시간 아니고는 성경을 펴보지 않을 정도로 날라리 신자였는데 성령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만난 뒤 북한에 대한 마음을 주셨어요. 20대에 주사파 운동권이었던 저에게 북한은 환상의 나라였죠. 그런데 예수를 믿은 뒤 북한은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이 필요한 나라였어요. 한동안 북한을 품고 기도만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걸어서 북한을 건너가 모진 고통을 당하고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온 로버트 박 선교사를 통해 북한 인권에 관해서 듣게 됐어요. 그리고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교회를 찾아갔다가 본격적으로 북한선교를 시작했습니다. 그 교회가 탈북민이 개척한 탈북민 교회였거든요. 그 후 북한 선교단체의 간사가 되고 탈북민들의 친구가 되면서 탈북민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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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자니아에서 현지인 아이들과 함께. 제공: 김봄 선교사

– 예수님을 믿기 전의 삶이 궁금합니다.

“저는 절집 아이였어요. 어릴 때 부모님의 사이가 너무 안좋았던지 저를 거의 방치하다시피 하셨어요. 그래서 당시 절에서 생활하고 계셨던 할머니가 저를 절에서 키우셨어요. 그러다가 더 이상 할머니가 저를 키울 수 없는 상황이 됐어요. 제가 학교를 다녀야 되니까 다시 집으로 돌아왔어요.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모님은 싸우느라 저와 동생들을 키울 여력이 없었어요. 결국 부모님이 이혼하시면서 저는 버림을 받게 되었어요. 12살 이후로 어떤 경제적 도움이나 정서적인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혼자 살게 되었어요. 다행히 좋은 선생님들과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한 공장에서 위장 취업한 대학생을 통해 근로기준법과 함께 공산당 이론, 주사파 이념들을 배우게 되면서 공산주의 노동운동가가 되었습니다. 당시 주사파 이념은 제게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한반도가 주체사상으로 통일이 되면 인민이든 민중이든 모두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그때는 조선인민공화국은 꼭 밟고 싶은 낙원이었고, 김일성 주석은 꼭 만나보고 싶은 영웅이었어요. 그러나 소련이 붕괴되고 내가 믿었던 이념이 얼마나 허망한지 알게 되었어요. 이념을 버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와중에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수배를 받게 됐어요. 그때 피신하러 간 수녀원에서 아이의 아빠를 만나 연애를 하다가 정권이 바뀌고 수배가 풀리면서 헤어지게 되었어요. 헤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임신한 걸 알게 됐어요. 미혼모라는 사회적 편견과 힘듦을 예상했지만 당연히 이겨나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를 낳고 보니 너무 힘든 거예요. 힘든 걸 잊어보려고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게 알코올 중독까지 가게 됐어요.”

한때 주사파 운동권으로 허망한 시간 보내다 주님 만나

– 그럼 처음 교회는 어떻게 다니게 되신 거예요?

“알코올 중독자인 엄마를 곁에서 지키고 돌본 저의 딸이 저를 전도했어요. 그때가 딸이 7살이었어요. 하루는 자기 소원이니 교회에 딱 4번만 가자고 하더라구요. 아이에게 해준 것도 없고 교회는 나가줘야겠다는 마음에 처음 교회에 나가게 됐어요. 그러나 여전히 저는 알코올 중독이었죠. 제가 하도 술을 많이 먹고 일을 제대로 못하니까 직장에서 잘렸어요.”

– 어떻게 작가가 되셨어요?

