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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칼럼] 아름다운 차이: 창조 원리

▲ 사진 : Pixabay

“ 상호보완성(상보성, Complementarity,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무엇이 상대의 자질을 향상시키거나 또는 그 자질을 강조하는 관계 또는 상황”)은 창조물에 기록되어 있다 ”

태초에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tohu wa’bohu)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하나님이 어둠과 빛을, 낮과 밤을,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그리고 바다와 땅을 분리하셨다. 그는 태양과 달, 물고기와 새, 가축과 기는 것, 야생 동물을 구별하셨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지닌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 남성과 여성을 구별했다. 하나님은 평범한 날에서 안식일을 구별하셨고, 가인에게서 아벨을 그리고 평범한 것에서 거룩함을 구분하셨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무형태(tohu)에 질서를 가져오고, 공허함(bohu)에 생명을 가져다주는 일련의 구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안식일을 끝내면서 유대인이 기도하는 하브달라(Havdalah) 기도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오! 주 우리 하나님, 우주의 왕 이시여, 빛과 어두움을,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를, 거룩한 일곱째 날과 노동하는 나머지 여섯 날을 구분하시는 당신은 복이 있습니다.”

상호보완성(상보성, Complementarity,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무엇이 상대의 자질을 향상시키거나 또는 그 자질을 강조하는 관계 또는 상황”)은 창조물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창조 중심에는 적합함, 상호 간의 향상, 아름다운 차이가 존재한다. 모든 우주는 다 이런 식의 상호 보완적인 쌍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자와 여자는 그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다. 그래서 우주적 보완성은 인간 언어에도 반영되어 있다. (der Tag / die Nacht, le ciel / la terre, el sol / la luna 등). 성적 보완성에 관한 유대-기독교의 비전은 우주적 상보성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반영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창조자와 창조세계, 하나님과 이스라엘,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어린 양과 신부의 아름다운 차이를 반영한다.

똑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다르지도 않은

따라서 상보성은 피조물의 관계를 설명하는 다른 두 가지 사고방식과 현저하게 다르다.

한편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남자와 여자가 동일하지 않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늘과 땅, 낮과 밤처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은 한 가지주의(one-ism)가 아니라 분리와 구분을 드러내는 두 가지주의(two-ism)를 통해 이뤄내는 질서와 생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구분이 무너지는 곳에 생명은 없다. 생명이란 아름다운 차이를 통해 생겨난다. 그러니까 하늘이 땅과 부딪히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태양과 비를, 또 식물과 동물이 살아 움직인다. 그에 대조적으로 모든 것이 똑같이 생긴 동굴(위에도 땅 아래에도 땅) 또는 목성(위에도 하늘 아래에도 하늘)은 그 어떤 생명도 잉태하지 못한다. 이런 성적인 상보성과 우주적 상보성의 연관성을 감안할 때, 하늘과 땅의 구분을 폐지하는 건 다름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구분을 폐지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흔히 도마 복음서라고 알려진 영지주의 복음서에는 유대인 예수에 관한 한 가지 희극적인 사례가 네 복음서에 담긴 예수님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표현되어있다. 이혼에 관한 바리새인의 질문에 대한 진짜 예수님의 대답은 명확하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마 19:4). 그런데 영지주의 문서 속 예수는 요즘 현대적 인물들처럼 뭔가 구분이 흐릿하고 아주 애매하게 말한다.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 그리고 너희가 속을 겉과 같이, 겉을 속과 같이, 그리고 위를 아래와 같이 만들 때, 그리고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된 자로 만들어 남자는 남자가 아니며 여자는 여자가 아닐 때, 그리고 너희가 한 눈 대신 눈들을, 손을 위해 손을, 발을 위해 발을, 그리고 모습을 위해 모습을 만들 때, 그러면 너희는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토마스 22). 이렇듯 명확한 구별이 없을 때 창조물은 엉망진창으로 무너진다. 상보성은 그렇기에 동일성이 아니다.

