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김명호 칼럼] 성경 해석학 (10)

ⓒ 안호성

“위대한 화가는 선과 색채의 마술사이며 위대한 음악가는 소리의 마술사가 아닌가? 성경 기자는 언어의 직공(織工)이다. 종교개혁자의 후배들은 시인과 수사학자가 되어라!”(김지찬.『언어의 직공이 되라』에서)

성경을 해석할 때 가장 기본이 되고 중요한 문자(文字), 문법(文法), 문학(文學), 문맥(文脈)에 의한 해석 방법가운데 이제 세번째 문학적 해석을 다루고자 한다. 문학적인 해석은 히브리 최고의 문법이요 예술의 신텍스(syntax) 이다.

문학 중의 최고의 문학, 성경

성경은 문학 중의 문학이다. 문학의 백미(白眉)가 성경이다. 나는 안 모태(母胎) 출신이다. 사실은 대학 2학년 때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선교 단체에 성경을 좀 알려고 갔다가 주님의 은혜로 늦게서야 신앙에 입문을 했다. 성경 안에는 예술적인 순수한 아름다움이 베어있다. 물론 성경 해석학에서 문학 비평이 한 몫을 차지하고 있지만, 이미 성경은 문학적인 탁월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이런 면에서 성경은 히브리 기독교 최고의(さいこう, 사이코) 문학이라 일컬을 수 있다.

성경을 단순히, “법, 언약”이라는 신학적인 틀(frame) 안에 가두고 보려고 하는 관점을 헐고 넓혀야 할 필요가 있다. 성경 안에는 다양한 문학 형식들이 있어, 우리 삶의 면면에 흐르고 있는 그 어떤 이야기들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 우주와 인생의 기원 이야기로 시작해서 결혼 이야기, 죄 이야기, 사랑과 미움, 심지어는 살인의 비극적인 이야기들을 포함, 찬미, 지혜, 다양한 시들, 서사시, 서정시, 잠언, 수많은 비유들, 기적 이야기 까지 들어 있다. 성경 전반에 걸쳐 하나님과 인간 양극 사이에서 일어나는 구속의 이야기 속에서 참으로 복잡하고 미묘한 우리 인생 이야기를 성경의 각 저자들은 고도의 필치로 저마다 다르게 그러나 통일성을 가지고 묘사하고 있다.

성경을 문학적인 관점으로 자세히 살펴 보면 그 구조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한 예로, 지금 필자가 열강중인 히브리 시편, 150편이나 되는 시편의 순서 하나만 보아도 그 문학적인 탁월함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시편에서 찬양 빼면 시체요 다윗 빼면 시체인데, 찬양시를 빼고 다윗을 제치고 부모없는 작자 미명의 고아시가 시편 첫 편인 1편으로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문학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이해와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웠던, C.S. 루이스의 말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성경은 단순한 미학적인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라는 언어의 구조물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라는 문자로 된 문법을 담은 언어의 구조물이 빚어낸 문학적인 산물이다. 성경 본문 전체가 그것이 법이든 노래든 역사든 이야기든 모든 것이 다 100% 히브리어로(일부는 조금 아람어로) 그리고 히브리 문학적인 구조 안에서 표현되어져 있다. 히브리어라는 언어로 그 특유의 문학 구조로 표현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것이 사실일진대 히브리어라는 언어를 통해 기록된 문학적인 색채가 빼어난(秀) 성경을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앙코(あんこ)없는 찐빵이나 마찬가지이다.

히브리어를 읽는 것, 문법을 배우는 것, 그저 단순히 사전 찾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문학적인 해석까지 다다를 수 있도록 공부를 해야 한다. 초점이 흘러가는 문학적인 정수, 틀(frame)이 보여야 한다. 그래야 성경이 뚜렷하게 보인다. 어설프게 문법을 알았다가는 큰 코 닥친다.

