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소 작가는 2004년 부산 비엔날레를 위해 <우리는 행복해요>를 구상하고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심장마비였다. 작가의 빈자리를 <우리는 행복해요>가 채웠다. 사후 작품은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빌딩이 아닌 주차장에 설치되었다. 박이소는 생전 TV에서 우연히 본 북한의 체제선전 간판에서 작품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다. ‘나’의 행복도 아닌 ‘우리’의 행복을 장담하는 북한의 프로파간다는 억지를 넘어 세뇌에 가까웠다.
가로 40미터 이상의 거대한 규모로 계획된 박이소의 작품은 소소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굵직한 고딕체는 강압적이고 선동적이다. 작가의 이런 의도는 북한 체제의 과장과 억지가 스스로 드러나도록 하는 데에 있었다. 이처럼 행복을 과장하여 선전하는 자체가 사실 그만큼 북한사회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한편 <우리는 행복해요>가 등장하고 16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SNS와 인터넷에는 누가 행복한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행복을 줄 다양한 대상들이 차고 넘친다. 볼거리, 들을 거리, 먹을거리, 입을거리, 사람들까지. 행복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사이버 공간에는 다채로운 행복 세계가 펼쳐져 있다. 그러나 SNS 유저 중 1/3은 사실과 다르게 행복을 과장한 적이 있다고 했고, 과반수는 행복해 ‘보이는’ 사진이나 글을 올리지 않으면 뒤처지는 느낌을 받는다고 답했다. 이쯤 되면 우리 사회도 행복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섬뜩해진다. 마치 박이소의 <우리는 행복해요>가 스케치 단계에서 멈춰진 것처럼, 우리가 꿈꾸는 이 세상에서의 행복은 무엇으로도 완성될 수 없는 허구임을 또다시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행복을 대체할 신앙의 단어는 무엇이 있을까?
이에 대해 성경은 전혀 다른 말씀을 전하고 있다. 목마른 것, 채울 수 없는 것이 아닌, 영원한 것과 완전한 것을 힘써 찾으라 한다. 행복보다 거룩에 이르기를 힘쓰라고 한다. 거룩에서 오는 능력과 평안이 곧 영의 행복이요, 하나님이 주신 완전한 복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변치 않는 행복. [복음기도신문]
이상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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