“공장에서 해고되고 앞이 막막하더라구요. 그래서 처음으로 기도라는 것을 하게 되었어요. ‘나 어떻게 살아야 되냐고?’ 그러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제가 백일장 대회에서 상을 받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꿈이기는 했지만 오래전 저에게 일어난 현실이기도 한 일이었어요. 꿈에서 깨어 그제야 생각이 났어요. ‘아, 맞다. 내가 어릴 때부터 글을 잘 썼구나. 어릴 때 나의 꿈이 작가였구나.’ 그래서 작가가 되기로 했죠. 글만 쓰면 작가가 되는 줄 알았고 작가가 되면 돈도 잘 버는 줄 알았죠. 그런데 아니었어요. 작가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구나 거의 포기하려고 했는데 우연히 TV를 보다가 드라마 극본 공모전을 한다는 자막을 보게 되었어요. 나이도, 학벌도 상관없고 상금도 천만 원이라는데 저거나 한번 해볼까? 했는데 뭘 알아야죠. 그때부터 작법서를 사서 공부도 하고 친구의 도움으로 학원에도 6개월 정도 다니고 하면서 정말 열심히 썼어요. 알코올 중독자라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요. 그러다 처음으로 쓴 작품이 공모전에 최우수상이 되는 바람에 드라마 작가의 길을 걷게 된 거죠. 계속 학원에 다닐 상황도 못되었고 돈을 벌어야 해서 포기할 뻔했는데 극적으로 당선이 됐어요. 이후에 한국 최고의 작가가 되겠다고 해서 정말 열심히 썼어요.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줄 알고 복음 없이 그렇게 달려왔던 것 같아요. 가난한 미싱공에서 드라마 작가가 되고 형편도 좋아졌는데, 복음이 없으니 여전히 곤고한 인생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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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활동 시절. 제공: 김봄 선교사

–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게 되신 거예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드라마 작가가 되었지만 작가 지망생의 시절이 없었던 저는 방송 현장에서 드라마 작가가 받아야 할 훈련의 분량을 채워야 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나마 겨우 다니고 있던 교회도 작가가 된 이후 바쁘다는 이유로 나가지 않고 있던 때였어요. 5년이 지나자 황폐할대로 황폐해진 나에게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어요. ‘소망이 없는 내일 어떻게 살래?’ ‘너 왜 살고 있니?’ ‘죽어봐.’ 이런 환청들이 들릴 때면 죽어야 할 것 같은 거예요. 특히 높은 건물 앞이나 차들이 질주하는 거리를 지날 때, 지하철이 오고 있다는 소리가 들릴 때요. 당시에는 지하철에 안전바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실행할 때마다 누군가 막고 있는지 사소한 일들이 생겼어요. 그러다가 그날도 작업실 앞 편의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예외 없이 환청이 들려오는 거예요. ‘오늘 살아보니 어때?’ ‘내일은 더 엉망일 거야.’ 앞에 8층 건물이 보였어요. ‘그래 저곳이야.’하며 8층 건물 옥상 앞까지 올라갔는데 옥상 문이 잠겨 있는 거예요. ‘아. 오늘은 어떻게든 죽고 싶어.’라는 간절한 마음이었는데 그때 아래층에서 찬양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보니 7층이 교회였는데 수요일 저녁 예배가 시작하고 있었어요. ‘죽기 전에 예배나 한 번 드리고 죽자.’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어요. 그때 선포된 말씀이 요한복음 21장이었어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배반한 제자들을 위해서 조반을 준비하시고는 ‘이리 와서 먹어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리 와서 먹어라.’ 그 말씀이 나에게 하는 말씀 같았어요. ‘내 딸아, 이리 와서 먹어라. 그리고 살아라.’ 이때까지 ‘죽어라.’는 환청만 들었는데 먹고 살아라는 거예요. 이게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어요. 그날 이후 조금씩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되면서 이듬해 집회를 통해 성령 체험을 한 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됐어요. 나를 좌절하게 하고 절망하게 했던 건 내 욕망이었구나. 예수님을 모르고 달려갔던 욕망이었음을 깨닫게 하신 예수님이 내 인생의 브레이크를 걸었어요.”

드라마 공모전 수상으로 드라마 작가의 길을 걷다

– 선교사의 소망은 언제부터 갖게 되었어요?

“그날 그 말씀이 나에게 와서 생명의 말씀이 된 순간, 펑펑 울었어요. 그때 기도했어요. 이제부터 다르게 살고 싶다고. 그런데 예배가 끝나고 몽골 단기 선교 광고를 하는 거예요. 그때 저도 가겠다고 손을 들었어요. 주위 분들이 얼마나 놀랬겠어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술 먹고 예배를 드리는 것도 모자라서 예배 시간에 우는 것도 모자라 몽골 선교를 따라가겠다니. 얼마나 난감했겠어요. 그런데 너무 감사하게 나를 받아주시고 함께 해주셨어요. 생전 처음 간 몽골 선교에서 나도 선교사가 될 수 있겠구나 막연하게 생각을 했어요. 하나님은 그 막연한 생각이 하나님의 소망이 되고 열매가 되기까지 시간 속에서 일하셨습니다.”

