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명히 말하자면, 그분의 고통은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자각이 아닌 이 세상을 괴롭히는 큰 악을 자각함에서 오는 고통이었다 ”
이 그림의 문제는 무엇일까? 나는 이번 달 테이블토크(Tabletalk: Ligonier 잡지의 한 콘텐츠-역주)지에 실릴 내 과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일반적으로 학생의 관점에서 접근하여 성경적 또는 신학적 내용을 전달하려는 생각으로 글을 썼다. 이번에는 단순히 성경이나 신학적 관점에서가 아닌, 사적인 이야기를 통해 이번 주제에 관한 글을 쓰는 진지한 과제를 맡게 되었다. 테이블토크의 편집자들은 나에게 슬픔에 대해, 내가 그 슬픔을 나의 삶에서 어떻게 경험했는지 생각해보며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성경적으로 슬픔을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글을 부탁했다.
개인적인 슬픔을 논하기 전에, 나는 슬픔의 본질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우리가 슬픔의 실상을 말할 때, 우리는 고통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설명하는 고통이란 사소한 자극의 고통이 아니다. 이것은 부러진 뼈, 부러진 다리, 뚫린 어깨의 고통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의 피부를 관통하여 그 사람 존재의 가장 깊은 구석으로 내리박히는 고통이다. 이것은 마치 바이스(공작물을 끼워 고정하는 기구)와 같은 펜치로 극심한 아픔을 주며 영혼을 사로잡는 고통이다. 우리는 슬픔이라는 단어를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공격하는 고통을 말하기 위해 사용한다. 우리는 흔히 ‘상심’이라는 비유를 쓰지만, 마음이 정말로 바닥에 떨어지는 유리잔처럼 깨지거나 사고로 산산이 조각나는 뼈처럼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상하고 깨진 마음이란 사실 울고 있는 영혼, 가장 어두운 밤에 가려져 있는 영혼을 말한다.
우리가 슬픔에 관해 말할 때는 성경이 깊이 인식하고 있는 감정을 말하는 것이다. 즉, 우리 주님 자신의 삶과 경험에서 가장 사무치게 드러난 감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슬픔을 아는, 애통의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그분에게 슬픔이란 단순히 다른 사람의 고통을 동정하거나 공감하는 인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슬픔에 대한 예수님의 경험은 그 자신 안에서 느꼈던 고통이었다. 분명히 말하자면, 그분의 고통은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자각이 아닌 이 세상을 괴롭히는 큰 악을 자각함에서 오는 고통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이 거룩한 도시, 그분이 어릴 때 방문했고, 하나님이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통합적으로 보여주고, 시온의 거룩한 언덕이었던 그 도시로 오신 것을 알고있다. 예수님은 약속의 도시인 그곳의 부패가 극에 달했을 때 그곳으로 오셨다. 그 때는 최악의 불신앙이 예루살렘 성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이 성읍을 보시고 한탄하며 부르짖으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눅 13:34)
이것은 예수님께서 골고다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밀쳐지고 쓰러질 때 주님을 위해 울던 그 여인들을 보시면서 경험하신 그 슬픔이다. 예수님께서 그 구경꾼들에게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우리 주님의 슬픔은 타락한 세상에 대한 긍휼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반면에 우리가 슬픔을 경험할 때, 우리의 슬픔은 대개 일종의 개인적 상실감으로 표현된다. 우리는 C. S. 루이스의 저서 ‘헤아려 본 슬픔’(A Grief Observed)에서 이 인간적 고충에 관한 그의 심오한 통찰력을 기억한다.
내 자신의 경험에서 슬픔을 생각할 때, 마음속으로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는 몇 가지 기억이 있다. 그중 가장 고통스럽고 처음으로 떠오르는 슬픔은 내가 열일곱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에 관한 것이다. 아버지는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내 영혼의 닻, 우리 집과 내 삶에 반석 같은 존재였다. 그가 쇠약해져 여러 번 뇌졸중으로 장애를 입고 마침내 죽음 그 자체에 스러졌을 때, 나는 절망에 빠졌다.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의 영웅이었던 그의 죽음은 내 영혼에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는 상처가 되었다.
또, 2000년에 나의 소중한 친구 짐 보이스가 영원한 영광의 집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개인적인 상실감을 체험했다. 단순히 친구를 잃은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전투에서 동지를 잃었다는 것이 내게 그런 슬픔을 안겨준 것이었다. 상실감으로 인한 슬픔의 고통은 나에게만이 아니라 그 당시 우리 교회에까지 영향을 미쳐 그것은 배로 늘어났다. 이 영웅이 우리 곁에서 없어졌을 때, 나는 요나단을 잃은 다윗과 같이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라고 울부짖고 싶었다(삼하 1:19).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삼하 1:20). 아무도 이 사람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 십자가의 능력이 명백히 패배했다며 기뻐하지 못하도록 하자.
그러한 개인적 손실을 넘어서는 친구들의 상실, 동지들의 상실은 언제나 나에게 어느 정도의 슬픔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복음이 교회 안에서 적당히 타협되는 것을 보는 것만큼 나를 비통하게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내 마음은 알고 있다.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믿지 않는 자들의 악함이 아니다. 바로 기독교인의 타협이 내 영혼을 비통하게 한다. 끝으로, 내가 슬픔을 보고, 경험하고, 성경에서 그것에 관해 읽으면서, 그 슬픔이 자칫 비통한 감정으로 위험하게 발전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 감정 자체는 당연히 정당하다.
만약 우리가 슬픔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애통함이 슬픔을 넘어 쓰라리다면, 우리는 고통이 종기가 되어 독이 되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슬픔을 살펴보고 그것들이 결코 죄의 계기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은 슬픔에 결코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다. 우리도 슬픔에 그렇게 반응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복음기돔신문]
“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믿지 않는 자들의 악함이 아니다. 바로 기독교인의 타협이 내 영혼을 비통하게 한다 ”
R. C. Sproul | R. C. 스프로울 박사는 Ligonier Ministries를 설립했으며, 플로리다 주 샌포드 시에 위치한 Saint Andrew’s Chapel의 창립목사로, Roformation Bible College의 초대총장으로 봉직했다. 평생 동안 ‘하나님의 거룩성’(The Holiness of God)을 비롯하여 백여 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를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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