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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TGC 칼럼] 절망의 시대를 이기는 기독교 변증

사진: Hide Obara on Unsplash

C. S. 루이스가 쓴 그 가공할 힘에 나오는 마크는 자신의 삶을 “먼지와 부서진 병, 오래된 깡통 더미와 건조하고 숨 막히는 곳”으로 묘사한다. 아내와 함께 마크는 근대성이 의인화된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의 신념은 오늘날 많은 세속인을 대표한다. 하지만 플롯 속 사건을 통해 점차 초월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마크는 투옥되어 심리적 고문을 받는 동안 심오한 도덕적 경험을 한다.

신맛과 비뚤어짐을 배경으로 달콤함과 올바름에 대한 어떤 비전이 일어났다. 그가 막연하게 “정상”이라고 부른, 뭔가 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이전에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게 거기에 있었다. 단단하고 육중하며 고유한 모양까지 갖고 있어서 만지거나 먹을 수 있거나 심지어 사랑에 빠질 수도 있을 거 같았다. 그것은 제인과 달걀부침, 비누, 햇빛, Cure Hardy에게 꽥꽥대는 당까마귀, 그리고 그 순간 바깥 어딘가에서 햇빛이 비치고 있다는 생각과 뒤섞였다.

내가 쓴 글에서 종종 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도덕적 논증을 만드는 맥락에서 이 구절을 사용했다. 그러나 보다 더 일반적으로 볼 때, 이것은 현대의 절망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교리(또는 객관적 선 개념과 같은 하나님에 대한 교리의 한 가지 함축)로 극복될 수 있는지에 대한 놀랍도록 창의적인 문학적 표현이다. 많은 후기 현대인에게 복음을 접하는 것은 “건조하고 숨 막히는 곳”에서 “달걀부침과 비누와 햇빛”으로 전환하는 경험이 될 것이다. 평탄함에서 충만함으로, 환멸에서 새로운 매혹으로, 회색빛 칙칙한 세상에서 생명과 색깔로 가득한 세상으로의 전환처럼 느껴질 것이다.

현대의 절망을 이해하라

찬사를 받은 저서 A Secular Age(세속 시대)에서 찰스 테일러는 현대 시대의 환멸과 의미 상실의 문제에 주목했다. 이 현상은 역사적으로 최근에 발생했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이 문제를 직관적으로 이해하지만, 오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전 근대인도 분명히 절망을 느꼈겠지만, 일반화된 절망감은 후기 근대 서구를 특징짓는 독특한 역사적 발전이다. 테일러에게 그러한 절망은 특히 초월의 쇠퇴와 자아 개념의 변화라는 또 다른 형태의 발전이 가져다준 결과이다. “우리의 행동, 목표, 성취 등등에는 아무래도 무게와 중력 그리고 두께와 실체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주는 절망이다.

현대 절망의 본질을 탐구함으로 우리는 복음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의 희망을 가시화할 수 있는 신선하고 흥미로운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전통적인 초월의 근원에서부터 점차 스스로를 단절시킨 세계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결과 우리의 경험은 종종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큰 황량함과 환멸감을 특징으로 한다. 자각하지도 못한 채 절망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주변 문화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항상 접하는 문화를 평범하게 느끼는 건 당연하다. 문화는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라 통해서 보는 안경이다. 예를 들어, 대학에 가기 전까지는 자기 가족이 역기능 가족이었음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던 어떤 십대처럼, 실제로 대안을 경험하기 전까지 우리는 “건조하고 숨 막히는 곳”에서 살고 또 그 안에서 움직였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답이 되는 기독교에서 팀 켈러는 대부분의 현대인이 너무 불행하기에 불행의 본질을 완전히 깨닫는 데에는 몇 년이 걸린다고 지적했다.

대체로 우리는 깊이와 크기 또는 불만을 부정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 가장 신랄하게 이야기하는 예술가와 사상가는 병적인 예외로 간주되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내는 건 예언적 목소리이다. 인생에 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불만의 크기와 차원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부정하는 심리부터 버려야 하는데, 거기에는 보통 몇 년이 걸린다.

절망의 문제는 실존주의 철학이 중점적으로 집착한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많은 “새로운 무신론자”(예를 들어 샘 해리스)는 보다 활기차고 낙관적인 무신론의 소유자이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인간은 얼마든지 연민과 인권 같은 객관적인 도덕성과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전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눈에 무신론은 일반적으로 도덕적이고 심리적 절망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었다.