– 드라마로 써도 될 만큼 주님의 일하심이 너무 놀랍네요. 이후엔 어떻게 되셨어요?

“이후 탈북민 사역을 열심히 했어요. 드라마 작가라는 것도 잊을 만큼. 그러다가 하나님이 다시 방송 현장으로 복귀하라는 마음을 주셨어요. 북한 선교사로 조금씩 성장하면서 사역들이 확장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혼란스러웠죠. 그래서 만약 진짜 하나님의 뜻이라면 다시 공모전에 당선을 시켜서 방송 현장으로 복귀시켜달라는 기도를 했는데 또다시 공모전에 당선이 된 거예요. 그렇게 다시 드라마 작가가 되어 방송 현장에 복귀는 했지만 만만치 않았어요.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나 갈급한 거예요. 이러다가 죽을 것 같아서 순회선교단의 훈련을 받기로 했어요. 선교사로 파송받아 나가겠다 이런 마음보다 일단은 숨이라도 쉬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6주간 기쁨의 학교 훈련을 받으면서 총체적인 복음 강의를 들었어요. 이어서 선교훈련을 받으면서 시에라리온으로 아웃리치를 가게 됐어요. 선교 현장에 가보니 선교사에 대한 꿈이 더 커졌어요.”

<이상 301호에 게재>

“그런데 하나님이 불러주셔야 갈 수 있는 거잖아요. 아웃리치를 다녀온 뒤 중국 제작사 측과 드라마 계약을 하게 되었어요. 선교지로 보낼 줄 알았는데 말이죠. 그래서 내가 가지 못하면 나의 재정을 보내자 싶었어요. 주님이 나를 보내는 선교사로 부르셔서, 선교지를 지원하게 하시려고 이 계약을 하게 하셨구나 생각했어요. 그렇게 나 대신 재정을 보내면서 열심히 글을 썼어요. 편성논의가 되고 분주하게 바쁘게 일상을 살아가던 어느 날 ‘이제는 돈 보내지 말고 네가 가라.’는 마음을 주셨어요.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고 나가려고 그동안 너무 고대를 했는데, 막상 부르시니까 고민이 됐어요. 지금 작가로서 계약이 다 되고 안정적으로 일이 진행되고, 이제는 작가로서 이름도 날리겠다 싶었거든요. 해결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도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한꺼번에 정리를 싹 해주셔서 그렇게 2020년도에 시에라리온에 가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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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 선교에서 몽골 아이와 함께. 제공: 김봄 선교사

– 시에라리온은 어떠셨어요?

“작지만 피어있는 꽃들 책 서문에서 기록한 것처럼 시에라리온에 가기 전 많은 것을 열심히 준비했어요. 운동도 열심히 하고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더 많은 것을 갖고 가고 싶어서 열심을 내었죠. 그렇게 저의 힘과 열정으로 열심히 준비해서 간 시에라리온에서 저는 다시 복음을 들었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훌륭한 선교사가 되겠다고 희망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새삼스러울 것 없는 진리를 다시 들었어요. 하고 싶은 일이 많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못했어요. 대신 하나님이 일하셨습니다. 매일 하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매일 시에라리온 사람들을 만났어요. 매일 그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어요. 시에라리온을 사랑하기 위해 갔는데 시에라리온이 저를 사랑해주었어요. 제가 시에라리온에 간 줄 알았는데 시에라리온이 저에게로 온 것이었죠. 결국, 제가 선교를 당한 선교였어요. 저의 회복을 위해 예비해두신 하나님의 사랑이 시에라리온이었어요.”

아프리카 선교는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 시에라리온에 다녀오신 후엔 다른 곳으로 나가셨나요?

“시에라리온에 다시 가고 싶었어요. 당연히 시에라리온에 다시 보내실 줄 알고 재정비하면서 준비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사인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사인을 기다리면서 한국에서의 일상을 살았습니다. 글도 쓰고 일도 하고 교회의 지체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기도하면서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시에라리온이 아닌 탄자니아였어요. 그런데 아는 사람 하나 없고 평소 생각하지도 않은 나라여서 난감하기는 했어요. 탄자니아에 정말 보내시겠다면 구체적으로 말씀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중에 우연히 오래전에 스치듯 지나갔던 선교사님이 탄자니아에서 사역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혹시나 해서 연락을 했더니 역시나 하나님은 동역자 한 분 보내달라고 6년 동안 기도하신 선교사님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어요.”

