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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 칼럼] 나도 선교사다

사진: Unsplash의 Elianna Gill

얼마 전에 중국과 카자흐스탄에서 30여 년 이상 선교사로 있던 <김부식> 선교사가 날 찾아왔다. 김 선교사는 자신이 편집한 책이라면서 GMS의 원로 선교사들의 선교 활약과 회고를 엮은 선교사 열전 <도전과 열정>이라는 책을 내게 주었다. 나는 이 책을 받고 몇 날을 새벽 2시까지 여러 차례 읽고 완독했다. 이 책은 선교사들의 살아 있는 간증이요, 선교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자 말 그대로 도전의 책이요 열정의 책이었다.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여러 차례 가슴이 뭉클한 감동이 많았다. 선교사들이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일했던 생생한 기록은 한국교회의 선교역사 자체라고 본다.

사실 나는 편집자인 김부식 선교사뿐 아니고, 이 책에 글을 낸 선교사들 모두가 나와 관련이 있고, 익히 아는 분들도 많았다. 특히 30여 년 전에 김부식 선교사가 중국의 장애인 선교를 위해서 큰 뜻을 품고 떠나려고 할 때, 그는 내게 말하기를 “재정 부담은 안 줄 터이니 <김부식 선교사의 파송 위원장>으로 맡아 달라!” 하기에 허락을 했다.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총신 총장을 역임한 분의 이름이 들어가면 선교에 유익하다고 졸라서 나는 선뜻 허락하였고 얼마간 모금 운동에 도움도 주고 위원회에 참석한 것뿐이다. 그 후 세월이 많이 흘렀다. 김부식 선교사는 총신에서 공부하던 시절부터 나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약간의 장애를 갖고 있었지만 그는 못 하는 것이 없는 만능 예능인이었다. 그는 작곡, 성악, 미술, 서예, 시 등 모든 방면에 가히 천재적이었고, 그의 사모님 또한 피아니스트였고 장구춤, 찬양, 가야금 등이 수준급이었다.

나는 두 분의 결혼주례를 했고, 첫아들을 낳고 찾아와 이름을 지어 달라 하기에 <규진>이라고 지었다. 그 규진이가 지금은 어엿한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그들은 선교지에 가 있으면서도 새해가 되면 내게 안부 전화를 잊지 않았던 부부였다. 사실 나는 53년 전에 네덜란드 암스텔담 뿌라야 대학에 공부할 때, 당대의 세계 최고의 선교학자들 밑에서 공부했었다. 칼빈주의와 실천신학을 공부하는 중에 당대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선교신학자 요하네스 벨까일(Johannes VerKuyl) 박사 아래 공부했다. 그리고 선교 신학을 학문적으로 정리한 요한네스 뿌라우(J. Blauw) 박사 아래서도 공부했다. 그리고 당대의 선교 역사학의 대가인 얀 반덴버그(J. Van den Berg)과 뮬더(D.C Mulder) 교수에게도 사사했다. 이분들은 모두 헨드릭 크레머(H. Kraemer)와 바빙크(J. H. Bavink) 이후에 일하던 최고의 학자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학문적으로 선교학을 공부했을 뿐, 선교에 대한 소명은 전혀 없었다. 선교는 현장의 사역이지 학문이 아니라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선교사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총의 손길에 붙잡혀야 할 수 있는 일이다. 1976년 나는 유학을 마치고 총신대학교 조 교수로 복귀되었을 때, 나는 <실천신학과 칼빈주의>를 가르치면서 복음에 빚진 자로서 이방인 선교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교수는 학문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본업이었던 차에, 학교에서는 나를 선교학회 지도교수로 임명했다. 그래서 나는 1976~1978년 동안 당시 총신의 학생들에게 선교의 불을 질렀다. 학생들은 점심시간에 대게 60여 명이 모여 선교의 열정을 불태웠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다. 내가 <도전과 열정>에 나오는 선교사들의 면모를 보면서 모두 40여 년 전에 나와 함께 기도했던 그분들이 선교사로 나갔고, 지금은 모두 원로 선교사와 은퇴 선교사가 되어있다. 그 시절 나는 정윤진 선교사 후보생, 김의정 선교사 후보생과 함께 2회, 3회 <세계선교대회>를 주관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1980년부터 내가 총신대 총장이 되자 나는 학교를 국제화하기 위해서 외국인들을 받아드렸다. 총신의 외연을 넓히고 세계선교의 꿈을 키우기 위해서 여러 나라 학생들을 불러 모았다. 필리핀의 르므엘 달리사이를 최기수 선교사가 데려왔지만, 그는 한국말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교수들은 영어로 소통이 안되었기에 공부가 어렵고 그냥 구경하는 수준이었다. 몇 해 전에 필리핀 장로회 신학교(PTS, 1983)를 세울 때, 내가 첫 번 교수로 갔었고, 그 이후로도 여러 번 강의를 했었다. 그때 르므엘이 내 강의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총신에서 졸업할 수 있는 학점이 안되었다. 그래서 교수 회의에서는 그에게 졸업 불가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그때 나는 교수들에게 “<선교를 위해서> 르므엘를 ‘신예과’로 해서 학사학위 모자를 씌워주자”고 설득했다. 그 후 그는 필리핀 장로회 총회장이 되었고, 대형교회를 일구었고 나는 그 교회에 가서 설교도 했다. 그 후 나는 정홍기 목사와 함께 AFC를 창설하고 동구권에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선교는 직접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재를 데려다가 훈련시킨 후에 자국에 가서 일하도록 하는 선교도 중요하다. 이것은 요한 칼빈(J. Calvin) 목사의 방법이다. 선교란 말조차 없던 그 시절, 칼빈은 1559년 제네바 아카데미(Geneva Academy)를 세웠다. 이곳은 <신학센터>이자 <선교센터>였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유럽 각국의 인재들이 유학하고 개혁주의 신앙을 배워 그 나라들을 복음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칼빈은 세계최초로 위그노파 목사 두 분을 직접 브라질에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나는 지난 40여 년 동안 <한국칼빈주의 연구원>에 학생들을 불러 모아 교육시켜, 자기들 고국에서 일하도록 했다. <필리핀>, <케냐>, <이집트>, <러시아>, <미국>, <영국>, <독일>, <일본>, <파키스탄>, <스리랑카>, <인도> 등의 학생들에게 아내가 매주 비빔밥과 카레 라이스를 번갈아 먹였고, 성경공부, 찬양, 상담을 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특히 인도의 Roy 형제들이 총신에 다닐 때, 매주 토요일을 우리 집을 개방하고 제 3세계 학생들을 가르치고 도왔다.
그러니 <나도 선교사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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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 박사 | 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40여년간 목회자, 설교자로 활동해왔으며, 최근 다양한 국내외 시사를 기독교 세계관으로 조명한 칼럼으로 시대를 깨우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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