예를 들어, 실존주의에 관한 유명한 에세이에서 장 폴 사르트르는 신과 별개로 객관적인 도덕성을 유지하려는 초기 프랑스 무신론자들의 노력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실존주의자는 …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극도로 부끄럽게 생각했다. 지성이 작동하는 천국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그 순간 모두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에게 초월적 의미의 상실은 삶의 부조리를 수반했다. 카뮈는 인간의 존재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에 비유했다. 영원히 언덕 위로 돌을 굴리지만, 매번 다시 떨어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운명에 처한 시지프스.

무신론에 의해 도입된 혼돈과 분열의 감각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유명한 “미치광이” 우화에서 강력하게 전달된다. 이 인물(일반적으로 니체를 상징한다고 간주된다)은 시장으로 달려가 외친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 “난 당신에게 말하겠다. 우리는 신을 죽였다. 당신과 내가 죽였다. 우리는 모두 신의 살인자이다. 하지만 이게 어떻게 가능했나? 어떻게 바닷물을 마실 수 있는가? 저 지평선 전체를 쓸어버리는 스펀지를 누가 우리에게 주었는가? 태양으로부터 이 지구를 풀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지구는 지금 어디로 움직이는가? 우리는 어디로 이동하는가? 모든 태양에서 멀리? 우리는 계속해서 추락하고 있지 않은가? 뒤로, 옆으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로? 여전히 위 또는 아래가 있는가? 우리는 무한한 무를 통과해서 방황하지 않는가? 허공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가? 더 추워지지 않았나? 밤이 점점 더 다가오지 않는가?”

현대 절망의 아우라가 이러한 은유 속에 잘 포착되어 있다. 지평선을 없애고, 지구를 풀고, 허공으로 뛰어드는 등. 많은 현대인이 이유는 몰라도 니체가 그린 이런 식의 심상이 드러내는 감정에 공감한다. 실제로 21세기 세속적 사고가 19세기와 20세기 실존주의적 사고에 반영된 기본적인 갈등을 능가하지 못했다고 믿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비록 깊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절망이 여전히 현대 문화의 뿌리 깊은 요소임은 분명하다.

이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생각 실험을 살펴보자. 21세기 맨해튼 은행가가 타임머신을 타고 천 년 전 서유럽의 한 수도원으로 여행했고, 그 수도원의 수도사 중 한 명이 타임머신을 타고 21세기 맨해튼으로 여행했다고 상상해 보자. 한 계절 동안 두 사람이 서로 자리를 바꿨다. 누가 문화적 충격을 더 크게 받을까? 누가 혐오감과 불쾌감을 더 강하게 느낄까?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고 잘 지낼 가능성이 높은 쪽은 과연 누구일까?

의심할 여지 없이 시간여행은 두 사람 모두에게 든든한 경험이 될 것이다. 그리워할 게 많은 21세기 세계인답게 은행가는 새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할 게 많다. 나는 과거를 마냥 낭만적으로만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특히 인간의 마음에 관한 문제에서, 나는 수도승이 발견할 21세기 세상이 그가 살았던 세계보다 더 빈곤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더 연결되어 있지만 더 외롭다. 수명이 길어졌지만 그만큼 자살률도 높아졌다. 더 많은 기회가 있지만, 불안과 우울증도 급증한다. 우리의 세계는 분명히 더 화려하다. 그러나 수도사의 세계에는 우리가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도 모른 채 살아가는 의미와 풍요로움이 있었다.

요약하면, 근대성의 특징은 초월적 의미의 상실이다. 이 사실은 종종 무의식적으로 또는 반의식적으로까지, 우리 삶에 심오한 영향을 미친다. 막연한 황량함의 구름 아래 살고 있지만, 우리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를뿐더러 거기에 대한 대안이 있는지조차도 모른다. 단지 “절망”이라는 단어로 현대인의 갈등을 표현하는 건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로움, 중독, 안절부절못함, 우울증, 지나치게 바쁘고 산만한 삶의 이면에는 깊고 요동치는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다. 마크처럼 우리도 “먼지와 부서진 병, 오래된 깡통 더미와 건조하고 숨 막히는 곳”에서 살고 있다.

그런 현실이 복음을 경험하고 전달하는 방법에 대해서 무슨 의미를 갖는가? 절망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변증해야 할까?