또 한편으로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남자와 여자가 아예 전혀 다른 종류에 속할 정도로, 완전히 다르다고도 믿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는 전적으로 동일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다르지도 않다. 그렇기에 성별 구분을 존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그 차이를 너무 과장해서도 안 된다. 남자와 여자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정체성은 성별보다는 인간성 그 자체로 인해서 훨씬 더 근본적으로 정의된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고, 그 다음으로 남자와 여자로 나눠진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남자와 여자로서의 차이는 아예 사라진다. 유대인은 이방인과 화해하고 주인은 노예를 섬기며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여 함께 상속자가 되어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받는다.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많은 철학자들에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상보성과 조화가 아니라 타자 성과 갈등으로 표현되어 왔다. 남자와 여자는 개인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문명적 차원에서 발전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서구의 생각은 남성적이고 선형적이며 또한 상승적이고 질서를 중심으로 해서 창조세계를 압도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에 반해 동양적 사고는 여성적이고 순응적이며, 순환적이며, 혼란성을 받아들이며 창조세계에 굴복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식의 두 가지 사고는 일면 친숙할 뿐 아니라 심지어 기독교적으로도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이 모두 다 상보성이 아니라 변형(alterity)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절대적 차이 또는 생소함인 것이다. 그런 세계관은 갈등, 승리, 경쟁, 반대, 경쟁, 심지어 폭력으로 구성된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그리고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있어야 할 평화가 없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랑이 사라지고 없다.

정체성에 관한 이교도의 비전에는 구분 자체가 없는 통일성(union)이 있다. 변형을 특징으로 하는 이신론적 비전에는 통일성이 없는 구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상보성을 가진 기독교적 비전에는 통일성과 더불어 구분이 있다. 같음과 다름이 있고, 다수와 유일성이 있다. 기독교에서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함께 지니고 있으며, 그 둘은 서로가 없이는 결코 온전할 수 없다. 그리고 창조물 안에 존재하는 분명한 구분은 궁극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우리는 그 삼위일체 안에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변이, 동일성과 타자성, 그리고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을 만난다)과 성육신(하늘이 땅을 만나고 말씀이 육신이 되는) 안에서 극적인 조화를 이룬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우리는 원초적인 투쟁과 폭력이 아니라 삼위일체 안에서 반복되는 평화와 기쁨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의 미래 희망은 하늘과 땅이 다시 하나가 되고, 영광 속에서 우리가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것이 창세기 1장 속 대부분의 대비가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초월적으로 표현된 이유이다. 달, 태양, 바다, 어둠, 성 관계가 없다. 그리고 하늘과 땅은 아름답게 결합한다). 우주 최후의 운명과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혼은 한 사람의 영광이 다른 한 사람 속으로 스며들어 가득차게 되어, 더 이상의 갈등과 무너짐도 없는, 완벽한 상보성을 이루는 모습을 반영한다. 어린 양의 결혼식에 초대된 사람들은 실로 복이 있도다!

상보성과 창조

이런 신학적 틀을 감안할 때, 남자와 여자가 문화적 다양성을 초월하는 모든 방식에서조차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적 중립 사회에서는 도리어 분명한 성적 차이가 사라지기는커녕 도리어 더 증가한다는 증거가 있을 정도이다. (널리 알려진 한 보고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물 인식 능력(mental rotation)의 차이는 성적 평등성이 높은 국가일수록 더 크게 나타나고 있다.)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는 종 모양 통계 곡선은 여러 분야에서 명백하게 그 차이를 드러내는데, 누가 봐도 명백한 키와 힘, 머리카락 등등의 신체적 특성에서 뿐 아니라 호르몬, 심리상태, 대인 관계의 특성에서도 적용된다.

남자는 일반적으로 더 공격적이고 경쟁적이며 두려움이 없으며 위험을 감수하고 난잡하고 폭력에 취약하다. 남성 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은 높은 수준의 자신감, 성욕 및 지위에의 갈망과 동의어이다. 여자는 평균적으로 정서적 안정과 공감을 중요시한다. 결과적으로 남자는 일반적으로 사회의 상층이 아니면 최하층에 모여있다. 그러니까 남자는 매우 부자이거나 매우 큰 권력을 가질 가능성이 높지만 (물론 이런 주장은 다양한 반론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동시에 범죄자와 살인자 또는 노숙자로 살 가능성이 여자들보다 훨씬 더 높다.

