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한 여성 강제 낙태, 남성은 정관수술 시행
의료·생활 사각지대…”종합 간호 제공하는 통합 요양기관 필요”
편집자 주 = 평생을 '문둥이'로 천시받으며 사회와 격리된 채 '없는 사람처럼' 숨어서 살아온 나환자(한센인)들이 늙고 병들어 죽어가지만, 그들을 반기는 곳은 없다. 이들을 받아주는 의료기관과 요양시설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조직이 괴사해 손가락이나 코가 뭉툭하고 눈동자가 빨개지는 나병을 '하늘이 내린 형벌(천형·天刑)'로 받아들이며 온갖 냉대와 차별, 사회적 낙인을 견디며 살아온 한센인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이다. 완치됐음에도 '병이 옮을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 탓에 그들은 세상과 격리된 채 정착촌에서 제대로 치료도, 요양도 받지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는 이들의 치료받을 권리와 존엄한 삶의 마무리를 위해 전국 최대 규모의 한센인 정착촌인 전북 익산시 왕궁지역의 의료 실상과 대안 등을 3편으로 나눠 송고한다.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단종대’라는 제목의 이 시는 25살의 나이에 강제 정관수술을 받은 이동(李東)이란 청년이 썼다.
1950∼60년대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서 강제 노역을 거부하거나 탈출을 시도한 한센인은 감금실에 끌려가 체벌과 금식 등의 징벌을 받았다.
감금실에서 나온 환자들은 무조건 바로 검시실로 보내졌는데, 거기서 살아나온 남자는 생식기능을 없애는 단종(斷種·정관절제) 수술을 받아야 했다.
“아무렇지 않게 인권유린이 자행된 소록도는 생지옥 같았지. 전쟁터 같은 거기라고 사랑이 왜 없었겠어.”
소록도를 거쳐 음성판정을 받고 전북 익산시 왕궁면 한센인 마을에 정착한 지 50년이 됐다는 김미정(85·가명) 할머니.
그는 나병이 확인된 16살에 소록도에 들어가 20살에 그곳에서 사랑하는 젊은이와 결혼하고 임신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지는 못했다.
‘유전’이나 ‘감염’을 이유로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하려는 국가에 의해 임신한 여자는 강제 낙태 시술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한센병은 유전자 질환이 아니며 태아에게 전염되지도 않는데도 말이다.
강제 낙태의 대가로 김 할머니가 받은 돈은 고작 4천만원이다.
그것도 한센인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낙태 피해자에게 4천만원, 단종 피해자에게 3천만원씩을 배상하라’는 2017년 대법원의 판결 덕분이었다.
강제 낙태를 당한 지 60년 만에 한센인 강제 단종·낙태 수술에 국가가 배상 책임이 있다고 인정한 첫 대법원 확정이 나왔을 때 그는 방 안에서 소리 없이, 그리고 밤새 울었다고 했다.
“모진 세월을 살아온 대가가 4천만원이라는 것이 허망하기도 했지만, 강제로 빼앗긴 인권을 뒤늦게나마 인정받고 되찾은 거 같아 슬프고도 기뻤다”고 회고했다.
설령 감시의 눈을 피해 몰래 아이를 낳았다 하더라도 직접 키울 수는 없었다.
당시 한센인들은 자식을 낳으면 직원들이 생활하는 미감(未感)시설로 보내졌고, 아이와 부모는 한 달에 한 차례만 도로 양편으로 갈라서서 만날 수 있었다.
이장우(83·가명)씨는 “만날 때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부모와 자식의 자리는 뒤바뀌었다”며 “자녀들은 바람을 등지고, 부모는 바람을 맞는 쪽에 있었다”고 말했다.
혹여 바람에라도 병균이 실려 올까 봐 그랬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부모들이 도로를 따라 죽 지나가면서 반대편에 있는 자기 자식의 얼굴을 얼마간이라도 겨우 볼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정부가 격리나 차별을 해제한 것은 병이 유전되지 않는다고 판명된 1990년 중반을 지나면서부터다.
하지만 그들은 여태 살아오던 삶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현재’를 살고 있다.
외부의 수모, 차별, 멸시에 80세 안팎인 그들은 지금도 스스로를 가두며 삶을 지탱하고 있다.
그런 자격지심에 이제껏 버스나 기차 한번 타보지 않은 한센인도 적지 않다고 한다.
왕궁지역 한센인 대부분은 자녀가 없다.
설사 자녀가 있는 경우라도 대부분이 사회의 천대를 못 견디거나 ‘한센인 부모’라는 낙인 탓에 취직이나 결혼이 어려워 가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는 아이가 어릴 적부터 지인이나 친척의 호적에 올린 뒤 아예 부모-자식 간의 인연을 끊고 죽을 때까지 남남으로 산다.
이런 이유 등으로 누구보다도 서로 사정을 뻔히 아는 이들은 왕궁지역에 모여 돼지 등 축산업을 하며 평생을 살아왔다.
고령과 장애로 일을 하기 힘든 이들 대부분은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이며 모진 고문과 학대, 단종과 낙태 피해를 인정받아 매월 17만원을 받는 ‘한센인 피해 사건 피해자 위로 지원금 수급자’이다.
한센인 간이양로 주택에 지원되는 식비도 끼니당 900원에 불과하다.
이씨는 “사실상 자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서로가 보호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혈연보다 끈끈하게 의지하며 고단한 삶을 지탱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일그러진 외모와 전염병이라는 오해로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매번 쫓겨나다시피 하는 한센인들은 갈 곳도 없고, 이제는 다들 늙고 병들어서 옆 사람을 돌봐주기도 벅찬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전북지역에는 한센인 전문 의료기관이 한 곳도 없다”면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간호를 제공하는 통합 요양기관을 마련해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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