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이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몇 주 전 나는 목사와 성경학자가 종종 ‘죄인 안내서’(The Sinner’s Guide)라고 부르는 본문, 시편 51편을 가지고 설교했다. 흔히 다윗의 시편으로 알려진 이 본문은 다윗이 밧세바와 범죄한 이후, 선지자 나단에게서 책망을 들은 후에 쓴 글이다. 그러니까 다윗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도덕적, 영적 재난에서 회복되는 과정에서 쓴 시편이라는 의미이다. 설교에서 나는 다윗이 밧세바를 강간하고 그녀의 남편을 살해했다고 말했다. 살인에 관해서 반론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강간은 그렇지 않았다. 몇 명이 와서는 정말로 다윗이 밧세바를 강간한 게 맞냐고 내게 물었다.
다윗이 정말 밧세바를 강간했는가?
흔히들 그 이야기를 끔찍하고 죄 많은 일종의 “비열한 사건” 정도로는 생각하지만, 강간이라는 엄청난 범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거 같다. 합리적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강간이야말로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죄에 매우 가깝다. 따라서 우리가 강간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리처드 데이비슨(Richard M. Davidson)의 설명이다.
성인과 미성년자 사이의 성관계, 심지어 미성년자가 “동의”했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그건 “법정 강간”으로 불린다. 마찬가지로 다윗과 그의 아랫사람인 밧세바 사이의 성관계는 (설혹 밧세바가 권력자가 주는 심리적 압박 때문에 성교를 묵인했다고 하더라도) 성경적 법 테두리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야기 속 두 사람의 성관계는 강간으로 보는 게 맞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사건을 “위계에 의한 강간”이라고 부르며 책임은 피해자가 아니라 오롯이 가해자에게 있다.[1]
다윗 왕은 무장한 군인을 보내어 밧세바라는 신하를 방으로 데리고 왔다. 이런 식의 행동은 모든 문명 국가에서 강간으로 간주된다.
다윗은 강간범이다.
강간죄를 숨기기 위해서 그는 살인까지 저질렀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에서 명확하게 다뤄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윗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이 시편의 처음 5절에서 다윗은 죄와 관련해서 가능한 모든 히브리어를 사용한다. 죄를 합리화하거나 최소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1절에서 그는 히브리어 “페샤”(pesha)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성경에서 흔히 “허물”(transgressions)로 번역된다. 말 그대로 인간이나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하는 것을 의미한다.[2]
다윗은 자신이 반역자임을 인정한다. 악한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이 그어놓으신 여러 개의 한계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
2절에서 그는 “죄악”(iniquity)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 “아온”(aon)을 사용했다. 죄책감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한데, 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다윗은 자신이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가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은 죽음이었다. 다윗은 그 사실을 알았을 뿐 아니라 기꺼이 인정했다. 그리고 그 사실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다.
2절에서 그는 히브리어 “카타아트”(khatta’ah)라는 또 다른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 단어는 “죄”(sin) 또는 “악”(evil)으로 번역된다.
다윗은 자신이 악한 일을 저질렀다고 말한다. 더 중요한 사실은 자신이야말로 악한 사람이라고 그가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흔히 듣는 소위 말하는 고백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욕먹는 정치인과 스포츠인이 자주 쓰는 말이 있다. “판단에 오류가 있었다.” “실수였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이런 식의 단어를 칭찬하지 않는다. 머핀 반죽에 설탕을 한 컵 대신 두 컵을 넣었다면, 그건 실수이다. 그러나 이웃을 강간하고 그 남편까지 죽이는 것은 악이다.
다윗은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나단 선지자 앞에서도 또 하나님 앞에서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 주님께 자비를 구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약속을 근거로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했다. ESV에서 “변치 않는 사랑”으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헤세드”(khesed)이다. 그것은 “언약적 사랑” 또는 “신실한 자비”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창세기 15장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 자신이 둘로 쪼개진 제물 사이를 통과하며 피의 길을 걸으셨다. 사실상 인간이 저지를 미래의 불순종과 관련된 저주를 스스로 짊어지시겠다는 의미이다. 다윗은 그 사건을 기억했다. 그리고 약속대로 자신에게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이며 이전에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근거로 하나님께 나아갔다.
우슬초에 대한 언급은 유월절 이야기에 대한 암시이다. 출애굽기 12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라고 명하신다.
유월절 이야기에 따르면 어린 양의 피 아래 피난처를 찾은 사람은 누구나 이집트인에게 내려진 심판으로부터 안전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을 위해 유월절의 은혜를 주장하고 있다.
“어린 양의 피 아래 나를 숨기소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좋은 회개이다.
다윗은 끔찍한 죄인이었다.
다윗은 강간범이자 살인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동시에 선한 회개자였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고, 자신의 죄를 미워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죄에서 돌이키고 주님께 자비를 구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근거해서 또한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약속을 근거로 다윗은 자비를 구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은혜를 받았다.
그의 이야기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추하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추악한 죄와 아름다운 구주의 이야기이다.
너무도 정직한 성경 내용에 마음이 상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다 추악하고 비열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잘못된 상황에 처하고 또 잘못된 시기를 만나면, 인간은 누구나 사악하고 악한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우리는 치유 받을 수 있다. 용서받고 강건해지며 회복될 수 있다.
다윗에게 가능했던 그 은혜의 기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가능하다.
지금, 죄를 회개하라. 어린양 보혈을 붙잡고 용서를 빌라. 그리하면 구원받을 것이다.
이게 바로 복음이다.
이것이 자비하심이다.
옛 언약이요 또 새 언약이다.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복음기도신문]
[1] Did King David Rape Bathsheba? A Case Study in Narrative Theology in Journal of the Adventist Theological Society, 17/2 (Autumn 2006): 81?95. Article copyright ⓒ 2006 by Richard M. Davidson.
[2] KM Hebrew Dictionary, Accordance Version, H7322.
원제: Did King David Rape Bathsheba?
폴 카터 Paul Carter | 1994년부터 사역을 했다. Fellowship and Canadian Baptist churches를 섬겼고 지금은 Cornerstone Baptist Church의 대표목사이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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