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학술원장이자 샬롬나비 상임대표인 김영한 교수(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가 지난 7월에 소천한 금세기 최고 복음주의 신학자이자 ‘현대판 청교도’로 불리는 제임스 패커의 신학과 그의 신학적 유산에 관해 정리한 기고문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VII. 청교도적 삶 실천
1. 청교도적 신앙 실천
패커가 태어난 가정과 교회의 분위기는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복음주의적 신앙이 아니라 명목상 성공회에 가까웠다. 이런 환경에서 패커가 받았던 교육은 복음주의적 가르침과 거리가 멀었다.
그는 어린 시절 7살 때인 1933년 9월 아이들의 괴롭힘을 피해, 학교운동장에서 글로스터의 번화한 런던 도로까지 도망치다 차에 부닥쳐 머리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이 사고로 그는 남은 생애 동안 머리 쪽에 눈에 띌 정도로 움푹 들어간 흉터를 갖고 살았다. 그런데도, 패커는 어린 시절부터 자기 삶의 섭리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패커는 옥스포드 대학교 학부생으로 입학한 지 2주 만에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하였다. 그는 1944년 10월 22일 캠퍼스 기독인연합회(IVF, 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 지부가 후원하는 복음주의 모임에 참가하면서 그리스도 앞에 자신의 삶을 바쳤다. 그는 학업에 열중하는 지성적 학생이었지만, 옥스포드에서 그의 삶의 핵심은 영성이었다. 그는 옥스포드에서 C. S. 루이스의 강의를 처음 듣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C. S. 루이스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없었지만 C. S. 루이스는 패커의 삶과 사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패커는 그의 삶 속에서 구약의 ‘전도서’를 통해 지혜를 얻기도 했다. 젊은 시절 한때 냉소주의에 빠졌던 그는 전도서를 읽고 치유됐다고 고백했다. 그는 “전도서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주관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어리석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책”이라며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모든 지혜를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는 대학 때 발견한 청교도들(the Puritans)에 푹 빠져 청교도를 연구하고, 전하고, 자신이 청교도로 살기를 원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보다 존 오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공언하면서, ‘후대의 청교도(a latter-day Puritan)’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패커는 1950년대에 「복음주의 계간지」(the Evangelical Quarterly)에 케직 신학(Keswick theology)을 “펠라기안적”(Pelagian)이라고 맹렬히 비난한 글을 발표했다. 이는 단지 학문적 비판이 아니었다. 패커가 나중 그의 저서 『성령을 아는 지식』에서 상기(想起)하는 바 같이 자신이 케직 운동이 주장하는 신자의 승리하는 삶과 내적 수동성의 교리가 자신의 내면적 경건성 추구와 차이가 있었고 여기서 오는 신학적 갈등 속에서 나온 표명이었다. 패커는 자신을 제3자로 지칭하면서 자신의 내면적 체험을 상기하고 있다: “그(필자 주: 패커 자신)는 자신을 완전히 바치려고 노력했지만, 번번이 자신이 있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것은, 자신을 온전하게 헌신하고 비운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승리의 삶, 능력으로 채워진 삶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하지만 일이 순조롭게 풀려서 상당한 책 벌레였던 그는 뜻밖에도 생명줄 같은 글을 만나게 되었다… 그 글은 당시에 그가 어떻게 자신을 다뤄야 할지 보여주었고, 그가 추구해 오던 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바로 그 학생은 나였으며, 내가 읽었던 책은 청교도 존 오웬의 전집 6, 7권과 라일의 『성결』(Holiness)이었다.”
