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피조물로서 창조주인 하나님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과도 관계를 맺도록 만들어졌다 ”
여기 호주 시드니에 사는 나는 지금 스크린 앞에 앉아서 다른 지역에서 다른 스크린을 보고 있을 당신과 함께하고 있다. 나는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비록 지리상으로 또 시간상으로도 서로 떨어져 있지만, 우리가 화면 속 단어를 통해 앞으로 몇 분 동안 함께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생각해 보면 이건 기적이다.
내가 이 글을 잘 쓴다면, 당신은 내 생각과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노트북 안에서 팬이 부드럽게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비동기식으로든(책에서 또는 지금처럼 기사를 통해서), 또는 동기식으로든(줌 회의 또는 전화 통화를 통해서), 우리는 물리적으로 공간을 공유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서로 연결하고, 의사소통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떨어짐, 부분적인 기쁨
봉화가 발명된 이후 사람은 쉬지 않고 연결해 왔다. 말이나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성격까지도 다른 장소, 심지어 다른 시간으로까지 투사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신약성경 기자들은 이 축복을 잘 활용했다. 그들은 멀리 떨어져서도 사랑과 그리움을 전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편지가 가르침과 격려와 훈계를 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알았다.
요한이서나 요한삼서 같은 작은 서신서는 흥미로운 연구 사례이다. 이 두 편지에서 요한은 그의 백성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요이 1:4, 요삼 1:3) 것을 보면서 기뻐하고, 또 그렇게 계속 살아가라고 격려하고 권고한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할 말이 많이 남았지만 요한은 직접 만나서 하는 게 훨씬 더 좋겠다고 결론짓는다.
내가 여러분에게 쓸 말이 많지만, 그것을 종이와 먹으로 써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에게 가서, 얼굴을 마주보고 말하여, 우리의 기쁨을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요이 1:12; 요삼 1:13-14도 참조).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참 기쁨이 있고, 또한 그런 형제를 격려하는 글을 쓰는 데에도 기쁨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기쁨이다. 그 기쁨은 서로 대면할 때 느낄 성취감을 기대하는 기쁨이다.
기술: 관계에 축복인가 저주인가?
물리적 함께함(physical presence)이 갖는 우월성은 너무나 명백해서 그것을 주장하는 것조차 이상해 보인다. 가장 좋아하는 식당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저녁을 먹는 것보다, 그 사람과 문자 메시지 하는 것을 더 좋아할 만큼 변태적인 사람이 과연 있을까? 어머니와 따뜻한 포옹과 여유로운 대화를 나누는 기쁨을 포기하고 대신 전화 통화를 선택할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더 큰 기쁨보다 더 작은 기쁨을 선택하는 데서는 아주 오랜 경력을 가진, 꽤나 이상하고 비뚤어진 피조물이다. 그 결과 우리는 더 큰 가능성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더 작고 미천한 현실을 선호함으로 큰 가능성 자체를 왜곡하고 망친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이러한 역동성은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라는 가상 세계와 관련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적 순간 속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물리적 함께함의 즐거움을 과소평가하고 가상 세계의 이점을 과장하는 불안한 트렌드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더 매혹적이며 빠르게 진행되는 가상의 흐름에 너무 빠진 우리는 물리적 친교가 주는 견고한 기반에 대한 맛을 잃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다른 많은 선물과 마찬가지로 가상세계라는 축복도 남용하게 되면 결국 짐이 되고 저주가 된다.
이 짧은 글에서 이런 일이 왜 또는 어떻게 일어났는지 탐구하는 게 목적이 아니지만, 나는 간단하게나마 물리적인 교회 모임의 중요성과 관련된 한 가지 중요한 신학적 궤적을 언급하려고 한다.
자아의 고립
다른 여러 학자와 더불어 칼 트루먼(Carl Trueman)이 최근에 문서화한 것처럼, 현대 서구 문화의 기이한 측면 중 하나는 우리 자신과 정체성을 심리화(psychologizing)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창조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지속적이고 또 거침없이 거부해 온 서구 사회는 결국 스스로를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로만, 그래서 내면의 삶을 도덕성과 정체성과 자아의 근원으로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내 감정과 생각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로 나 자신을 정의하는 문화에서 가상 세계가 매력 있게 다가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은 창조된 자아가 가지는 육체적 곧 물리적 본성에 대한 일종의 반역이다. 그리고 이 반역은 기능 장애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물리적 본성이야말로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데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조물로서 창조주인 하나님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과도 관계를 맺도록 만들어졌다. 우리가 육체적 존재인 것은 다 이런 창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함이다. 녹스(D. B. Knox)는 이렇게 말한다.
관계가 가져다주는 물리적, 정신적, 정서적, 영적 모든 쾌락과 더불어 관계의 목적까지 달성하도록, 우리의 몸은 참으로 놀랍게 만들어졌다. 눈, 얼굴, 그리고 뇌의 언어 구조는 우리가 내면을 서로에게 표현하도록 설계되었다(The Everlasting God, 52).
