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TGC칼럼] 믿는 자는 어리석어 보인다. 최소한 지금은…

▲ 'Ecce Homo' Antonio Ciseri 작(1860-80년 경). 사진: 유튜브 채널 Luis Camacho Valera 캡처

“ 시간이 지나서 되돌아볼 때, 우리는 예수가 강했고 빌라도가 약했다는 것을 보게 된다 ”

하나님의 지혜는 종종 시간이 지나서 되돌아볼 때에야 제대로 보인다. 인간의 지혜는 일시적인 유행으로 지나가도, 하나님의 지혜는 마치 오래된 산처럼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의 지혜는 거짓임이 드러나지만, 그와 반대로 시간은 하나님의 지혜가 진실임을 증거할 뿐 아니라, 신실하게 그 진리를 세상에 전파하는 사람들의 참됨을 증거한다.

만약 지금 교회가 세상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궁금하다면,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선 예수를 생각하길 바란다. 그날 아침 로마 총독의 관저에서 있었던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지금 당신이 목격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누가 약자고 누가 강자로 보이는가? 누가 어리석어 보이고 누가 상식을 가진 것 같은가? 두 사람 중에 누가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최고의 결과가 나오도록 노력하는 것 같은가?

총독과 주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3).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지금 농담하는 거지! 빌라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나서 자신의 눈을 손으로 문질렀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대단히 불편한 존재였다. 그날 로마 총독이 예정했던 일정에 산헤드린과 문제를 일으킨 랍비를 재판하는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그것도 아침에 처리해야 하는 가장 첫 번째 일정으로는 말이다! 평의회는 빌라도가 그 남자를 반역죄로 유죄 선고하기를 원했다. 그것도 바로 오늘. 그러니까 유월절 전에 말이다. 빌라도는 그런 압력이 못 마땅했다. 그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는 논쟁의 여지가 많은 이 인물, 예수에 대해서 과거에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굳이 그 남자를 괴롭힐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그가 받은 첩보에 의하면 예수는 그냥 또 한 명의 유대 신비주의 선생일 뿐이었다. 그가 기적을 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가 로마 황제를 폄훼하거나 또는 로마에 반역한다는 보고를 받은 적은 없었다. 겉으로만 보면, 예수는 몇 명의 로마 군인에게 영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로마를 향한 그 어떤 불충도 보인 적은 없다.

쉽게 빠져나오기

문제를 일으키는 유대인 하나 죽이는 것은 빌라도에게 전혀 두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 예루살렘은 유월절을 지키러 온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다. 정치적 ‘처형’을 하기에 좋은 시기가 아니었다. 예수 자신이 반란을 조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의 처형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그는 농민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유대인 과격파(zealots)는 적절한 기회를 엿보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예수는 가만히 있었다. 아니, 예수라는 인물은 어찌 이리도 정치적인 감각이 없는 것인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은 사실상 빌라도가 지금 본질적으로 예수에게 사형을 면할 수 있는 즉각적인 길을 알려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예수가 할 일은 그냥 빌라도에게 빠르고도 명확하게 “아니다”라고만 대답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면 그는 로마로부터 사형당하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다. 다른 종교 문제는 산헤드린이 해결하면 될 일이고, 빌라도는 이제 자신을 기다리는 다른 중요한 일을 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예수의 대답은 이 예상치 못했던 상황을 오히려 더 어렵게 만들었다. 이게 뭐하는 거야, 지금? 지금 죽고 싶지 않다면, 상상이든 뭐든, ‘왕국’이라는 단어를 로마 총독 앞에서 언급하면 안 되지, 안 그래? 이제 빌라도는 한층 더 깊이 조사해야 할 상황을 맞았다.

누가 망상을 하고 있는가?

“네가 왕이냐?” 빌라도가 물었다. 예수는 대답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 18:37).

