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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초대교회의 사랑이 세상을 살렸다

사진: Pedro Lima on Unsplash

초대교회라고 역병, 전염병 그리고 집단 히스테리를 몰랐던 건 아니다. 기독교와 비기독교인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초창기 기독교의 폭발적인 부흥은 기독교인이 질병과 고난, 그리고 죽음을 앞에 놓고 보여준 태도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려운 가운데서 교회가 취한 태도가 로마 사회에 주는 감동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부흥이 이어지자 이교도인 로마 황제까지도 이교도 사제에게 불평하며 좀 더 힘을 내서 수를 늘리라고 독촉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어떤 면이 달랐기에 로마 제국까지 흔들었다는 것일까? 우리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맞아 초대교회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전염병을 대하는 비기독교인의 모습

서기 249년에서 262년, 서구 문명사회는 인류 역사가 손꼽는 끔찍한 전염병(pandemic)으로 황폐했다. 전염병의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전염병이 극에 달했을 당시 로마에서는 약 5천 명의 사람들이 매일 죽었다. 그 비극을 눈으로 목격한 교부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Alexandria)는 이렇게 썼다. “이 전염병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구분하지 않지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비기독교인이다.” 전염병을 대하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를 관찰한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비기독교인에 관해서 이렇게 적었다.

“전염병이 발발했을 때, 그들은 병에 걸린 사람들을 쫓아냈고,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떠나거나 아직 죽지 않은 사람까지도 도로에 던져버렸다. 또한 매장되지 않은 시신을 먼지처럼 취급했다. 그렇게 함으로 치명적인 전염병의 확산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은 결코 전염병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기독교인이 쓴 기록은 이런 사실을 확인해준다. 백 년이 지나서 율리아누스(Julian) 황제는 전염병 이후 시작된 기독교의 급속한 부흥을 막고자 이교도 자선 단체를 만들어 기독교인이 보여준 선행을 모방하려고까지 했다. 서기 362년에 쓴 편지를 보면 율리아누스 황제는 헬레니즘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 기독교인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불평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급속한 기독교의 성장 원인을 “이방인을 향한 자비, 죽은 자의 무덤에 대한 돌봄, 그리고 그들의 삶에서 드러나는 위장된 성결”로 꼽았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이렇게도 썼다. “이건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 악한 갈릴리인(그리스도인)은 자기네 가난한 자들뿐 아니라 우리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까지 돌본다니 말입니다.”

비록 율리아누스가 기독교인의 선행 동기에 관해서 의문을 표현하지만, 헬라인의 자선에 관해서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프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데에 있어서, 특히 전염병 기간 중 기독교인이 보여준 수준에 비해 헬라인의 수준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가 쓴 ‘기독교의 발흥’(The Rise of Christianity, 좋은 씨앗, 2016)에 따르면 다 이유가 있었다. “율리아누스가 이교도 사제들에게 기독교의 수준에 맞추라고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건 이교도들에게는 선행을 추구할 이유가 되는 교리적인 근본 또는 전통적인 관습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염병을 대하는 기독교인의 모습

전염병을 대하는 비기독교인의 모습을 자기 보호, 자기 관리,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픈 사람을 멀리하기로 특징지을 수 있다면, 기독교인이 보여준 모습은 그와 정반대였다. 디오니시우스에 따르면 전염병은 기독교인에게 ‘교육(schooling)과 테스트’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인이 전염병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자세히 묘사했다. 디오니시우스는 기독교인 중에서도 ‘탁월한 자들(the best)’은 그들 자신이 병에 걸리고, 심지어 죽어가면서까지도 고귀한 모습으로 아픈 이들을 어떻게 돌보았는지 기록했다.

우리 그리스도인 형제 대부분은 끝이 없는 사랑과 헌신을 보였고, 자기 자신을 아끼지 않았으며 오로지 타인만을 생각했다. 위험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픈 이들을 돌보았으며, 그들의 모든 필요에 응답했고,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 그리고 평안하고 행복하게 그들과 함께 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스도인은 병에 걸린 사람들로부터 전염이 되었기에 그들에게는 아픈 이웃들이 자연스럽게 더 많이 모여들었다. 그리스도인은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받아들였다.

이와 비슷하게, 폰티우스(Pontius)가 쓴 카르타고(Carthage)의 주교였던 ‘키프리아누스 전기’(Biography of Cyprian)에 의하면, 키프리아누스 주교는 전염병이 창궐하던 당시 기독교인뿐 아니라 비기독교인까지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고 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서만 관심을 쏟고 돌본다면 그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이교도 남자 또는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과 차원이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한다. 선으로 악을 극복하고 하나님처럼 자비로운 친절을 보이고, 자신의 적까지 사랑해야 한다. 그렇기에 선은 믿음의 형제들에게만 행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행해야 한다.

이런 봉사가 끼친 영향력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1) 같은 믿음을 가진 형제자매를 향해 기독교인이 보여준 희생은 믿지 않는 세상에 충격을 주었다. 왜냐하면 그런 식의 공동체적인 사랑을 그들은 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요 13:35). (2) 비기독교인을 위한 기독교인의 희생은 결과적으로 초대교회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기독교인의 사랑에 힘입어서 전염병에서 살아남은 비기독교인의 많은 수가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대하는 기독교인의 모습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계속해서 씨름하는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로마 제국 당시 비기독교인이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보호하려고 했을 때 초대교회는 두려움 없는 희생적인 봉사를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비기독교인이 전염병을 피해 도망가고 사랑하는 이들까지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버렸을 때, 기독교인은 그 전염병 한 가운데로 행진해 들어갔다. 그리고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구분하지 않고 섬겼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을 고통조차도 감내하며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을 보여줄 기회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점점 더 커지는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관련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한 걸음 떨어진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면, 과연 우리가 초대교회의 자세를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우리는 사회 각계각층으로 번지고 있는 패닉 상태의 두려움에 저항해야 한다. 주변에서 점점 고조되는 긴장 가운데에서도 평안과 고요함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사람들이 가지 않고 꺼리는 식당이나 장소를 일부러 더 많이 이용하는 것은 어떨까? 의료 전문가가 말하는 조언을 조심스럽게 따르는 동시에 우리의 이웃을 위해 희생적으로 봉사할 기회를 찾을 수도 있다. 살을 파고드는 두려움과 집단 히스테리, 그리고 가짜 뉴스에 휘둘리며 나 자신의 건강만을 챙기기보다는 더 큰 공동체와 취약계층의 건강을 우선순위로 삼아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과정에서 의료 전문가의 주의사항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계획한 여행이나 행사를 취소해야 할 수도 있고, 다른 기회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심지어 내가 감염된 거 같으면 자가 격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런 대가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들은 지금을 축제 기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절망의 시간이 아닌 건 말할 것도 없다.” 디오니시우스는 그가 겪었던 전염병의 시간을 이렇게 적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의 시간이다.”

오해를 막기 위해서 부연할 필요가 있겠다. 디오니시우스는 지금 전염병에 따르는 고통과 죽음을 축하하고 있는 게 아니다. 단지 그는 그런 시련조차도 믿는 이를 시험하는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다. 이 엄청난 공포의 시간 중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또 봉사하는 것, 소망 중에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 말이다. [복음기도신문]

모제스 Y. 리 Moses Y. Lee | 메릴랜드에서 교회 개척을 준비 중. 조만간 출간 될 ‘Hear Us, Emmanuel’의 공저자.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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