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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예배에서 중요한 건 ‘나’도 ‘우리’도 아니다

사진: Yoel J Gonzalez on unsplash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

“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1997년이었다. 그전까지 12년 동안 목사로 섬긴 나는 워싱턴 D.C. 지역에 있는 큰 교회에서 새로운 직분을 맡고 있었다. 그 교회에서 내 초점은 목양이 아니라 음악과 예배였다. 피아노로 학위를 받았고, 기독교 밴드와 연주 여행을 했고, 무려 20년 넘게 회중 예배를 인도했으며 심지어 예배 앨범 몇 개에도 이름을 올린 나는 찬양 예배와 관련해서 더 이상 준비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 교회에 도착하고 몇 달이 지났을 때 마하니(C. J. Mahaney) 담임 목사님이 불쑥 내 사무실로 들어와서는 책 세 권을 내밀며 읽으라고 했다. 그중 하나가 생전 처음 들은 데이비드 피터슨이 쓴 Engaging with God: A Biblical Theology of Worship(하나님과 관계 맺음: 성경적 예배 신학)이었다. 내 눈에 그 책은 예배에 관한 책이라기보다는 학술서로만 보였다. 게다가 피터슨은 음악 전문가도 아니었다. 그러나 마하니 목사님이 추천한 책인 만큼 나는 읽기 시작했다. 

두 번째 페이지에 다음 구절이 나왔다. 

그렇다면 예배는 본질적으로 경험이나 감정인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특별한 감각 또는 일종의 종교적 엑스터시, 그게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의 깊은 낮아짐(humiliation)의 느낌과 동일시되어야 하는가? 기독교 집회에서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특별한 순간이 있는가? 예배 수준이 참가자들의 체험 정도에 따라서 측정되어야 하는가? 예배와 관련해서 이런 식의 주관적인 접근 방식을 종종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감정적 체험은 예배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16)

책 여백에 나는 “좋은 지적”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고 이 구절을 계속 생각하는 중에 점점 더 그가 한 마지막 말에 마음이 불편했다. “감정적 체험은 예배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지성소 밖에서 

그때까지 나는 예배를 “그리스도인의 집회의 특별한 순간”으로 여겼다. 보통 찬양 두세 곡을 부르고 나면 그런 순간이 도래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그러면 우리는 감정적으로 예배에 더 깊이 참여했고, 뭔가 자발적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내 생각에 이건 성전이 등장하는 구약의 양식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우리는 바깥뜰에서 시작하여 안뜰을 거쳐 마침내 지성소에 들어가니까 말이다. 예배 인도자로서 나는 교회를 “지성소”를 체험하는 현장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교회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또 그 순간을 기대한다(사 12:6).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예배를 그런 식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피터슨의 글은 나로 하여금 그때까지 잘 모르던 예배 신학과 대면하게 만들었다. 예배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특별한 감각 또는 일종의 종교적 엑스터시, 그게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의 깊은 낮아짐의 느낌”으로 정의되지 않는다면, 도대체 예배는 무엇이란 말인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다음 다섯 가지 귀중한 교훈을 포함하여 내가 놓치고 있던 진리를 더 분명히 보게 되었다. 

1. 예배의 중심은 내가 아니다.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예배의 중심에 나를 놓으려고 했다. 내가 어떻게 느꼈는지, 내가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 내가 체험한 것과 놓친 것이 무언인지가 중요했다. 설혹 나를 뺀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예배의 중심에 우리를 두었다. 몇 명이나 모였는지, 규모는 어떠했는지, 손을 들고 찬양한 사람은 얼마나 되었는지에 주목했다. 그러면서 정작 내가 놓친 것은 우리의 욕망과 계획과 행동이 예배의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기를 영광스럽게 여기시고 기뻐하셨듯이(요 17:5), 예배의 본질은 영원으로부터 존재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미 자신이 하고 계신 일 가운데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우리의 응답은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에 근거하며, 또 그분의 영에 의해 가능해진다(요 4:23-24엡 2:18빌 3:3). 피터슨의 말이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실지 안 받으실지는 인간의 직감이나 창의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에 달려 있다”(26). 우리의 역할은 단지 예수님이 이루신 온전한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는 단 한 번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가 바치는 모든 제물이 하나님께 향기 나는 제사가 되게 바꾸셨다(벧전 2:5).

2. 찬양 체험으로 예배를 정의해서는 안 된다. 

몇 년 전에 나는 예배가 단지 찬양할 때만 드리는 게 아니라 삶 전체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내가 쓰는 말은 나의 신학을 드러냄과 동시에 내 신학 수준을 형성했다. “마지막 찬양에 이르러서 우리는 정말로 제대로 된 예배를 드렸어요.” “설교 끝나고 다시 예배에 돌입하겠습니다.” “늦으면 예배를 놓치게 됩니다.”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곤 했다. 이런 식의 말은 결국 예배란 수도꼭지처럼 하나님이 틀었다가 잠그는, 영적으로 주입된 음악적 경험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강화했다. 