여기에 해당하는 좋은 예가, 바로 창 6장 8절(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과 마 11장 12절(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일 것이다. 주의 하지 않고 읽으면 은혜로운 구절로 여길 수 있으나 히브리, 헬라어 문법이라는 틀에서 보면 한글 성경이 잘못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구절은 밴드를 통해서 차후에 우리 성경 번역이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작가는 최고의 한 수(數, 계산)를 노린다

글을 쓰는 사람은 그가 시인이든 소설가이든 극작가이든 반드시 한 수를 노린다. 한 수가 없으면 흥미가 없다. 재미없는 것을 누가 읽고 보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겠는가? 미국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 Hemingway)는 그의 작품, “무기여 잘있거라”(Farewell to Arms)에서 마지막 문장을 무려 48번을 수정했다. 왜 그랬겠는가? 마지막 문장에서 그가 전달하고 싶은 내용 전체 핵심을 전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수 차례의 수정을 거친 그의 독특한 문학적 스타일(a hard boiled style)로 기록한 마지막 문장에서 그는 한 수를 노린 것이다: “After a while I went out and left the hospital and walked back to the hotel in the rain.”(한참 후에 병실을 나와 병원을 뒤로 하고 빗속을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 이 문장이 독자의 마음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문학에 문외한인 나 같아도 40년이 흘렀어도 이 문장을 영어로 기억하고 있으니 그 강도가 얼마나 큰지를 짐작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그렇다. 어찌 48번을 생각했으랴! 이루 셀 수 없었으리라! 성경도 거룩한 성령을 통해,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을 통해 반드시 한 수를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모세 오경의 레위기는 오경의 한 중앙에 위치에 있으며 레위기의 마지막 장, 그냥 보면 부록 같은 곳에, “서원제”라는 주제의 보석을 담아놓았다. 히브리어로 보면, 보면 볼수록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렇지 그렇게 성경이 흘러가야지, 모세 오경의 중요한 레위기가 그렇게 마감을 해야 맞지! 환호성을 지를수 밖에 없으며 유기적인 영감을 따라 썼지만, 성령이(!) 저자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헤밍웨이와 같은 노벨상을 받은 지금까지 모든 사람을 다, 문학적인 천재들을 모두 모아놓아도 성경과 같은 빼어난 한 수를 가진 문학 작품은 없다. 앞으로도 있을 수가 없다.

수 많은 문학적인 표현들

성경 안에는 수 많은 문학적인 표현들이 존재한다. 성경은 처음 부터 들어가면서, 창 1:1절 부터 문학적인 기법을 적용하여 기록 하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 “천지”(天地) 라는 단어는 아래 문학적인 기법 “메리즘”(merism) 이라는 9)에 해당한 표현이다. 이 문학적인 기법을 모르면 해석이 달라진다. 그래서 문학적인 해석이 중요하다.

문학적인 기법에 해당되는 예들을 가장 단순한 것 부터 몇 가지 적어보자. 성경의 문학적인 표현들을 다룬 히브리 시(詩)에 대한 고전적인 책은 왓슨(Wilfred G.E. Watson)의, Classical Hebrew Poetry (Sheffield: JSOT Press, 1984) 이다.

1) Gematria (수[數]를 통한 해석)
2) Atbash (알파벳 교차법)
3) Word – Pair (단어 쌍)
4) Parallelism (평행어법)
5) Chiasm (대칭구조)
6) Pivot Structure (축 구조)
7) Inclusio (수미 쌍관법)
8) Metathesis (자음 치환)
9) Merism (양극 구조)
10) Hendiadys (이사일의, 二詞一意)
11) Ellipsis (탈락)
12) Figurative Expressions (상징적인 표현들) 등등

자음전환(Metathesis)을 사용한 문학기법

위의 여러 문학 기법중 여기서는 한 예만(8번) 설명하고자 한다.

“메타떼시스”(metathesis)란 일종의 히브리어 자음 사이에서 자리를 바꾸는 언어적인 현상을 말한다. 단어 사이에서 일어나는 자음 자리 바꿈 현상은 히브리어서 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신약 성경이 기록된 헬라어에서도 일어나고 영어를 비롯 일반 언어에서 일어나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한글에서는 찾기가 어렵다.

자, 성경의 단순한 예를 보자.

“양”(lamb)을 의미하는 히브리 명사, “כֶּבֶשׂ(케베스)”(출 29:39)가 “כֶּשֶׂב(케세브)”(레 3:7)로, “암양”을 의미하는 “כִּבְשָׂה(키브사)”(삼하 12:3)가 “כִּשְׂבָּה(키스바)”(레 5:6)로 첫 번째 자음과 두 번째 자음이 바꾸어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말라기 3:6-9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이런 경우는 텍스트(text) 안에서 컨텍스트(context)에 의해 메타떼시스가 사용되어진 경우다. 창 25장의 야곱을 배경으로 말라기 선지자의 이야기(말 3:6-9)는 철저하게 “metathesis”(자음 자리바꿈)를 통해 문학적인 효과를 노리고 있다.

