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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하나님식 자녀 양육법 (3)

© 김정옥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하나님식 자녀 양육법은 부정 명령과 긍정 명령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둘 중 하나만 따르면 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추구해야 하고, 옛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성화의 기본 과정처럼 자녀를 하나님 기뻐하시는 방식대로 양육하는 과정은 옛 성품이 원하는 부정적인 방식(‘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을 버리고 긍정적인 방식(‘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을 실천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부모가 피해야 할 자녀 양육법, 하나님이 아닌 타락한 육신에 따른 양육법은 바로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이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는데, 단지 자녀가 화를 냈다고 해서 양육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아이는 원하는 장난감을 사주지 않을 때 바닥에 누워 극한 노를 표출한다. 그러면 자녀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모두 들어주는 것이 좋은 양육법인가? 아니란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금하신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틸만은 “아버지들이 권위를 남용해 자녀들에게 분개와 비탄을 가져올 만큼 거칠고 부당한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라 말한다(틸만, 에베소서, 베이커신약성경주석 (부흥과개혁사, 2020), 563p). 아놀드는 “벌컥 화를 내는 것, 지나치게 심한 말이나 모욕, 비꼬는 말, 잔소리, 비하하는 말, 부적절한 괴롭힘, 불합리한 요구 등 화를 돋굴 만한 다른 모든 것”이라 설명했다(클린턴 E. 아놀드, 강해로 푸는 에베소서(디모데, 2017), 424p). 죄가 표출되는 방식이 다양한 만큼 ‘자녀를 노엽게 할’만한 것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공통적인 특징은 뒤따라오는 명령인 “주의 교훈과 훈계”와는 거리가 먼 육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자녀에게 말하고, 대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존 맥아더 목사는 ‘우리 자녀에게 그늘을 제공하기’(Providing Shade for Our Children, Part 3) 시리즈 설교에서 본문이 금하는 ‘자녀를 노엽게 하기’의 구체적 예시를 제시했다(설교듣기).

첫째, 과잉보호. 자녀를 믿지 못하고 자유를 억압하며 끝없이 규칙을 만들어 얽매이게 만듦

둘째, 차별대우. 자녀들을 비교하고 차별하여 시기심이나 우월감을 갖게 만듦

셋째, 헛된기대. 자녀를 통해 자기 꿈을 이루려 하고, 자녀가 절대 이를 수 없는 목표를 만들어 성취하도록 압력을 줌. 상실감과 낙심을 맛보게 함

넷째, 실망표현. 칭찬이나 보상은 없고, 계속해서 판단과 비판을 가하며 실망을 표현함

다섯째, 이기심. 자녀를 위해 자기 시간과 물질, 재능 등을 소비하지 않으려 함

여섯째, 참지 못함. 자녀의 연약함을 받지 못하고 분노를 표출함

일곱째, 무시. 자녀와 시간을 보내지 않고 그들의 의견에 관심이 없음

여덟째, 언어폭력.

에베소서가 기록된 당시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육체적 폭력이나 심한 경우 유기나 살인까지, 악한 세대의 아버지가 휘두르던 폭력은 그리스도인 부모가 흉내도 내지 말아야 할 ‘자녀를 노엽게 하는’ 악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속한 문화권에선 인본주의가 말하는 자녀의 인권을 존중하기 위해 부모의 훈육권을 박탈하고, 자녀를 단지 노엽게 하지 않으려는 목적만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자녀로 키우는 등 오히려 역반응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자녀의 노여움을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올바른 자녀 양육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식 자녀 양육법의 원칙은 무엇일까?

첫째, 일관성 있는 양육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자녀 양육법은 ‘일관성’을 강조한다. 기독교 안팎에서 나온 수많은 자녀 양육 도서는 하나같이 ‘일관성을 잃은 자녀 양육법보다 자녀를 더 혼란스럽게 하고 자녀에게 해로운 것은 없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라고 명령하실 때 ‘양육’은 한두 번 이루어지고 말 것이 아니다. 헬라어 현재형 동사 ‘에크트레페테’는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교육과 양육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일관성 있는 원칙이(주의 교훈과 훈계) 계속해서 자녀에게 주입되고 그 원칙대로 자녀를 일정하게 훈련한다는 것이다.