찬양과 예배를 거의 동일시하는 오늘날의 경향에 비추어 볼 때, 성경에 이 둘이 함께 사용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모든 소유물이 사라지고 자녀까지 다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욥은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욥 1:20). 요한복음 4장을 보자.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이 찾으시는 진정한 예배에 관해서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음악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신다(요 4:21-24). 우리가 성경에서 예배로 번역하는 다양한 히브리어와 헬라어 단어는 경건, 봉사, 복종, 명예와는 관련이 있지만, 음악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예배의 한 부분이 될 순 있지만, 결코 예배의 핵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3. 예배는 시작하고 끝나는 게 아니다. 

사실상 인간이란 예배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단 한 순간도 예외 없이 우리는 애정과 관심과 충성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게 향하거나, 그게 아니면 결코 만족과 위로와 구원을 줄 수 없는 우상을 향한다. 결국 나는 이미 무언가를 예배하는 상태에서 매 주일 교회에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배를 제대로 드리기 위해서 올바른 화음이나 좋은 말씀, 은혜 넘치는 “분위기”를 굳이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참된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집회의 특별한 순간”과는 거리가 먼,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 10:31) 모든 삶을 추구할 때 형성되는 우리 마음의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주일 아침에 교인에게 인사함으로써 나는 하나님께 예배한다. 찬양하는 목소리를 높임으로써 예배를 계속한다(히 13:15-16). 기꺼이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는 것, 설교를 주의 깊게 듣는 것, 예배 후에 친구를 위해 기도하는 것, 모두가 다 예배 행위이다. 

더 중요한 것은 점심 식사를 위해 손님을 초대할 때도, 손님을 보내고 청소할 때도, 그리고 그날 오후 늦게 낮잠을 자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그리고 가정과 직장, 학교와 이웃에서도 복음으로 변화된 감사하는 종의 마음을 보임으로써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신실하게 추구하는 나의 예배는 멈추지 않는다.

성경이 별개의 예배 행위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사실이다(시 29:2행 13:2). 그러나 그 예배는 삶 전체에 걸친 “영적 예배”(롬 12:1)라는 더 큰 맥락에서 일어나야 한다. 

4. 예배는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것이다. 

예배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특별한 감각”과 동일시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우리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예배는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은 경이로움, 감사함, 경외감, 예배의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사 6:3계 4:85:13-14). 비록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음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들을 언제나 “그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엡 2:6).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시온 산,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 축하 행사에 모인 수많은 천사들”(히 12:22)에게로 인도하셨다. 사도 바울은 우리뿐 아니라 고린도 성도들에게 묻는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고전 6:19).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다. 오늘도 코람데오의 삶을 산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그분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다(마 28:20요 14:16히 13:5). 그러나 여럿이 모일 때 하나님은 종종 주권적 방법을 사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좀 더 경험적으로 자신의 임재를 느끼게 하신다(행 4:31고전 12:7고전 2:4살전 1:5). 넓든 좁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드리는 예배에서 감정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건 성경과 모순된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고”(벧전 1:8), 마음의 악함을 통회하고(고전 14:24-25), 거룩함을 더 추구하도록 도전받고(고후 6:167:1), 확신이 더 강화되며(히 13:5-6), 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깊어진다(벧전 1:8).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함께 모일 때 더 분명하게 역사하시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모이는 시간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그 시간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유일한 시간이 아님을 기억하자!

5. 예배는 끝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예배한다. “그리고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에게서 힘을 얻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골 3:17). 예배는 생각과 마음과 의지를 통해서 행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영광을 높이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성령의 지속적인 응답이다. 예배는 굳이 음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코 감정의 영역으로 제한될 수 없다. (그러나 얼마든지 이 두 가지 모두를 다 포함할 수도 있다!) 예배는 하나님 안에서 가장 큰 기쁨을 찾도록 우리를 거듭거듭 초대하시는 천국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로운 선물이다. 형제자매여, 언제나, 어디서나 예배드리자! 할렐루야.

무엇보다도 가장 큰 소식이 남아있다.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씻긴 사람들에게 예배는 결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이다. [복음기도신문]

원제: Worship Isn’t About You: What I Learned After Years of Leading

밥 코플린 Bob Kauflin | Sovereign Grace Music의 디렉터이다. 그는 회중 예배를 위해 목회자와 음악인도자들을 교육시키고 있으며, 미국 켄터키주의 로이스빌에 있는 Sovereign Grace Church의 음악목사로 섬기고 있다. 그는 worshipmatters.com에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참된 예배자’의 저자이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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