패커는 학생시절(1945년-1946년) 청교도 오웬과 라일의 저서를 읽고 승리하는 삶에 대한 개혁신학의 해결(성화는 성령의 사역이며, 성결은 신자의 사역)을 발견한 것이다. 알리스터 맥그래스에 의하면 패커의 케직 운동 비판은 케직 운동이 젊은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접근하는 승리주의적 지배에 대한 포기의 선언이라고 평가한다. 이는 케직 운동이 추구하는 더 높은 도덕적 삶이 인간의 공로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추구에서 펠라기우스적인 인간의 행위와 공적을 배제하고 오로지 성령의 사역과 하나님의 은혜 의존에 호소하는 것은 케직 운동이 개혁 청교도적 전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우려하는데서 나온 패커의 개혁적 청교도 성향으로 평가된다. 필자는 이러한 패커의 입장에 동의한다.
2. 청교도적 영성(소명과 풍성) 추구
제임스 패커는 자신이 어린 시절 평범한 사람들에게 받았던 도움의 손길을 잊지 않았으며, 후일의 청교도(a latter-day Puritan)로서의 정체성을 키웠다. 그는 최고 수준의 전문 학자들을 위한 학문을 집필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소명은 평신도를 위한 글을 쓰는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패커에게 헌정하기 위해 출판된 논문집(a Festschrift)의 제목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신학」(Doing Theology for the People of God)이다. 그에게 출세 제일주의(careerism) 야망은 전혀 없었다. 그는 당시 가장 유명한 복음주의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주요 대학에서 권위 있는 직책을 맡지 않았다. 또 그는 교단에서도 단 한 번도 주목받는 높은 자리를 오래 맡지 않았다. 그는 평화로운 성향이 있는 온화한 사람이었지만 논쟁의 중심에서 일관되게 자신을 주장했으며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패커는 2000년 제자 목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청교도 소명에 관해 다음같이 피력하고 있다: “나는 청교도 팬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이다. 나는 대학생이었고 거듭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부터 청교도의 글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나는 저들의 글에서 영적 권위와 지혜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름부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그 이후 세대의 글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청교도들의 글을 정기적으로 읽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패커는 그가 저술한 저서 『경건의 추구』(A Quest for Godliness: The Puritan Vision of the Christian Life (1994)는 청교도적 삶의 비전을 일반 신자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천명한다.
패커는 『성령을 아는 지식』에서 청교도는 “변화한 삶을 중생의 증거를 요구하고,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져야 한다”고 성결한 삶을 강조했다고 천명한다: 화란과 독일의 경건주의자들, 존 웨슬리, 19세기 성결주의자인 라일, 오스왈드 챔버스, 앤드루 머레이, 터우저, 워치먼 니, 존 화이트 등이 분주함을 피하고 성결을 추구했다고 천명한다.
패커의 전기 『현대 복음주의 형성의 선구자 제임스 패커의 생애』 말미에서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패커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패커를 위대한 신학자(theologian)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그 열정을 책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전달할 줄 알았던 위대한 ‘삶 신학자’(theologizer)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맥그라스가 패커를 신학자가 아닌 “삶 신학자”(a theologizer)라고 불렀을 때 패커는 그것을 대단한 발견이라고 인정하며 자신은 스스로 일반 기독교인을 위한 체계적인 교리를 연구하는 “전도사”라고 결론을 내렸다. 패커는 평신도를 위한 비공식 신학적 저술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겼으며, 자신만의 체계적인 신학을 완성하거나 출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다른 학자들처럼 괴롭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에서 우리는 패커의 신학적 소박성과 마음의 가난함을 발견한다. 제임스 패커는 자신에게 주어진 명성과 성공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으며, 이것이 사실임이 분명하다. 그는 유명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자신 앞에 놓인 임무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겼다. 그는 거실에서 십 대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화려한 강단에 서는 것만큼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왕 되신 하나님을 위해 사역했다.
패커는 교회에 대해 “개혁교회는 은혜의 교리와 은혜의 삶을 재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교회 안의 개인주의는 모두 제거해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은 주님의 영광을 기념하는 교회 자체에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현대 교회를 향해 4가지 영어 단어로 권면했다: “모든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라”(Glorify Christ every way). 그는 자신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게 하려고 애쓴다”며 “이 일에 과거 신앙의 선배, 청교도들이 좋은 모범이 됨을 잘 드러내 준다”고 피력하였다.
