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난 책을 본다. 일주일 에 주일 빼고 최소 2번은 교회에 가고 있다. 어느 날 성경책을 보라고 하시는 감동이 왔다. 지하 철을 그렇게 타고 다녀도 성경책을 보시는 분들을 못 봤다. 하지만 기독교 교양서적을 보시는 분들은 간간 히 있으시다. 그런데 성경책을 펴고 보라하시네. 무거워서 안가지 고 다닐 때도 있었다. 솔직하게 더 파보면 ‘뭐 그렇게 할 것까지야, 집에서 보면 되는데’ 이 생각도 들고, 또 ‘바리새인도 아니고’ 별의별 내게 유리한 생각들을 하 기도 했다. 성경책만 가방에 넣고 탔다. 성경책을 폈다. 어떤 사 람은 한심하게도 보고, 어떤 사람은 곁눈질로 보고. 다 양한 시선이 느껴진다. 기독교 교양서적은 신경이 안 쓰이고, 성경책은 왜 신경이 쓰일까? “너 성경책 보는 네 모습이 쑥스럽 니?” 물어 보시는 것 같다. 선포하시라는걸까? 지하철 에서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외치시는 분 뒤에서 나는 속으로 ‘아멘’할 뿐이었다. 그 분을 보는 다른 사 람들의 경멸에 찬 시선들도 보았다.
예전엔, 자리에 앉게 될 때면 하차 하는 역의 한, 두 정거장 전에 자리를 양보했다. 그런데 성경을 보고 있으면 5, 6정거장 전에 일어나 양보한다. 어르신들이 오시면 바로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지만. 요사이 지하철에서 청년들과 대화도 해본다. 내가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대하면 팔뚝에 문신을 예쁘게 (?)한 친구들도 수줍게 웃으며 말을 할 때도 있다. 인 사도 “잘가요~”하며. 난 요즘 청년들에게 이런 마음의 고정관념을 갖고 다음세대를 위한 중보기도를 하고 있었나? 우리 교회 젊은이 교회가 너무 은혜롭고 뜨겁고 귀하다고 생각 하면서도 세상의 친구들을 너무 가혹하게 정죄하지 않았나… ‘내 아들이 저렇게 되면 안 되는데… 내 며느 리가 저러면 안 되는데…’ 어리석었다.
그래서, 지하철 에서 내 마음을 지키지 못해 성령님을 아프시게 했다. 지하철은 내 안목의 정욕을 계속 대적해야 하고, 청 년과 학생들의 곤고한 심령을 중보해야 하고, 내가 그 리스도인이란 걸 내 표정과 행동으로도 선포해야 하 는 훈련장인 것이다. ‘주님, 감사합니다. 더 나아가길 원합니다. 나의 아버 지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아멘.’
박경신 (선한목자교회 영성일기 중)