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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질문 잘하기: 신학자의 모델, 마리아처럼

▲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사진 : 유튜브 채널 Messages of Christ 영상 캡처

질문은 위험한 일이다. 근대에 들어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질문 자체를 두려워했던 신앙의 선배와 달리 질문의 가치를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질문을 잘한다는 게 무엇인지, 좋은 질문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

세상에 중립적인 질문은 없다. 질문은 들판에서 비누 거품을 날리며 노는 놀이가 아니다. 질문은 지적 생활의 기본 방식이며, 그만큼 세상과 하나님을 향한 전인격의 방향성을 형성한다. 우리가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사랑을 증언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마음, 의지, 생각, 심지어 육체까지 더 가까이 가도록 하거나 아니면 거기에서 멀어지게 하거나, 둘 중 하나다.

두 번의 기적적인 탄생에 대한 발표와 더불어서 두 번의 질문이 기록된 누가복음 1장에서 우리는 질문이 내포한 위험과 함께 좋은 질문이 가져다주는 약속을 만난다. 첫 번째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가랴 제사장의 회의적인 질문이고, 두 번째는 우리 주님의 어머니가 던지는 경건하고 신실한 질문이다.

사가랴의 회의주의

주님의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났을 때, 누가는 그 제사장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였다”(눅 1:12)고 말한다. 천사의 발표는 사실상 자녀가 없어 슬픔에 잠긴 이 남자에게 최고의 소식, 가장 좋은 소식의 하나이다. 세례 요한이 태어나면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14절).

하지만 사가랴의 질문은 회의적으로 들린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나는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18절). 사가랴는 결국 이 말로 인해 징계를 받는다. 사가랴의 신분을 상기시킨 가브리엘이 말한다. “보아라, 그 때가 되면 다 이루어질 내 말을 네가 믿지 않았으므로, 이 일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서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20절).

겉으로만 보면 사가랴의 질문은 매우 합리적인 거 같다. 그러나 그 질문에 담긴 내용과 형식을 보면 그가 책망을 받은 이유가 어느 정도 밝혀진다. 누가가 사가랴의 질문에 사용한 문법은 킹제임스 성경이 “내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라고 산뜻하게 번역한, 창세기 15:8에 있는 아브라함의 질문에 대한 칠십인역의 번역을 정확하게 인용한 것이다. 5절에서 아브라함은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고, 그 말씀을 믿었다. 그래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6절). 따라서 8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질문은 단지 자기가 땅을 차지할 거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알 수 있냐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가랴의 질문의 중심을 차지하는 건 선명한 불신앙이다. 사가랴의 지금 상황은 과거에 아브라함이 맡았던 역할을 잠재적으로 재현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아브라함이 성공한 바로 그 지점에서 사가랴는 실패했다는 점이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자식을 낳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 능력에 대한 확실한 약속과 더불어 앞으로 그가 그 땅을 “소유”할 거라는 다소 모호한 미래까지 믿었던 아브라함과 사가랴의 차이가 발생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아이를 낳을 거라는 말을 듣고 믿음으로 의로움을 인정받았다. 반면에 사가랴는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말에 어떻게 그걸 알 수 있을지 궁금해했다. 

로마서 4:17에서 바울은 창세기 15장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이 죽을 몸에 생명을 주시고 비존재를 존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증임을 분명히 밝혔다. 이는 다름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부활에서 드러난 바로 그 능력이다(롬 4:17; 8:11). 사가랴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와 재창조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한다. 

질문이 드러내는 것

거기서 그치지 않고 사가랴는 또한 하나님의 계시의 신뢰성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질문 때문에 징계를 받은 사가랴는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하나님의 길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행위는 벌을 받아야 한다. 가브리엘은 사가랴가 “그의 말을 믿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다른 이도 아니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천사가 앞에 있고 또 그 천사는 사가랴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라고 보냄받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사가랴는 믿지 않았다(눅 1:19-20).

사가랴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말씀 이상의 어떤 표준에 따라 확인하고자 했다. 그는 말씀이 스스로를 진리로 증거하는 자기 인증 능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질문은 겸손해 보이지만 근거 없는 불신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천사가 왔을 때 사가랴는 성전 대제사장이었다. 하나님의 신성한 계획 앞에서는 늙은 나이가 출산에 장애가 될 수 없음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천사가 제지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의 신뢰성에 대한 사가랴의 의심은 계속된 질문과 이런저런 말로 이어졌을 것이다. 

사가랴의 질문은 모든 질문이 다 옳지 않음을 분명히 상기시킨다. 세상에는 냉소주의와 의심을 키우는 태도와 그것을 반영하는 질문 방식이 있다.

사가랴의 경우에, 그가 쌓은 학문과 훈련은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계시의 실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우리는 그가 믿기 위해서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사가랴가 하나님의 약속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지에 대한 추가적인 확신까지 원했던 건, 노골적인 불신앙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마리아, 신학자의 모델

하지만 누가가 성육신에서 질문을 묘사하는 방법이 사가랴의 회의주의로 끝나지 않는다. 사가랴가 들었던 비슷한 천사의 발표 앞에서 마리아는 자신만의 질문으로 그 소식을 받아들인다. 