복음이 절망을 대하는 방식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1983년 템플턴 상 수상 연설은 유명하다. 그는 먼저 20세기 폭력이 가져다준 끔찍한 공포를 이야기하고, 모든 공포의 원인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을 지적했다. “오늘 내가 우리 인민 육천만여 명을 삼켜버린 파멸의 혁명이 가능하게 만든 근본 원인을 가능한 한 간결하게 서술하라는 요구를 받는다면, 다음 말을 되풀이하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20세기의 폭력과 관련해서 솔제니친의 진단이 사실인 것처럼, 21세기의 절망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절망을 다루는 데 교회의 존재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은 아니다. 반대로, 현대인에게 의미 있고 진정성 있게 복음을 전하려면 지혜와 더불어 성령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특히 절망의 시대에 복음을 설득력 있게 만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 복음의 충만함을 선포하라

바울의 말처럼, 복음 메시지의 핵심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이다. 그러나 바울 자신조차도 복음을 맥락에 따라서 다르게 전달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그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는 핵심 전략은 다양한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 구약의 예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언한 다음에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그러나 사도행전 17장,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는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취했다. 이교도 환경에서 바울은 하나님과 창조의 교리로 더 거슬러 올라갔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이교도들의 시인을 인용함으로써 그들의 세계와 연결할 다리를 놓을 창의적인 방법을 찾았다.

오늘날 우리는 점점 더 사도행전 17장의 문화 속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창조라는 더 큰 맥락에서 복음을 설명하는 바울에게서 배워야 한다. 상대가 기독교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할 경우,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는 많은 현대인에게 이해하기 어렵거나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사도행전 17장의 맥락에서 사도행전 13장의 메시지를 설교하는 것과 같다. 존 스토트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설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복음을 거부하는 이유가 복음이 거짓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복음이 사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경험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통합된 세계관을 찾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 없이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없고, 창조 없이는 십자가를 전할 수 없으며, 심판 없이는 구원을 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바울에게서 배운다.

환멸과 절망의 시대를 사는 변증가로서 우리는 복음이 함축하는 모든 의미가 현대인의 마음속 가장 깊은 갈망 및 고민을 반영하도록 전달해야 한다. 가장 기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현대의 절망에 대한 해답으로 인식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가르쳤듯이, 하나님만이 인간의 마음을 채우는 안식과 성취의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원천이다. 현대인의 절망에 있어서 하나님은 배고픈 자에게 주어지는 음식과 같다. 오직 그분과 연결될 때만 우리는 건조하고 숨 막히는 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죄를 용서받는다는 게 복음인 이유이다.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 자신과의 교제 안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사도행전 17장에서와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에서도 불신자가 이러한 다양한 포인트를 제대로 연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절망의 시대에 복음을 전파하려면 인내와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전도는 점점 더 길고도 복잡한 과정이 될 것이다. C. S. 루이스의 마크를 다시 생각하자. 감옥에서 “정상”을 만난 후에야, 그는 그리스도께 응답할 수 있는 위치에 놓였다. 루이스의 회심도 비슷하다. 그는 유신론으로의 여정을 길고 느린 체스 시합에서 진 것에 비유했다. 1929년에 유신론자가 되고도 이 년이 더 지난 1931년에 가서야, 그는 마침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리스도가 당신의 죄 때문에 죽었다”는 1925년 또는 1927년 당시만 해도, 루이스 생각에 자신에게 그다지 필요한 메시지가 아니었다. 우리가 친구, 직장 동료, 가족, 그리고 이웃과 함께 복음의 여정을 시작하는 지점에서도 그 메시지는 아직 시기상조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에 놓인 과제의 막중함을 인식해야 한다. 절망의 시대에 변증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감각, 영원과 영광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도록 돕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는 메마르고 숨 막히는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바울처럼 우리도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그 대상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행 17:23). 우리는 그 과정에서 매 순간 성령님에게 의지해야 한다.

2. 복음의 아름다움을 선포하라

그리스 철학자들은 선과 진리와 아름다움이라는 세 가지 초월성을 놓고 논쟁했다. 현대 변증학은 주로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선함과 아름다움도 함께 강조했다. 이런 변증은 인간과 관련해서 훨씬 더 포괄적이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자주 인용하는 유명한 팡세의 구절을 보자. 파스칼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 필요한 세 단계 전략을 제안했다.