“후에 출생한 아우(야곱)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창 25:26) 야곱은 태어나면서부터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 “발꿈치(עָקֵב)(아케브)를 잡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עָקַב”인데 야곱(יַעֲקֹב)의 이름과 동일하다. 그래서 야곱의 이름은 문자적으로 “발꿈치를 잡은 자”이다.

창 27:36에는, 야곱이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이야기가 나온다.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עָקַב.아카브)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에서를 “속이고 축복을 가로채다”는 말 역시 동일하게 “עָקַב”이며 야곱의 이름과 같다.

위의 두 본문 야곱 이야기는, “야곱, 발꿈치, 발꿈치를 잡다, 속이다” 모두 동일 어근(עָקַב, 아인-코프-베트)에서 함께 쓰여지고 있는 언어유희(word-play)인 것이다. 히브리 문자를 통해 야곱이 누구인지? 뒷 잡아당기고 남을 속이고, 등쳐 먹는, 교활한 야곱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말라기 선지자는 십일조와 하나님의 헌물을 제대로 드리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지적하면서, 이 야곱 이야기를 배경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아” 그렇게 말하지 않고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부르고 들어간다. 말라기 문맥에서는 벌써 냄새가 풍긴다. “야, 이 복음에 끄슬린 인간아!” 듣기에 매우 불편한 그런 말이다.

본문에서는 무려 “도둑질했다”는 말을 한 절에 무려 4번을 계속 사용한다. “야, 이스라엘 정말 너는 나빠, 나쁜 놈이야! 정말 부전자전이네, 지 에비아비네, 지 에비가 야곱이 아니라고 할까 봐서… 똑 닮았네, 야 이 벼락 맞을 놈, 떼어먹을 것이 없어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을 해!” 이런 의미다.

재미있는 것은 말라기 선지자가, “도둑질하다”라는 히브리어 단어, “גָּנַב”(가나브, steal)가 따로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야곱하고 똑 같은 단어를 쓴 거다. “קָבַע”(rob, 강탈하다) 바로 여기에 언어의 묘미가 있는 것이다. 한 문자만 뒤로 딱 돌려가지고 알고 보니 “야곱”하고 같은 단어다. “듣는 이스라엘이 속이 확 뒤집어진다. 그 한 자, “ע”(아인)를 뒤돌려(metathesis) 심기를 건드려도 보통 거슬린 것이 아니다. “도적질에서 강탈하다” 더 나아가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 악독한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본문의 문자적인 정확한 해석은 하나님을 도적질하고 하나님을 강탈했다는 말이다.

이러한 텍스트를 앞에 두고 본문을 묵상하면 더 깊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복음은 진리를 만나기 때문에 이렇게 심령 안에서 불화와 전쟁이 일어난다.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어찌하든지 성도들에게 나이스하게 복음을 에둘러 전하는 우리의 무딘 심령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로부터 배워야 할 복음 전도 방법이다.

성경: 인간의 DNA 보다 훨씬 정교한 말씀

시편 119:96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

문학을 하려면 욥기를 읽어야 한다기에 난 무조건 KJV 영어 성경을 사서 욥기를 펴 읽었다. 지금도 어려운데 어찌 내가 빼어난 문학의 정수가 담긴 욥기를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난 뒤에서야 알았다. 욥기가 성경의 문학 가운데 최고로 난해한 성경이라는 것을! 유기적인 영감을 통해 영으로 기록된 성경,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 보면 볼수록 간의 DNA 보다 훨씬 섬세하고 정교한 말씀, 그래서 한 문자도 놓칠 수 없는! 난 세월이 흘러 한참 뒤에 교수가 되어 신학교 신학 논단에,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출판사 책에, 예루살렘 학회지에 세 차례나 “참 지혜자 욥”(욥 42:1-6)이라는 글을 다듬어 실었다. 주님의 은혜로 이 길 위에 서있게 하신 하나님께 또 히브리 텍스트가 소중함을 알고 이 글을 읽고 새벽을 깨워 배우는 독자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To be continued
계속됩니다. [복음기도신문]

김명호 | 헤브론선교대학교 성경언어대학 교수. 복음과 기도의 기초 위에 성경의 원어 연구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부흥과 선교완성을 위한 다음세대를 세우는 사역으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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