마리아를 향한 천사의 첫인사, “은총을 받은 자”라는 말에 마리아는 매료되었다. 누가는 마리아의 반응을 묘사하기 위해 두 가지 중요한 용어를 사용한다(눅 1:28). 첫째, 그는 철학자가 그러하듯이 마리아를 당황한 사람(ESV, “심각하게 혼란에 빠진”)으로 묘사한다. 이 용어는 신약에서 오로지 여기에만 나오지만, 크세노폰과 플라톤의 작품에서 혼란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런 다음 누가는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하는 행동을 마리아가 했다고 말한다. 즉 마리아는 천사의 선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별하려고 노력했다(29절).

마리아에게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 천사지만(30절), 누가복음 다른 곳에 천사가 나타나는 경우를 보면, 동산에 계신 그리스도(22:43)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가는 사람들이 두려워했다고 말한다(12절; 2:9, 24:5). 마리아가 당황했을지는 모르지만, 두려워하진 않았다.

대신에 그녀는 질문을 한다. 혼란을 헤쳐나감으로 내면의 혼란을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천사에게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묻는다(1:34). 그녀의 질문이 종종 사가랴의 질문 방식으로 번역되곤 하지만, 누가가 사용한 그리스어는 정확하다. 사가랴가 원했던 것은 천사의 말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사가랴가 똑똑히 알 수 있도록 천사가 사가랴에게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마리아는 천사의 약속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알고 싶어한다. 

그녀는 천사의 말이 이루어질 것임을 알기에 미래 시제 동사 “이뤄질까”를 사용한다. 그녀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이 사실인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없다. 그렇기에 그 말씀의 진실성을 확인하기 위한 독립적인 검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가랴의 질문이 의심을 나타내는 반면, 마리아의 질문은 믿음을 드러낸다.

더욱이 마리아가 질문하는 건 두려워서가 아니다.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 순응하기 위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싶어한다. 이해하고자 하는 그녀의 태도는 불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따르기 위한 준비이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를 굴복함으로 질문을 완성한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창세기에서 하와는 뱀의 속임수 앞에서 질문하기를 꺼렸고, 그 결과 모든 인류가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반면에 마리아는 천사에게 질문을 던짐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었다. 

마리아의 질문은 기독교 신자에게 패러다임이 된다. 최소한 질문하는 마리아는 신학자를 위한 신약성경의 모델이다(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다 신학자이다). 성경 공부를 사랑하는 마리아는 이미 천사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해하기 위해 믿었고, 순종하기 위해서 이해했다. 자신의 무지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녀는 모든 질문에 자유로웠다. 왜냐하면 그녀는 하나님의 계시가 자신과 이 세상에 유익을 가져올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질문 평가

우리는 질문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창세기 4장에는 두 가지 예배 방식이 등장한다. 아벨의 예배는 주님께 받아들여졌지만, 가인의 예배는 그렇지 않았다. 누가복음 1장에는 두 가지 탐구 방식이 나온다. 하나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니다. 

5세기 시리아 신학자 사루그의 야곱(Jacob of Sarug)은 이렇게 썼다. “보시오, 그대 신중한 사람이여, 세상에는 유익한 탐구가 있는 반면에 의심으로 인해 해를 끼치는 질문도 있습니다. 또한 질문을 던지나 진리의 편에 서므로 멸시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가 있는 반면에 단지 논쟁하는 자, 자신의 말로 인해 결국에는 망하는 자가 있습니다.” 

질문 속에 숨은 신실함을 식별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역설적이게도 사가랴는 자신의 방대한 지식의 정교한 과시 때문에 곤경에 빠졌다. 그가 가졌던 두려운 불안은 그로 하여금 더 깊이 성경을 파도록 했고 결과적으로 전혀 정답이 아닌 것을 정답이라고 오판하도록 만들었다. 대조적으로, 마리아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생소한 순간을 헤쳐 나가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와 말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진다. 그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그녀의 붙타는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이해를 목표로 하는 질문이 틀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가랴는 책망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소외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치유하기 위한 책망이다. 사가랴가 던진 불신앙의 질문이 누가가 그에 대해서 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다. 누가는 사가랴가 던진 어리석은 질문은 평소 신실하기만 했던 그의 삶에 찾아온 하나의 돌발상황이었다. 누가가 이를 기록한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마리아처럼 질문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사가랴처럼 질문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도록 하기 위함이다. 

질문의 기술을 습득하기란 어렵다. 인간의 마음이 워낙 깊어서 뚫을 수 없는 심연이며, 어둠과 속임수, 그리고 자기기만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오래전 그날 하나님의 말씀이 마리아의 마음을 찔렀듯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찌를 때, 우리는 종종 말씀 앞에서 혼란과 불확실성, 그리고 주저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 순간이야말로 마리아처럼 신실함과 믿음으로 말씀 앞에서, “주님, 이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이까?”라고 질문하는, 하나님의 약속 앞에 설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이다. 그래야만 우리도 마리아와 함께,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라고 말할 준비가 될 것이다. [복음기도신문]

원제: Mary, Model Theologian: Learning to Question Well 

매튜 리 앤더슨 Matthew Lee Anderson | Baylor University Honors Program의 윤리와 신학 연구 부교수이다. Mere Orthodoxy의 설립자이고, Called into Questions: Cultivating the Love of Learning in the Christian Life의 저자이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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