인간은 종교를 경멸한다. 종교를 싫어하고 종교가 진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워한다. 이에 대한 치료법은 먼저 종교가 이성에 반하지 않고 경외와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으로 종교를 매력적으로 만들라. 그래서 선량한 사람들이 종교가 진리이길 바라게 만들다. 그런 다음에 종교가 진리임을 보여주라.

요약하면,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전에 기독교가 존경할 만하고 바람직하다는 것을 먼저 보여주라는 게 파스칼의 주장이다. 이런 접근 방식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복음에 대한 선천적이고 자연스러운 저항 때문에 필요하다. (“종교를 싫어하고 종교가 진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워한다.”)

파스칼식 접근은 절망의 시대에 필요한 변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가 맞는 가장 큰 도전은 날카로운 반론보다는 훨씬 더 자주 만나는 무관심과 산만함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울리는 스마트폰 알람과 소음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영혼의 문제에는 둔감하다. 그래서 많은 현대인이 복음이 진리이냐 아니냐에는 관심조차 없다. 따라서 우리는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왜 복음이 고려할 가치가 있는지를 이해하도록 기초부터 도와야 한다. 이를 위해 복음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복음의 아름다움은 청중의 무관심을 제거함으로 그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

예를 들어, 절망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별을 보고, 음악을 듣고, 또 문학을 읽으며 깊은 종교적 갈망을 경험한다. 찰스 테일러는 믿음을 포기하게 만드는 현대의 경향을 설명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지만, 그런데도 더 많은 무엇인가가 나를 압박한다는 느낌이 있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느낀다. 삶이 무엇인지 고찰하는 순간에, 자연에서 휴식을 취하는 순간에, 사별과 상실의 순간에, 그 느낌은 매우 격렬하고 예측할 수 없다. 편안한 불신앙에 안주하기에 우리 시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 불안은 끊임없이 표면으로 떠오른다.

테일러의 주장은 이것이다. 변증이 현대인의 마음에서 때때로 표면화되는 “불안”을 건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 마음속 깊은 갈망과 관련해서 복음을 위치시켜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세속의 주문을 깨는 것과 비슷하다. 루이스는 이 세상 너머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인간의 깊은 열망을 언급한 후에 이렇게 말했다. “당신과 나는 거의 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온 세속적인 악한 마법에서 우리를 깨우기 위해 찾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주문이 필요하다. 오늘날 거의 모든 교육은 진리를 찾으려는 이 수줍고 끈질긴 내면의 목소리를 침묵시키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

절망의 시대에 변증이란 인간의 욕망에 대한 세속적 설명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세속적 사람들은 사랑과 정의 속에 담긴 초월적 가치를 느끼는 인간의 선천적 인식과 결별하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세속적 세계관에서는 그들이 그 가치를 도대체 어디에서 얻는지 찾기란 매우 어렵다. 보통 환원적 방법을 통해 진화심리학의 산물로 설명하곤 한다. 이런 식이다. “우리는 사랑과 정의와 같은 가치가 우리의 조상인 동물이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비생물학적 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객관적인 관련성이란 있을 수 없으며 최종적 해결 또는 궁극의 의미도 없다.

찰스 테일러는 이와 같은 긴장을 “현대성이 잠재우지 못한 경계”라고 부른다. 간단히 말해서, 세속적인 사람들이 세속주의 내에서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야 하는 종교적 자질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최근 들어서 왜 그토록 다양한 형태의 “종교적 비신론(nontheism)”이 등장하는지를 잘 설명한다. 변증의 과제 중 일부가 바로 이런 모순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불신자가 세속적 세계관의 결과인 메마름과 갇힘을 제대로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대안으로 복음이 가져다주는 황홀한 행복과 경이로움을 경험하도록 도와야 한다. 복음에는 사랑과 정의,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많은 것을 갈망하는 인간의 마음을 채우는 영광스러운 의미와 성취가 담겨있다.

복음에는 현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메시지가 있다. 우리는 굶주려 죽어가는 세상이 갈망하는 식량을 갖고 있다. 우리가 제공하는 것은 참여해야 할 고대 전통, 노력해야 할 초월적 대의, 그리고 영원히 누릴 영원한 영광이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불신자로 하여금 지금 그들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는지,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우리는 매 순간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복음기도신문]

원제: Apologetics in an Age of Despair

게빈 오트런드 Gavin Ortlund | First Baptist Church of Ojai(Ojai, California)의 담임목사로 Fuller Theological Seminary(PhD)를 졸업했으며, 저서로는 Theological Retrieval for Evangelicals와 Finding the Right Hills to Die가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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