일관성 있는 자녀 양육에 있어 두어 가지 주의할 점이 있는데, 먼저는 ‘일관성’이 중요하다고 해서 자녀보다 더 중요한 건 아니란 점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고(막 2:27),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책망하시면서, ‘그들은 사람을 양육하여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23:15). 철저한 율법과 전통을 지키는 것 자체가 ‘일관성’ 있는 양육의 목적이 아니다. 목적은 자녀를 들쭉날쭉한 사랑이 아니라 언제나 신실하고 변함없는 일관성 있는 사랑으로 가르치고 돌보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생각할 부분은 일관성 있는 자녀 양육이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자녀가 어릴수록, 시작한 지 얼마 안 될수록 힘들다. 하지만 여기 역설이 있는데, 어렵고 힘든 초반을 지나면 뒤로 갈수록 더욱 편해진다. 아이가 종종 떼를 쓰면 어쩔 수 없이 원칙을 포기하고 자녀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는 방식으로 양육을 해왔다면 사춘기 자녀가 되었을 때 그 방식으로 부모에게 요구하는 것을 고치기 무척 어렵다. 떼를 써서 무언가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아이가 어릴 때부터 분명하게 일관성 있게 훈련되면 자라서도 훈련된 방식대로 요구한다. 우리말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일관성 있는 훈육은 자녀의 인생 전반에(부모가 먼저 떠나더라도) 자녀의 삶을 빚어주고 열매 맺게 하는 귀한 틀이 될 것이다.

둘째,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면 노여움이 쌓이지 않는다

‘일관성’ 있게 자녀를 훈련할 내용은 “주의 교훈과 훈계”다. 여기서 주목하기 원하는 것은 주님이 왜 우리에게 교훈과 훈계를 주셨는지 아는 것이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3)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당신의 행복만을 위하여 명령과 규례를 주신 것이 아니다. 백성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그들의 복에 아무런 연관도 없는 법을 주고 무조건 따르라고 요구하신 게 아니다. 정확히 반대로 하나님은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 교훈과 훈계를 주시고 그에 따라 백성을 양육하셨다. 마찬가지로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는 ‘내용’에만 충실할 것이 아니라 그 ‘목적’도 잊지 말아야 한다.

많은 부모가 이 두 가지를 잘못 적용한다. 자녀를 ‘사랑’(?)하기 위해 가르치고 양육하는 기준을 불규칙하게 적용하거나, 반대로 자녀를 사랑하기 위함이라고 말하면서 ‘사랑’ 없이 기준과 잣대만 칼같이 적용하려 한다. 둘 다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목적),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일관성 있게 양육해야 한다(내용).

자녀를 향한 주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주의 교훈과 함께 가르치라. 주님의 훈계로 양육할 때 주님의 크신 긍휼과 사랑을 함께 나타내라. 부모가 설명하고 적용하는 양육 방식과 기준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자녀의 복을 위해 주신 사랑의 법이란 것을 계속 아이에게 설명하라. 주님 말씀이 세상의 방식보다 월등하고 옳다는 확신을 가져라. 특히 어린 자녀에게 복음을 전하는 부모는 온전한 복음 교리를 가르치는 데 만족할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확증된 하나님 사랑을 전달해야 한다. 자녀가 바리새인처럼 율법주의적으로 자라거나 세리처럼 세속적으로 자라는 것을 막으려면, 부모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둘 다 자녀에게 전달해야 한다.

결론

자녀를 노엽게 만드는 것은 부모가 가지고 있는 연약함 때문이다. 아직 성화 되지 않고 남아있는 옛 성품, 벗어버려야 할 옛사람이 있어서다. 부모도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가 필요하다. 그분의 사랑 가득한 돌봄과 양육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은혜, 공의와 사랑이 모두 충만하게 나타난 복음, 그 복음으로 날마다 자신을 양육하라. 성령께서 당신의 허물을 제거하시고 새 사람을 입게 하셔서 그리스도를 닮은 방식으로 자녀를 사랑하게 하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가득한 말씀으로 자녀를 바르고 행복한 길로 인도하도록 모든 능력과 지혜를 더하실 것이다. [복음기도신문]

조정의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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