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재는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베트남에 입국한 찰리, 에그롱 선교사 부부가 전쟁의 참화 가운데에서 복음의 통로가 된 과정과 베트남 주민들의 상황을 담고 있다. 대하드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는 베트남의 현대 선교사(史)를 이들의 회고록 ‘베트남에 사랑을 담아’(To vietnam with Love)를 요약, 소개한다. <편집자>
모든 베트남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1968년 구정은 잊지 못할 날이다. 특히 그 당시에 베트남에서 사역했던 선교사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해 구정인 1월 29일은 공산주의자들이 기습 공격을 개시하는 날이었다.
구정 전날 쟈라이 사람들 서너 명이 우리 집에 찾아왔다. 집안에 있는 커피 잎을 따도 되냐고 물었다. 그들은 잔치가 있을 때마다 통상적으로 목련 잎과 같이 크고 윤기 나는 커피 잎을 그릇으로 썼다. 그들은 그것을 딸 수 있느냐고 허락을 원하는 것이었다.
그 문화를 알고 있었지만 우리 집보다 더 크고 좋은 동네 숲의 것을 놔두고 왜 우리 집에서 따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말했다. “숲의 커피 잎이 더 크지만 요새는 숲에 나갈 수 없어요. 수천 명의 적들로 꽉 차있는 걸요.” 커피 잎 채취를 끝내고 돌아가면서 그들은 미묘한 암시 같은 말을 던졌다. “갈 수 있을 때 떠나셔야 할 거에요.”
그날 저녁 미군 부대 군인들이 방문했다. 그들은 평범한 어조로 “빨리 쁠레이꾸를 빠져나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얼마 전 베트콩 포로를 잡아 심문했는데 포로가 당당한 태도로 ‘너희들은 우리를 이길 수 없어. 우리는 오늘 밤이라도 너희들을 격퇴시킬 수 있다.’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다음날 새벽 3시경 공산군들의 박격포 소리에 아내와 나는 동시에 깨어 일어났다. 훗날 ‘구정공세’라 불리는 베트콩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마당으로 뛰어나가보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탄약저장고가 폭발해 불길이 치솟아 올랐고 하늘은 붉게 변해 있었다.
곧 미군과 베트남군이 반격을 시작하며 쌍방 간의 전투는 치열하게 이어졌다. 보통 때는 아군들이 민간인 피해를 피하려고 시내 외곽으로 포탄을 쏘았는데 그때는 공산군들이 박격포 사격을 하는 곳을 향하여 모든 포를 향했다. 그것은 쁠레이꾸 시내를 사이에 두고 폭격을 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갈 수 있을 때 떠나세요” 현지인이 긴박 상황 알려줘
그런 일이 발생한지 며칠 뒤 우리 가족은 기적적으로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사이공 떤선녓 공항을 경유하여 다시 냐짱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비행기 뒷 편에는 좋은 휴식공간이 있었고 냐짱 바다로 놀러가는 프랑스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비로소 평온을 누리는 듯 했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곧 냐짱에 도착했다.
그날 밤 가까운 마을에서 연속적으로 폭약이 터지기 시작했다. 냐짱에서조차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나는 아내에게로 갔다. 아내의 몸은 굳어져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안심시키며 나 스스로도 마음을 추스렸다. 우리는 같이 기도했다. 창 밖으로 시내를 향하는 불꽃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꼰뚬과 쁠레이꾸, 부온메투옷의 동역자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베트콩들이 보통 안전한 곳으로 생각했던 냐짱을 공격하고 있다면 그 쪽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동틀 때 까지 앉아서 시내 중심에서 발사되는 폭음 소리를 들었다. 곧 국군 라디오 방송과 TV 정규방송이 뉴스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제 밤의 공격은 베트남 전역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누가 이기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다음 며칠간에도 전투는 이어졌고 우리는 쭈그려 앉아서 지내야 했다. 여전히 쁠레이꾸의 동역자들과 그 지역의 성도들이 염려스러웠다. 그 격동의 한복판에서 아내와 네 자녀, 나의 생명을 살려주신 것에 감사기도를 드렸다. <계속> [GNP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