빌라도는 비웃음이 터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로 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 신비주의자군. 망상에 빠진 건가? 어쨌든 로마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누구에게도 위협은 될 수가 없는 인물이다. 절대로 그럴 인물이 아니야.’ 예수는 진리의 왕이었으며 그의 관심은 기꺼이 그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빌라도의 눈에 그들은 결코 반란을 일으킬만한 주체가 될 수 없었다. 또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요 18:36). 이것은 반역이 아니라 단지 종교적인 광기였다. 굳이 예수를 죽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빌라도는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 복잡한 상황에서 빠져나가는 길, 예수를 풀어줌으로써 로마가 얼마나 자비로운지를 보여주는 길, 산헤드린도 체면을 차리고 유대 군중의 분노도 잠재울 수 있는 길. 바로 유월절 죄수를 풀어주는 것이었다. 이 생각을 말하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빌라도는 이 진리의 왕에게 냉소적으로 말했다.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

세상과 교회

그날 아침 관저에 앉은 빌라도, 로마 제국을 등에 업은 그는 말 그대로 모든 권력을 다 가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예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는 그냥 거기 서 있었다.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사 53:3).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빌라도의 말이 훨씬 더 합리적으로 들린다. 예수의 말은 망상에 빠진 것 같고 이상하기만 하다. 빌라도는 부당한 처형을 막고자 했고, 좌절감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유대인 평의회와 최대한 등을 지지 않는 방법을 찾았으며 또한 예루살렘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매우 실용적인 방법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 반해 예수는, 불가사의하게도 십자가 처형을 피하기 위한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되돌아볼 때, 우리는 예수가 강했고 빌라도가 약했다는 것을 보게 된다. 빌라도는 단지 하나님이 허락하심으로 인해 자신의 권력을 행사했을 뿐이었다(요 19:11). 이제 우리는 지혜로운 이는 예수였고, 빌라도는 어리석었음을 안다. 빌라도는 ‘육체에 속한 사람’이었기에 예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전 2:14). 그리고 우리는 빌라도가 아닌 예수야말로 그와 관련한 모든 이에게 무엇이 가장 유익한지를 알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단지 한 도시의 평화만을 생각하던 빌라도는 수십 억명의 평화를 위해 걸어가는 예수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눈에 보이는 교회의 위치다. 비록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요셉’과 ‘다니엘’ 그리고 ‘가이사의 집 사람들'(빌 4:22)처럼 정부의 요직에 둔다고 하더라도, 교회는 세상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 교회는 언제나 세상의 권력자들 눈에는 망상처럼 보이는 진리를 말하고, 오해를 받고 얼마든지 잘못 해석될 목표를 추구하는, 그런 약한 곳에 설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는 더 강하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나의 증인이 되리라

예수가 빌라도에게 증언하듯이, 또 바울이 증언하듯이 (그리고 그가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행 26:24)”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예수는 우리에게 말한다.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우리 중 누군가에게 이것은 말 그대로,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막 13:9)의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권력자 앞에 서든지, 아니면 직장 동료나 이웃 또는 가족 앞에 서든지, 우리가 말하는 것은 지금 현재의 맥락에서만 보면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이 얼마나 다른 사람의 귀에 어리석은지, 또 우리가 지금 얼마나 약자의 위치에 있는지 당신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때가 빌라도 앞에 서 있던 예수를 기억해야 할 때다. 중요한 것은 어색한 상황이 아니다. 설혹 생명이 달린 심각한 상황에서라도 보이거나 들리는 게 얼마나 이상한가의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담대한 말이 아무리 비웃음을 사더라도 우리가 얼마나 진리를 신실하게 붙잡는가의 여부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 즉 하나님이 그 순간에 실제로 행하고 있는 역사가 무엇인지는 시간이 지나야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교회는 언제나 세상의 권력자들 눈에는 망상처럼 보이는 진리를 말하고, 오해를 받고 얼마든지 잘못 해석될 목표를 추구하는, 그런 약한 곳에 설 것이다 ” [복음기도신문]

존 블룸(Jon Bloom) | Desiring God의 공동 설립자. 이사장과 작가. ‘믿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와 ‘Not by Sight’ 등 저술.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를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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