패커는 스스로를 ‘개혁적 복음주의자’(a reformed evangelical)로 불렀으며 독선적이고 편협한 시각에 갇혀 있는 신학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는 복음주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사상적 방향을 제시했으며, 캐나다 밴쿠버 리젠트 칼리지에서는 ‘신학과 영성의 관계’에 집중했다. 특히 신학이 어떻게 기독교 신앙과 분리되지 않고 이를 도울 수 있는지에 주목했다. 그가 생애 후반부에 들어들면서 신학과 영성의 관계를 깊이 추구했던 것에 관하여 필자는 신학적 추구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면서 그의 영성신학에 공감을 표현하고 있다.
미국 휘턴대의 역사신학자 마크 놀(Mark Noll)은 패커에 대하여 “패커는 복음주의자들이 가장 듣기를 원했던 것을 저술하고 말했기 때문에 미국에서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며 그를 “마지막 청교도”(the last puritan)라고 불렀다.
미국 휘턴 대학의 명예교수인 영문학자 라이켄에 의한 패커의 인격에 대한 다음 평가는 주목할 만하다: “평생 패커가 남겨준 유산 중 하나는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고 영감을 주는 패커의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품이었다. 매 순간 그의 경건함이 드러났으며, 그의 존재만으로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었다. 패커의 말은 지혜의 말씀이었다. 그는 열심히 일했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쓰는 시간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그가 사모한 청교도들처럼, 패커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분명한 사고에 근거하고 동시에 마음을 얻는 것이라고 믿었다.” 패커는 단지 청교도 개혁신학을 가르치고 저술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자신이 그러한 청교도적인 덕성과 성품 속에서 살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패커는 그의 영적 지식을 그의 삶으로 보여주었다. 필자는 개혁적 복음주의 유산을 지키려한 그의 학문적 열정과 깊이와 아울러 그의 신앙적 인격의 겸손과 온유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VIII. 청교도 신학의 재발견
옥스퍼드대 시절은 청년 패커에게 중요했다. 그는 옥스퍼드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격적으로 만나 회심을 체험했고, 청교도에 심취했다. 패커는 옥스포드 코르푸스 크리스티 칼리지(Corpus Christi College)에서 17세기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의 저작을 만나면서 확고한 신앙인으로 거듭났다. 옥스포드대 기독인연합회 도서관에 기증된 책을 정리하다가 17세기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의 저작물을 대거 만나면서 영향을 받았다. 이 과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확고하게 믿는 신앙인이 됐다. 패커는 성경 해석자로서의 그의 인생의 경력을 시작했고, 청교도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에게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을 제공해주었다. 그는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91)에 대한 논문으로 청교도 연구에 들어갔다.
패커는 그의 저서 『청교도 사상』 서론에서 청교도들을 가리켜 ‘영적인 거인’(a spiritual giant)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자신의 신학적 사상의 배경이 청교도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고 천명한다. 패커는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John Owen, 1616-83)에게서 남아 있는 자신의 죄악, 죄성에 있는 자신에 대한 불신, 정욕을 억제하는 훈련을 배웠다고 말한다. 패커가 옥스퍼드 대학 2학년이었을 때, 그는 존 오웬의 『신자들 안에 내재하는 죄』(On Indwelling Sin in Believers)와 『신자들 속에 있는 죄의 극복』(On the Mortification of Sin in Believers)두 논문을 읽으면서 오웬이 ‘내재하는 죄’의 문제와 그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분석하는 것에 도전을 받았다. 자신이 고민하는 영적인 상태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있다는 것은 그에게 깊은 영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패커의 기독교적인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또한 패커는 오웬으로부터 그리스도의 구속하시는 사랑의 주권과 특별성에 대한 성경적 증거가 얼마나 일관되고 명백한지 깨달을 수 있었고, 성경적 신앙이란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라는 것을 배웠다.