– 탄자니아는 어떤 곳인가요?

“탄자니아는 고아와 과부의 나라에요. 미혼모들이 엄청 많아요. 탄자니아뿐 아니라 시에라리온도 그랬는데, 아프리카, 특히 무슬림 국가에서는 일부다처제 문화가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성교육이나 피임 교육이 전혀 돼 있지 않고요. 탄자니아는 남편이 아내를 맞으려면 지참금이 있어야 되는데 없으니까 일단 연애만 해요. 그러다 임신을 하면 도망가는 경우가 있어요. 지참금이 없어도 그냥 사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친정집에서는 지참금이 재산이기 때문에 너무 반대를 하는 거죠. 딸이 아이를 낳고 살고 있는데도 다른 남자가 지참금을 준다고 하면 딸을 다시 데리고 오는 경우가 있어요. 아니면 아이를 낳고 살다가 내 아이가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 쫓아내는 경우도 있고요. 현장 선교사님은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악습을 끊어야 된다고, 하나님이 이루게 하신 가정은 돈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치시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고통을 보게 하시고, 그 고통을 겪은 사람이 드릴 수 있는 기도를 하게 하시고, 그걸 기록하고 알리게 하셨어요.”

– 고통을 보시면서 고통을 함께 느끼시는군요.

“언젠가 캄보디아에서 직업여성들 사역을 하시던 선교사님이 저의 간증을 들으시고 캄보디아의 상처 받은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들려주고 싶다고 하시더라구요. 복음으로 회복된 상처투성이 나의 삶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될 수도 있다고 하니 너무 감사했죠. 그때 하나님이 선교사님들을 통해 나의 상처가 복음의 빛이 될 거라고 하셨어요. 탄자니아의 상처받은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데, 옛날 생각이 너무 많이 나는 거예요. 내가 상처를 받아봤기 때문에 그들의 상처를 더 잘 알 수 있었어요. ‘내 상처가 진짜 복음의 빛이 되었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셨구나.’ 하는 것을 선교 현장에서 느끼고 있어요. 내 상처가 이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건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아프지 않으면 드릴 수 없는 기도가 있거든요. 진짜 아파봐야 드릴 수 있는 기도가 있고, 그런 기도를 그녀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사랑이 명사가 아니라 동사가 되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나의 손과 발이 움직일 때, 그러다보니까 마음이 더 가는 것 같아요. 내가 아파봤으니까 마음이 더 가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인 것 같아요. 내가 고아가 되어 봤고 싱글맘이 되어 봤으니까, 그런 시절을 살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걸 깨닫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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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자니아에서 현지인 아이들과 함께. 제공: 김봄 선교사

– 앞으로의 계획과 기도 제목 말씀해주세요.

“현재는 탄자니아에서 있던 일을 글로 정리하고 있어요. 내년에는 탄자니아에 가서 과부와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자원 공동체를 계획하고 있어요. 이 일을 준비하기 위해 7월 다시 탄자니아로 향합니다. 일종의 탐방인 셈이죠. 선교지에서 깨달은 것은 하나님은 나의 사역이나 선교에 관심이 없다는 거예요. 나에게 관심이 있으세요. 선교 사역은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한 여정일뿐이지, 그것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목적이 돼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다시 선교지로 향하는 목적, 내가 글쓰기 사명을 감당하려는 목적은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가 되는 것이죠. 매일 아침 눈 뜨자마자 하는 기도는 어제보다 오늘 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인생이 되게 해달라는 거예요.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 소망의 사역들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 끝으로 기록하는 선교사를 꿈꾸는 이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먼저는 기록하는 선교사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기록하는 선교사가 필요해요. 기록하지 않으면 잊혀지기 때문이에요. 저는 우리 인생이 성경이 돼야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 인생을 통해서 쓰여진 하나님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 그건 모든 성도들이 해야되는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내 인생이 복음의 이야기고, 복음은 기록되고 전파돼야 하기 때문이에요. 저의 상처는 고통 속에 있는 영혼들에게 비출 수 있는 복음의 빛이 됐어요. 나의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봐야해요. 나의 인생은 하나님이 기록하는 복음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기록을 하라고 해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귀한 게 있는데 기억은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일단 뭐라도 써야 해요.” [복음기도신문]

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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