이 점은 특히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재창조하실 때 이루시는 구속의 관계와 깊은 연관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뿐만 아니라 서로와의 관계에서도 올바르게 회복된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이제 함께 떡을 떼고,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고, 심지어 결혼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갈라놓은 적의의 벽을 허물기 전까지, 그 모든 일은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었다(엡 2:14).
함께 모인 교회
복음이 주는 놀라운 화해 때문에 교회가,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함께 누리는 새 삶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은 우리를 함께 이끄신다. 말씀을 함께 배우며(행 2:42),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함께 먹고 마시며(고전 11:23-26), 기도와 노래로 함께 소리를 높인다(엡 5:18-19). 그리고 덕을 끼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로 사랑의 예언을 한다(고전 14:1-3). 이 모든 것이 다 피조물이 마땅히 행할 활동이며,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서로라는 피조물의 존재가 필요하다.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는 히브리서 10:24 말씀 뒤에 이런 생각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서신서 많은 부분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가 물리적 지상의 성전과 제사장직을 통한 옛 언약에서부터 영원하고 영적인 구속이라는 그리스도의 새 언약으로의 이동을 포함한다고 강조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히 9:14; 10:19-22; 12:18-24).
히브리서의 저자는 물리적 성전과 제사장직의 사라짐이 독자들로 하여금 굳이 더 이상 물리적으로 함께 모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로 받아들일까 염려한 걸까?
너무 앞서 간 추측을 해서도 안 되겠지만, 히브리서 저자가 취한 권고의 형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온전한 믿음으로 지성소에 가까이 가라고 권고한 후에 그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히 10:24-25).
‘격려하는 것’은 ‘모이기를 그만하는 것’과 대조된다. 격려하는 것은 만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필수적인 활동이다. 또한 격려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사랑과 선행을 서로 북돋우는 수단이 된다.
우리를 공격하는 육신의 소욕을 포함하여 우리 몸에 여전히 존재하는 연약함과 죄를 고려할 때, 우리는 다른 지체와 정기적으로 모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우리는 자신이 전부를 동원해서 서로 가르치고 격려하고 독려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교제 가운데 함께 모일 때 몸으로 하는 다양한 활동은 바로 이러한 목적을 지향한다. 그 모든 활동은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지만, 특히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세워줌으로 우리는 피조물인 서로를 위할 수 있다.
물리적 또는 가상적?
모임이 가지는 이런 중요한 측면은 가상 모임을 위해 실제 모임을 무시할 때 현저하게 줄어들거나 어떤 경우에는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예를 들어, 다른 성도와 나란히 앉아 설교를 듣는 것이 주는 가치와 경험은 설교집을 읽거나 유튜브에서 설교를 시청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건 단지 목소리와 몸짓, 또는 물리적 존재라는 측면 때문만이 아니라, 청취자로 전락한 우리가 설교자와 아예 다른 장소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아래 함께 앉아 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과 격려를 함께 들을 때, 내 옆에 있는 당신이라는 존재는 다름 아니라 내 경청의 일부가 된다.
마찬가지로 찬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격려하고 가르치기 위해서도 한다(엡 5:21-22, 골 3:15-16). 그리스도를 기쁘게 찬양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할 수 있지만, 함께 모일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향해서도 찬양할 수 있고,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한마음으로 주님께 멜로디를 만들 수 있게 된다.
함께 이야기하고 말씀으로 서로 격려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함께할 때, 우리는 훨씬 더 풍부한 참여를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고 들을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된다. 어려움을 겪거나 기쁠 때, 마음이 아프거나 외로울 때, 첫 모임이어서 어색해할 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다 제대로 감지할 수 있다. 그럼으로 적극적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다시 함께 모이는 기쁨
이메일이나 페이스북 게시물 또는 지금 읽고 있는 글을 통해서도 이러한 다양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는 그렇다. 그리고 그것도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러나 가상현실이 주는 축복과 가능성 때문에 우리가 진짜로 느끼는 물리적 교제가 주는 기쁨과 혜택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결과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난 18개월 동안 여기 시드니에서 사는 우리의 현실이었다. 교회는 물리적 모임을 금지하는 여러 달의 폐쇄와 각종 제한을 받았다. 2020년 3월 이후, 주일 예배의 절반 정도는 집에 틀어박힌 채, 다양한 형태의 가상 연결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서로를 격려해야만 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런 자비하심에도 물론 깊이 감사한다(때로는 그 자비하심이 더 크기를 바랐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기쁨은 실제로 얼굴을 대하고 만나는 교제의 기쁨이다. 나는 우리가 서로라는 물리적 존재를 계속 소중히 여기길 바란다. 가상현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건 결코 진짜 만남에 비길 수 없다. 가상현실로 인해 우리의 주의가 흐트러지거나 방향이 바뀌지 않기를 바란다. [복음기도신문]
“내 옆에 있는 당신이라는 존재는 다름 아니라 내 경청의 일부가 된다 ”
토니 페인(Tony Payne) | 마티아스 메디아(Matthias Media)에서 출판 디렉터로 사역하는 목사이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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