패커는 리차드 백스터에게서 “규칙적으로 광범위한 묵상(meditation)을 하는 것이 영적 건강에 있어 극히 중대한 훈련이라는 사실”을 배웠고 말한다. 그리고 백스터의 저서 『개혁주의 목사』(Reformed Paster)를 읽으면서는 ‘성직자의 목회 임무’와 복음주의적 교회개혁이라는 이상(ideal)을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배울 수 있었다고 말한다. 요컨대, 청교도들의 저서들은 패커의 신학 형성의 배경이 되었고, 교수로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신학적인 노선이 되었으며, 현장 목회의 실제적인 지침과 방향이 되었다.
패커는 역사적 인물인 청교도 오웬과 백스터의 인격과 사상에 대해서는 저서를 통하여 접근하여 배웠다. 하지만 그는 자신보다 27세 연상인 마틴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 Jones, 1899-1981)는 현재 생존하는 청교도 목회자요 사상가였기 때문에 그를 직접 만나면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패커는 오크힐 신학교(Oak Hill Theological College)의 ‘튜터’(tutor, 1948-49)로 있으면서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주일 예배를 드렸다. 그가 로이드 존스의 설교에 매료(魅了)되었기 때문이었다. 1948~1949년엔 매주일 저녁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당시 50세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들었다. 패커 교수는 로이드 존스의 설교에 탄복하게 되는데 그 이전까지는 한 번도 그런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마치 전기쇼크를 당한 것 같았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패커 교수와 로이드 존스 목사는 서로 알게 되면서 가까워졌고 패커는 로이드 존스에게 청교도적 관점을 이해시키고 적용하는 정기 모임을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이후 로이드 존스와 함께 20년간 ‘청교도 콘퍼런스’를 열었다. 이는 20년간 지속된 ‘청교도 콘퍼런스’의 시작이었다.
패커는 2000년 제자 목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영향을 받은 인물 가운데는 청교도 설교자 로이드 존스, 엘렌 앤 스팁스, 그리고 칼빈, 오웬, 백스터 등을 든다: “저에게 더 많은 지혜를 얻게 하신 두 분이 있다. 한 분은 마틴 로이드 존스다… 큰 실수도 하셨다고 생각하지만 그 분은 훌륭한 분이셨고 훌륭한 설교자이셨다. 사역에 대한 그분의 위대한 비전, 성경적 신학에 대한 확실한 이해는 독보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그렇게 많이 전달하신 이는 본 적이 없다. 그분의 설교나 강의를 들으면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에 압도당하게 된다…그분이 하나님 말씀을 열어 가르칠 때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름부어심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경외감에 사로잡힌다.” 패커는 그가 영향받은 다른 분은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 내지 선교사 출신이며 옥크힐 신학교의 부총장 엘렌 앤 스팁스(Stibbs)였다고 말한다. 스팁스는 매우 영민하였고, 매우 고요하고 온유하였고, 쓴 글이 매우 깊이 있게 성경적이었고, 성경적 의미와 적용에 대하여 활발한 신학적 사고를 하는 분이었다.
패커는 칼빈, 백스터, 오웬, 조나단 에드워즈로부터 더 많은 영향 받았음을 피력한다: “그 두 분(필자 주: 로이드 존스와 스팁스)보다 나에게 더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은 칼빈과 청교도들이다. 청교도 중에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오웬이다. 리차드 백스터도 매우 위대한 청교도인데 나의 박사학위 논문이 리차드 백스터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있다. 이분들의 저서를 통해 얻은 것이 로이드 존스와 스팁스와의 우정을 통해서 얻은 것보다 더 크다고 생각한다.” 패커가 ‘현대판 청교도’ 또는 ‘마지막 청교도’로도 불리우는 것은 그가 청교도 사상을 연구했을 뿐 아니라 그가 청교도로 살기를 실천했다는 데 있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김영한 | 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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