남성 그룹은 스파링, 싸움, 권력 구조 및 희롱 등으로 더 많이 특정지어지는 반면, 여성 그룹은 일반적으로 더 소규모의 간접적인 대결, 평등한 구조, 능수능란한 말주변 및 사물보다는 사람 중심의 특징으로 구분된다. 성별에 따른 특징적인 경향은 아이들이 자신의 성별을 제대로 인식하기 전부터 이미 드러난다. (비극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2015년에 발생한 유아 총격 사건 마흔세 건 중에 남자 아이가 일으킨 사건은 무려 마흔 건이다). 그건 동물도 다르지 않다. (수컷 히말라야 붉은 털 원숭이는 인형 보다 트럭 장난감을 더 좋아한다).

슬레이트(Slate)의 편집자인 줄리아 터너(Julia Turner)는 최근 그녀의 쌍둥이 아들이 보여준 남성다움(boyishness) 때문에 평소 갖고 있던 사회적 구조로서의 젠더에 대한 그녀의 생각이 큰 도전을 받았다면서, 그녀가 평고 갖고 있던 성적 평등주의적 선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했다. “남자애는 정말로 다르구나.” 그녀의 이 말에 대해서 윤리학자인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스(Christina Hoff Sommers)는 페더럴리스트(The Federalist)에서 다음과 같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당연히 다르지. 너무도 뻔한 그 차이가 안 보인다면, 대학교 가서 학위를 받아야겠지.”

난잡함과 폭력을 향한 남성의 성향을 변명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떻게든 남녀의 차이를 덕스러운 것으로 보이기 위해 과학이 애쓰는 것처럼, 내가 지금 남녀의 모든 차이를 어떻게든 확증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음 네 가지이다.

1. 상보성은 세속적 주류 과학 및 사회학적 연구의 관점에서 보아도 우리 인간에게 이미 고정된 팩트로 보인다. 대다수의 인간 사회는 이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지만, 우리 중 대부분은 고국을 지키는 전쟁에 나간 적도 없고, 출산 중에 죽지도 않으며, 광산에서 일하거나, 개척지에서 고생한 적도 없기에, 이 사실은 오늘날 현대 문화에서 잊혔다. 그러나 팩트는 확고하다.

2. 창세기 1장에서 4장까지의 내용이 진리라면, 우리가 발견하는 많은 특성들과 우리가 찾게 될 사실들 사이에는 흥미로운 일치가 존재한다. 창세기에 따르면 남자(adamah =“땅”)는 땅을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임무를 받았고, 여자(havah =“생명”)는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라는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3. 목회적 차원에서, 남자와 여자가 일반적으로 다른 종류의 죄나 약점(#MeToo, #ToxicMasculinity, #HeForShe)에 걸리기 쉽다는 것은 단지 상상이 아닌 사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남자와 여자의 특성에 맞게 제자훈련을 해야 한다.

4. 이 사실은 또한 남자와 여자 사이의 (매우 명백한) 생물학적 차이와 그 중요성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이 특정 성별이 다른 성별보다 키가 크고, 더 강하고, 털이 많고, 성기가 바깥 쪽을 향하고 있음을 발견했다고 상상해보라. 또 다른 성별의 성기는 내부에 있고 삽입과 임신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외계인이 발견한 건 그게 다가 아니다. 특정 성별은 주로 관계를 형성하고 소그룹을 모으고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데에 더 익숙하고 또 다른 성별은 주로 외부 기관에서 일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작업에 더 적합하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외계인들이 탑과 도시, 전사와 정원, 사제와 사원, 피를 뿌린 신랑과 순수하고 흠 없는 신부와 같은 성별을 설명하는 성경의 범주를 접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 외계인은 어떤 생각을 할까? [복음기도신문]

“ 성별 구분을 존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그 차이를 너무 과장해서도 안 된다 ”

앤드류 윌슨 Andrew Wilson | 영국 런던에 위치한 King’s Church의 교육목사. ‘Echoes of Exodus’를 비롯하여 다수의 책을 공동으로 저술.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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